"줄을 서시오~"
아침에 거실로 나와 소리치는 남편의 손에 만 원짜리 지폐가 몇 장 들려있다. 상황을 눈치챈 큰 아이가 재빨리 아빠 앞으로 줄을 선다. 그 뒤로 둘째, 셋째가 줄을 서고 나도 뒤따라 선다.
평소 텅텅 비어있는 남편의 지갑에 가끔 현금이 들어있는 날이 있다. 골프를 치고 온 다음 날이다. 골프장에서 캐디피를 현금으로 내야 하기 때문에 현금을 찾아서 쓰고, 다음날 남은 돈으로 인심을 쓰곤 한다.
"감사합니다~"
돈을 받아가는 아이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나도 만원을 받았다. 돈의 액수를 떠나 공돈이 생기면 신난다. 앗싸, 이걸로 뭐 하지? 보통 그렇게 돈을 받으면 지갑 안에 다른 돈들과 섞여 어디론가 사라진다. 오늘은 만원을 주머니에 넣고 산책을 나갔다.
내 발길이 향한 곳은 집에서 십여분 정도 걸어서 갈 수 있는 전통시장이다. 시장을 어슬렁 거리며 구경을 했다. 시장 안에는 생선가게, 반찬가게, 과일가게, 만물상, 꽃집, 떡집 등 다양한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주말에 가면 어슬렁 거리기가 쉽지 않지만 평일 낮에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아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좌판에 놓인 생선들, 과일들이 내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나 데려가. 나 정말 맛있어."
시장 끝자락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꽈배기집이 있다. 꽈배기와 단팥도넛, 찹쌀도넛이 예쁘게 놓여있다. 종류별로 여러 개 사고 싶지만 건강을 생각해서 맛볼 정도만 샀다.
"꽈배기 이천 원어치 주세요~"
만원을 내고 팔천 원을 거슬러 받았다.
꽈배기 봉지를 손에 들고 다시 집 쪽을 향해 내려오며 따뜻한 두부를 한 모 샀다. 따끈따끈한 국산콩 두부 한 모에 사천 오백 원. 집에 가서 점심으로 두부김치를 만들어 먹어야겠다. 이제 삼천 오백 원이 남았다. 더 내려가서 아까 봐 둔 반찬 가게 앞에 놓인 솥을 보며 외쳤다.
"사장님, 옥수수 한 봉지 주세요~"
며칠 전부터 옥수수를 먹고 싶었다. 찐 옥수수 두 개가 들어있는 봉지를 삼천 원에 샀다.
정육점에 들러 돼지고기를 사고, 야채가게에서 감자도 샀다. 남편한테 받은 만원은 오백 원을 남기고 다 썼기 때문에 고기는 카드로 사고 감자값 이천 원은 계좌이체를 했다.
"아이고, 더워라."
무더위에 헉헉거리며 문구점 앞을 지나는데 아이스크림 냉장고에 '하드 500원'이라고 써진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주머니 속 오백 원으로 평소 좋아하는 멜론맛 하드를 사서 먹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평소에 굵직한 식재료는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신선식품이나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은 동네마트를 이용한다. 가끔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가기도 하는데 그곳에 가면 주차하는 순간부터 지치기 시작한다. 마치 좀비가 된 기분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사야 할 것을 잊어버리거나 살 생각 없던 물건들을 사가지고 오곤 한다. 집에 오면 기운이 다 빠져서 사 온 물건들을 대충 때려 박고는 배달을 시켜 먹거나 라면을 끓여 먹곤 했다.
시장에 다녀오면 대형마트에 다녀온 날과 달리 기운이 난다. 방금 사 온 신선한 재료들로 뭔가를 만들고 싶은 의욕이 솟아난다. 오늘 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김치와 고기를 볶아 두부김치를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 저녁에 먹을 카레와 감자볶음을 만들었다.
다음 날도 시장에 갔다. 어제 데려오지 못한 새빨간 자두와 토마토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리따운 누님은 뭘 드릴까?"
넉살 좋은 야채가게 총각이 내게 말을 걸었다. '아리따운 누님'이라는 친절한 말에 신나서 자두와 토마토 외에 계획에 없던 양배추와 브로콜리까지 집어 들었다. 대형마트 보다 시장이 편안한 이유는 이런 게 아닐까. 대형마트에 가면 나는 고객님 혹은 사모님이 되어 평소답지 않은 고상한 사람을 연기하곤 한다. 하지만 시장에 오면 나는 그냥 누나고 동생이고 아줌마인 본래의 나를 숨길 필요가 없다.
신나서 이것저것 사다 보니... 너무 무겁다. 아이고~ 아리따운 누님, 알통 굵은 누님 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