훅! 가을

괴발자 모드 속 쉰네 번째 이야기

by 돌뭉치

바람이 선선하다. 가을이 오려나 보다. 오늘은 8월 27일이고, 음력으로는 7월 5일이다. 예전에는 음력의 기운을 믿지 않았는데, 계절의 변화를 보면서 달의 기운을 실감한다. 동화에서는 태양과 바람 중에 태양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면서 이겼는데, 그 태양보다 달이 더 센가 보다. 쨍하고 강한 것보다 은은하게 약한 것이 승한다. 첫 문단을 쓰고 나흘이 지났다. 그날 9시 회의를 앞두고 비장함을 담았나 보다. 설득해야 하는 사람이 많았다. 가을에 대한 반가움은 긴장감으로 탈바꿈했다. 의도한 대로 회의는 잘 끝났지만, 대신 일기 매듭짓는 걸 잊었다. 여름의 끝은 바빴다. 밤에도 우글대던 더위의 기운도 이제 끄트머리가 보인다. 주말 아침 커피를 마시며 베란다를 보니 우듬지에 단풍이 얹혔다. 어제도 더위 주의 문자가 왔는데, 그래도 가을은 오나 보다.


김훈 작가의 《허송세월》에서 ‘햇볕 냄새’라는 단어를 처음 보았다. 햇빛이 냄새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 어감이 좋아서 가져왔다. 봄이 오면 아지랑이가 피고, 따뜻한 햇볕이 비춘다. 일 년 내내 해는 뜨지만, 찬 겨울을 보낸 볕의 온도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특히, 내가 선호하는 계절은 가을이다.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찬 겨울을 준비하는 찰나가 선사하는 서늘한 대기와 바람의 기운이 남다르다. 그래서 가을의 밝음을 좋아한다. 밤에 돌아다니는 편보다 낮에 활동하는 편을, 이왕이면 오후보다 오전에 중요한 일을 마친다. 지극히 아침형 인간이다. 일어나서 맞는 태양은 어둠을 뚫고 나와서 선명하고 색이 짙다. 오늘은 김 작가 덕분에 그 냄새까지 맡았다. 온몸 틈틈이 월요병 바이러스가 침투하는 출근길이었지만, 햇빛 향 때문에 그 통증이 다소 누그러지는 듯했다. 아침부터 태양 향 아로마 마사지로 호강했다.


햇볕은 냄새를 가질 수 없다. 김 작가도 소제목은 저렇게 붙였지만, 본문에서 해가 비췄을 때 그 물질이 타고 나는 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 더 의미 있지 않은가. 시시각각 냄새의 주인이 바뀔 테니 말이다. 지구는 매일 자전하고 있어서, 태양은 중심부에서 가만히 있어도 움직이는 효과를 낼 수 있다. 덕분에 나는 햇덩이를 보며 일산에 있는 엄마 냄새도 맡고, 우주로 간 아빠 내음도 느낄 수 있다. 호주에 사는 시루는 종일 뛰어놀기에 그 향이 짙게 진동할 것이다. 시각보다 청각의 기억이 더 오래 남는 것 같다. 레이먼드 카버 작가의 《대성당》을 보면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오늘은 후각 편이다. 아빠와 시루는 멀리 있어서 당장 볼 수 없지만, 머릿속 냄새를 떠올리며 그들과 함께한다. 오늘따라 가을 햇빛 향이 더욱 강하다.


“여름과 겨울 사이는 뭐지?”

“가을.”

“가을은 갑자기 오지? 그리고 짧지?”

“응”

“여름과 겨울은 길지?”

외로움에 대해 토로하는 내게 친구가 준 해답이다. 인생에서 괴로움은 여름과 겨울처럼 길고 행복한 가을은 짧단다. 더위에 취약한 내게 찰떡같은 비유를 들어줬다. 친구 말이 맞다. 가을은 갑자기 와서 훅 지나간다. 내 인생 좋은 시절을 누려야겠다. 바야흐로 완연한 가을이다. ‘완연’, 눈에 보이는 것처럼 아주 뚜렷한 걸 의미한다. 모호함을 가득 찬 삶 속에도 날씨만은 본인의 변화를 확실히 드러낸다. 분명 그제까지 에어컨을 틀었는데, 어제는 홑이불을 바꿔 잤다. 너무 더워서 외출하기 두려운 때도 있었으나, 점점 나들이하기 좋은 온도로 변해간다. 가을이 좋다. 공기도 좋고 냄새도 좋다. 봄은 뭔가 시작을 알리는 느낌이어서 뭐라도 해야 할 것처럼 분주하지만, 가을은 연말을 맞을 준비만으로 충분하다. 크리스마스도 있어 신난다. 파스텔톤의 화려한 봄과 달리 파란 가을은 담백하다. 그래서 나는 가을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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