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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화] 유성의 화원

기산심해 멸절기

by 하성운

부드러운 바람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자 순식간에 뜨겁고 사납던 공기가 조용히 사라졌다. 밖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하고 공허하고 평온했다.


"우리가 같이 살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남은 사람들은 자기가 알아서 잘 살면 돼."

윤슬은 연기를 피해 달아나 구석으로 숨었다. 그 모습을 본 나래는 문득 청하에게 물었다.


"왜 저런 거 달고 사냐?"

"엄청 가족 같은 친구라서."

"허 참, 소울메이트 같은 게 진짜로 있기라도 한 줄 알아? 결국 다 각자도생이지."

"혼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딨어."


올곧은 한마디에 나래가 코웃음을 쳤다. 마치 그 한마디가 어디선가 본 허울 좋은 교훈이라도 되는 양. 청하는 짧게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작게 속삭였다.


"한 개비만 더."

"오늘은 여기까지만."


둘 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사람은 파헤칠수록 그 사람에 대한 의문만 더 생길 뿐이었다. 한 사람의 작은 세계가 다른 사람의 작은 세계를 이해하려면 평생 노력을 기울여도 그 답에 결코 닿을 수 없을 것이다. 섣부르게 판단할 수도, 왜 그렇게 됐는지도 이해할 수도, 반대로 본인을 이해시킬 수도 없다. 사람은 세계니까 죽기 직전까지 그 사람의 모든 것에 대해 절대로 전부 다 이해하지 못할 거고 자신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반려가 있다는 것은 일생에 있어서 두 번째로 손꼽히는 행운일 것이다.



***



오랜만에 만난 부모는 어색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마치 어릴 적에 그렸던 작품을 꺼내보듯 특유의 질감과 향이 익숙하고 지독하게 향수만 따라붙었다. 이들을 스쳐 지나가는 공기 중에는 재회의 기쁨도 잘못의 반성도 없었다. 무심하고 귀찮고 어리고 지루하고, 그의 곁을 떠나기 전 일상과 같았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일상에 균열이 생긴 만큼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부모가 보인 의외의 반응이었다.

"그 여자애 사람이 아니더라."


놀랄 새도 없이 자연스러워서 뒤늦게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말을 이어갔다.


"대학생 때 빛이 나는 눈과 머리색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있어. 실종된 교수가 딱 그 여자애 같은 특징을 가진채 강의실에 돌아온 적이 있는데, 평소 게으름이 많던 그 양반이 돌아온 날부터 학생들을 헌신적으로 가르치더라. 어느 날은 자신의 모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학교 옥상에서 몇 날 며칠 동안 우주선을 만들기도 했지."


듣기에는 매우 충격적인 내용이었지만 비명 한 자락 나오지 않았다. 청하는 어찌 반응할지 몰라 애꿎은 옷자락만 쥐어뜯었다.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한 채 다음 말이 나왔지만, 딱히 뭔갈 바라는 느낌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미치기 전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사람이었다면서 안타깝게 여겼어. 하지만 난 그가 실종되기 하루 전날 영혼의 형태로 우주선을 수리하는 모습을 봐버렸고, 그때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확인시켜 줬다는 것에 대한 보상을 주겠다. 그 여자애가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되지 않도록."

이게 현실인가 아닌가를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서로에게 무언가 변화가 생기는 징조였다.


"어쩌면 그 여자애 같은 종족이, 우리 주변에 더 있을지도 몰라."



***



"네가 바라면 골칫거리를 치우고 다시 일상을 되찾아 올 수 있어."


기세등등하게 말한 것이 무색하게 본인을 밀친 손끝엔 황당함과 실망감이 가득했다. 눈은 차마 마주할 수도 없이 한껏 가늘게 뜬 채 이쪽을 향해 있었다. 여자애는 기가 막히는지 허탈한 웃음을 내뱉으며 다시금 입을 여는 청하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하는 건 어른이 막아서도, 돈이 없어서도, 대화가 통하지 않아서도 아니야. 우리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야! 방금 엄마가 그걸 과잉방위라고, 어떻게든 일을 해결해 주겠다고 했단 말이야. 어른들은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아, 저들이 우리의 미래란 말이야."


그는 여자애에게 말했다. 본인이 딸을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미숙하고 무지한 본인은 그저 먼발치에서 자식이 홀로 서는 것을 바라볼 뿐이다. 기운이 날뛰어야 할 때는 언제이고 잠잠히 있어야 할 때가 언제인지는 나이가 들어서도 모른다. 그 말에 윤슬은 어안이 벙벙한 듯 도저히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날뛰는 기운은 잠재워야 하고, 바닥인 기운은 끌어올려야 한다. 그것을 평생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한 삶을 미련하게 끝마치는가 하면, 그걸 깨달은 사람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수도 없이 마음이 짓밟혀 삶을 일찍 정리하곤 한다. 그 세상에 도움을 주지 않은 사람은 그 세상 속에서 발언권이 없다. 지금 여자애는 저 말에 반박할 수 없지만, 그도 마찬가지다. 서로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그들이 서로에게 제대로 된 관심이 없다는 건, 간섭할 자격도 없다는 뜻이 된다. 어린 사람들에게 모든 첫 경험은 무섭고, 어렵게만 다가온다. 타인이 보기엔 별것 아닌 일일지 몰라도, 그 당사자에겐 온 세상이 흔들리고 무너진다. 시험 하나, 친구와의 갈등 하나, 단순한 실패 하나하나가 삶 전체를 뒤엎는 공포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나약하다, 유치하다, 쉽게 말하는 것은 어린아이도 할 수 있다. 그 상황을 현재 본인이 헤쳐 나가는 것이 아니니까. 정작 당사자의 상황 속에 빠진다면 함부로 말하는 건 그 누구라도 절대 못 할 것이다. 나이가 들면 정작 중요한 기억을 놓쳐 버리게 된다.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이는 본인 뒤에 올라오는 사람을 향해 비소 섞인 웃음을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방임한 어린 사람들이 해낸 성과와 긍정에너지를 보고 있으면 본인이 비참하게 느껴지게 된다. 그런 어리석은 나날을 보낸 다음 일생에 몇 번 없을 반짝이는 순간이 오면 저절로 마음속에 새기게 된다. 그는 상체를 일으켜 천천히 여자애한테 다가갔다.


"책임감을 갖고 법을 지키려 노력하는 사람은 과거에 올바른 방식으로 참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야. 그렇다면 네가 사람의 가능성을 보고도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저지른 것은, 올바른 가르침을 주지 못한 주변 어른들의 불찰이다. 그런 일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널 보고도 혼내기는커녕 감싸주지도 못했으니까."


한없이 밝은 안광이 흔들렸다. 반박할 만한 여지가 없이 그 묵직한 말은 무심하지만, 묘하게 안정되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해서 네 행동에 대한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니야. 사람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든다는 건 미래에 생길 모든 가능성을 짓밟는다는 것이니까. 결국 사람들에게 막강한 손실로 다가오는 길은 같은 종족인 사람의 죽음이라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다."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여자애와 만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헤어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곧이어 후회가 밀려왔다. 처음 헤어지기 전 순간부터 여자애의 사고를 따라 했다. 앞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느낌 가는 대로 본인에게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즐겼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청하 본인에게 있어서 너무나 큰 공포로 다가왔다. 순간 오른쪽 귀에서 그가 외쳤다. 의도와 다르게 내뱉는 단어 문장 하나하나가 한 사람의 틀을 깎아내린다. 깎이고 깎여서 결국 재가 되어 사라지기 직전 사람들은 묻곤 한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니.' 도리어 이쪽에서 묻고 싶다. 시간은 더럽게 안 가고 불안감은 나날이 커져만 가는데 아무런 길이 보이지 않는다. 잠시 쉬어가면 길이 보일 거라는 사람의 말도 말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빛이 없는 바다에 윤슬이 생길 리 없다. 도망치지 말고 맞서 싸우란 말도 징그럽고 거칠고 잊을 수 없게 다가온다. 모든 마음과 기력을 잃은 사람에게 불구덩이로 자진해서 들어가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불을 견딜 수 없는 사람에게 불구덩이로 들어가라는 말은 잔인하게만 들려왔다. 선택권이 없는 상황에 절망하는 모습마저 손가락질받는 현실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선택지였다.


"이렇게 된 것이 내 잘못일까."

"아니지."

"그럼 쟤네 탓인가?"

"아니."

"다 망해버렸어.“

“그럼 뭐 어때.”


***



"제일 재밌었던 날이 언제야?"

"글쎄, 콕 집어서 말하긴 어렵지만, 밤에 바닷가를 간 게 좋았어."

"난 밴드공연 보러 간 거랑, 같이 야구장 간 거랑, 하루 종일 영화 본 것도 좋았고 또..."


해가 산중턱에 걸칠 때, 거기까지가 주어진 순간의 끝이었다. 그가 준 기회의 시간이 점점 사라져 가고, 붉은색 경계선이 시야를 드리울 때 여자애가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내가 마지막 희망을 이루려 간 그날, 건물 안의 모든 사람들은 사라져 있었고, 쓰러진 희망자만이 남아 있었어. 내가 사람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너희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멍청한 결말로 이어지지 않았을 텐데. 잘못을 가득 떠안은 나는 더 이상 사람으로서 너희와 이야기를 쓸 수 없어. 하지만 너희랑 같이 지내보며 알게 된 것이 있어. 사람들은 무기력함과 활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 같아. 혼자만의 삶에서 무기력함에 빠져 있던 이들도, 모두의 문제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힘을 모으잖아. 과거의 이야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썩어빠져서 망했다고 모든 걸 흔적도 없이 끝내고 싶어 해. 하지만 세상은 아름답다고 하기엔 너무 지랄맞고, 망해서 모든 걸 포기하기엔 너무 재밌는 것 같아.'


"야, 나 좀 봐주라."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나래가 서 있었다. 숨을 고르지 않는 걸 보니 한참을 서있었던 모양이다. 기껏 다시 만난 이들은 거창한 인사를 주고받지 않았다. 만난 지 한 달도 안 된 사이였기에 부둥켜안고 울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저 시시원섭한 느낌으로 있었던 일들을 나누고 앞으로의 일을 물으며 서로 어깨를 토닥였다. 청하와 나래는 본인의 집으로 돌아가는 여자애를 조용히 바라봤다. 눈앞에서 부는 바람이 살갗을 꿰뚫으려는 듯 거세게 휘몰아쳤다. 오래 맞으면 맞을수록 작은 모래알들이 스치는 날카로운 감각이 들었다. 힘겹게 눈을 뜨고 추위에 익숙해지니, 이제야 시야가 트이기 시작한다.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어선과 소형 보트들이 일렬로 정렬돼 있다. 슬며시 밑을 내려다봤다. 짙은 녹조빛의 불규칙한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 물살에 수면 아래 해초들이 휩쓸려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항구도시와 잘 어우러졌다. '언제 봐도 정말 멋진 곳이야.'라며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외쳤다. 발밑 시선을 완전히 아래로 꺾자 이번엔 본인 발등이 보인다. 이 모습은 배경과 조화롭지 않다. 바람이 거세고 자주 불기 때문인지 이 주변은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가까이서 봤을 때 비로소 느끼는 이 광활함을 평생 사진을 통해서만 보는 사람들이 많다. 본인은 이 아름다운 곳을 눈에 담을 수 있으니 다수의 앞에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숨이 멎는 찰나를 틈타 물 위로 낙하한다. 바다로 들어간 순간 영혼의 형태로 돌아간다. 역시 이 모습이 가장 편하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심해를 향해 손을 뻗는다. 열심히 헤엄친 끝엔 칠흑 같은 기류가 온몸을 짓누른다. 집으로 돌아온 기분은 언제나처럼 익숙하고, 조용하고, 편안했다. 하지만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마음속에서 휘몰아치는 기도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 애들이 또다시 무기력에 잠기고 마음을 잃은 어른으로 뒤틀려 갈 때, 그 멸절기를 끝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누군가가 다시 나타나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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