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운의 방향
"내는 사람 진다. 가위, 바위, 보!"
"아..!"
나래가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청하의 손을 잡고 쭈욱 늘리더니 이내 힘껏 흔들었다.
"눈치 없는 자식, 패자는 뒷정리나 하시지."
그 모습에 윤슬은 청하의 어깨를 토닥이며, 협소한 공간에 널브러진 과자 봉지들을 주우려 일어났다.
"청하야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
"그날 괴롭힘 어쩌고 일은요. 그냥 우리끼리 놀자고 했던 건데요. 별 뜻은 없었고, 그냥 재미로요. 근데 갑자기 어떤 애가 찾아와서는 전부 다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것 있죠."
쿵, 쿵 책상에 묵직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입으로는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듯 거리낌 없이 떠벌렸지만 다리 떨림은 계속해서 멈추지 않았다. 상대는 이질감이 쌓이는 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전에 어서 다른 세계를 물밀듯 불어넣었다.
"여자애 한 명이 사람 넷을 죽였다는 게 도저히 믿기질 않네. 제대로 본 걸 말해야 해, 네놈들이 감시 카메라를 가려놔서 네 말 말고는 마땅한 증거가 없어."
모든 감정이 점처럼 사라지는 어둡고 어색한 공간에 반가운 소음이 들려왔다. 철제문이 열림과 동시에 소란스럽지만 생기 가득한 사람들 소음이 적절히 섞인 안심되는 흐름이 둘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왔다. 동시에 다리의 떨림이 사라지며 책상도 멈췄다.
"피해자들 상태 좀 보세요, 뭔가에 탄 흔적만 남아있는데 불이나 전기에 의해서 탄 건 아니에요."
"그럼 대체 뭐란 말이야, 사람 넷이 그냥 죽어 있어. 말이 돼?"
"이 학생 말로는 뭐래요?"
"자기가 본 바로는 그 여자애 손짓 한 번에 모조리 죽어 나갔다는데, 단체로 귀신이라도 홀린 건지 원."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소리 메아리로 방 안을 가득 채우며 형사는 서류를 눈앞 상대에게 보여줬다. 날카로운 침묵이 인원을 다시 둘로 줄이자, 상대는 한숨을 푹 쉬곤 눈알을 굴렸다. 형사는 청장을 바라보는 듯한 허탈한 눈빛으로 다시 키보드 자판을 두들겼다. 일의 진전은 언제냐는 듯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여자애의 인상착의를 묻자 몇 분간의 정적이 흘렀다. 상대는 뭔가를 고민하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걔네 눈을 자세히 보면 절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거든요. 애초에 우리랑 다른 어떤 생명체인 것 같았어요."
"눈이 어떻게 생겼는데?"
"마주치면 소름 돋을 정도로 밝은 안광이 노려봐요. 여자애 쪽은 머리색도 사람 같지 않게 특이하고요."
***
그날 새벽, 나래는 알 수 없는 불쾌한 예감에 사로잡혀 잠에서 깨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 지내는 게 백번은 낫다고 생각했다. 화장실 불이 10분 간격으로 깜빡거리질 않나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여기저길 만져보질 않나. 쿵쾅거리는 발소리들이 둔탁하게 튕겨 올라 뇌를 북처럼 두들겼다. 이불을 잽싸게 걷히곤 주방으로 달려갔다.
"외계수달인어아가씨야. 사람은 보통 새벽 4시에는 자야 하거든. 대체 언제까지 들여다볼 거야?"
손으로 움켜쥐듯이 윤슬의 머리를 잡고 옆으로 밀어내곤 창문을 탁, 닫아버렸다. 그리곤 발걸음을 틀어 화장실 문 앞에 서 문을 두세 번 쾅 내려칠 뻔한 손을 간신히 멈췄다. 곧이어 문짝을 날려버리려는 기세를 머금고 대신 문고리를 잡았다.
"친구야! 네 게워내는 소리에 윗집, 아랫집, 옆집 전부 비위가 쏠리겠다. 지금이라도 구급차 부른다, 어? 부른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훌쩍거리는 소리에 이어 미세한 수돗물 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나래는 세상이 떠나가라 한숨을 쉬며 싱크대 밑에 앉아 화장실 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윤슬은 그의 눈치를 살피다 옆에 조용히 쭈그려 앉아 뭔갈 건네받았다. 나오는 순간 청하의 입에 담배가 물리자, 당황해하며 윤슬을 살짝 밀어냈다. 담배를 건넨 철부지는 만병통치약이라며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바닥으로 퉁명스럽게 던졌다. 힘을 줘 눌러봐도 불이 생기지 않고 물고 있는 담배마저 어정쩡하게 떨어졌다.
"니미럴, 개 답답하네. 줘봐."
생각보다 거센 불길에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 모습에 나래는 아랑곳하지 않고 떨어진 담배를 주워 다시 상대의 입에 물렸다. 청하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자연스럽게 연기를 빨아들였다. 한 모금 마시니 목구멍이 살살 간지럽고 눈물이 날 정도로 피부 표면이 따가웠다. 그럼에도 독한 연기를 놓지 못하니 계속해서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기침이 끊이지 않는 모습을 본 윤슬이 급하게 창문을 열었다.
"너 이거 언니도 알고 있어?"
"당연하지, 모르는 척 넘어가 주는 거야. 대놓고 눈앞에서만 안 피면 돼."
애들은 분명히 잘못된 일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문제 삼지 않고 덤덤하게 넘어가니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돼버렸다. 손에 쥐어진 건 그저 냄새가 고약한 막대일 뿐이다. 정말 별것 없이 그것을 처음 시도하기 전까지만 심각한 일이었다. 사회에서 정한 규칙을 어기는 짓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고 오히려 약속을 지키며 매일 솟구치는 감정을 숨죽이는 일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본인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져 불안했지만 애써 그 감정을 무시하고 다시금 연기를 입에 갖다 댔다. 나래는 몇 시간 후에 도착할 집주인을 위해 집에 있는 창문을 죄다 열고 방향제를 곳곳에 뿌리며 말했다.
"만약에 한 명이 밉보여서 쫓겨나면, 남은 사람은 따라오지 말고 그냥 남아있어."
부드럽고 은은한 바람이 피부 표면을 스쳐 지나가자 순식간에 뜨겁고 사납던 공기가 스산하게 사라졌다. 창문 밖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하고 공허하고 평온했다.
"우리가 같이 살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한 명 뒤지면 남은 사람들은 자기가 알아서 잘 살면 돼."
윤슬이 연기를 피해 달아나 코를 막고 이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본 나래는 문득 청하에게 물었다.
"왜 저런 거 달고 사냐?"
"엄청 가족 같은 친구라서."
"참내, 소울메이트 같은 게 진짜로 있기라도 한 줄 알아? 결국 다 각자도생이지."
"혼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딨어."
올곧은 한마디에 나래가 코웃음을 쳤다. 마치 그 한마디가 어디선가 본 허울 좋은 교훈이라도 되는 양 청하는 짧게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작게 속삭였다.
"하나만 더 할래."
"오늘은 여기까지만."
둘 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사람은 파헤칠수록 의문만 더 생길 뿐이라 한 사람의 작은 세계가 다른 사람의 작은 세계를 이해하려면 평생의 노력을 기울여도 그 답에 결코 닿을 수 없었다. 섣부르게 판단할 수도 왜 그렇게 됐는지도 이해할 수 없고, 반대로 본인을 이해시킬 수도 없었다. 사람은 세계이니까 죽기 직전까지 그 사람의 모든 것에 대해 절대로 전부 다 이해하지 못할 거고 자신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반려가 있다는 것은 일생에 있어서 두 번째로 손꼽히는 행운일 것이다. 그날 새벽 나래는 결국 한숨도 자지 못했다. 생리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이 원인이 아닌 막을 수 없는 무언가가 가까이 오고 있었다. 얕은 잠에 휩싸여 얼얼한 목의 통증을 느끼며 꿈에서 깨어나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먼저 여기가 꿈이라는 걸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돌무더기를 올린 듯한 눈을 안간힘을 써서 뜨면 몸이 한결 가벼워지면서 깨어난다. 후엔 안심보다 허망함이 밀려오면서 다시 눈을 감는다. 그 순간 누가 어깨를 살살 흔들었다. 조심스레 깨우는 윤슬의 모습 뒤로 햇빛이 방 안을 밝게 드리우고 세탁이 완료되었다는 음악 소리와 작게 떠드는 티비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오늘 새벽 도심 상공에서 거대한 유성이 포착되었습니다. 대기권을 통과하며 마찰열에 불타오른 유성은 초당 45km로 엄청난 속도로 추락했으며, 정확한 시각은 새벽 4시 18분경으로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일대에서 강한 섬광과 진동이 감지되었습니다. 항공우주연구원 측은 해당 물체가 일반적인 유성이 아닌 비정상적인 궤도를 가진 천체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머리 괜찮아? 새벽에 유성우 떨어진 이후로 청하랑 나만 계속 못 잤어."
"청하 쟤 근데 말도 없이 나간 건가, 가출한 거야?"
"너 무슨 짓 했어?"
윤슬이 넋이 나간 채로 현관문을 바라봤다.
"무슨 짓은 네가 했겠지, 너 잘 때 진짜 시끄럽던데. 베개로 틀어막으려다 참았다."
"청하를 찾으러 가야 하나?"
"아니, 쟤가 첫 심부름 가는 유치원생이냐? 똑똑한 애니까 어련히 잘하시겠지, 넌 이리 와서 빨래 너는 거나 도와줘."
나래가 윤슬을 발로 까며 세탁기가 있는 곳까지 굴렸다. 윤슬은 대굴대굴 굴러가다 문지방에 턱, 걸리곤 그대로 기절한 척을 했다.
"커어억..."
"아니 이 자식?"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과 합류한 청하의 손에는 양손 가득 봉지가 들려 있었다. 청하는 윤슬이 베란다 밖에서 비비 꼬면서 찡찡거리는 모습을 지나 부엌으로 향했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을 때 자연스럽게 다시 불편함이 스며들었다.
"청하 너 요리할 줄 알았으면 진작에 말하지. 이제 과자 먹지 않아도 되겠다."
윤슬은 그 말에 화들짝 놀라 나래의 등짝을 탁탁 치며 맞장구를 쳤다. 밥을 다 먹고 난 후 셋은 진지하게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차례였다.
"그래. 돈 없고, 빽 없는 가출 청소년들이 어떻게 하면 생산활동을 통해 소득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있니?"
"우린 사람이 아니니까 돈 같은 거 필요 없어!"
나래가 윤슬의 볼을 잡고 양옆으로 쭉쭉 늘리며 설명했다. 그대는 모르겠지만 청하와 본인은 16년 넘게 자본의 냄새로 숨을 쉬며 이미 돈이 인격이고 인생인 가격표가 붙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인간의 지위, 인권은 다 자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며,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면, 그건 돈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청하가 손을 슬며시 들고 용기 있게 의견을 냈다. 살면서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소재였다. 하지만 흔해 빠진 대답은 이들에게 있어서 시원하고 명확한 대답이 아니었다. 나래는 핵심부터 찔러보기로 했다.
"사람들이 돈을 쓰고 싶게 만드는 뭔가가 없을까.”
이번엔 윤슬이 손을 번쩍 들어보았다.
"꿈과 희망?"
"그래, 좋은 의견이야."
청하는 혹시라도 나쁜 쪽으로 빠지지 않길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답변을 계속해서 던져봤다. 다 같이 머리를 감싸고 고전하고 있을 때 자연스레 누군가 아이스크림을 꺼내 들었다. 달콤한 무의식 속 향연이 지나가고 누군가 재채기를 했다. 순간 건물 전체의 조명이 반짝였다. 동시에 둘은 윤슬을 바라봤다. 가슴속 어딘가에 아주 작은 스위치가 눌린 듯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뭔가가 시작된 듯한 긴장과 설렘을 가득 실은 기류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 한 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한 명은 받아 적을 준비를 하고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외계대행소- 골치 아픈 문제를 외계 루트로 한 번에 해결해 드립니다. 사람 대신 기적을 만들어주는 대행 서비스.'
"아름답고 완벽해."
"윤슬아, 넌 괜찮니?"
나래는 오른손을 제 가슴에 얹더니 이내 비장하게 읊었다. 윤슬은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의 실질적인 주인이 될 것이다. 윤슬이 뺨을 후려치며 알아듣게 설명하라 하니 모든 일의 결과물이 다 네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 후 pc방에서 이들은 열을 올려 회의를 진행했다. 윤슬이 능력을 설명하고, 청하가 응용 사례를 만들고, 나래가 가격을 정리했다. 컴퓨터 화면에는 1인 브랜드 템플릿으로 만든 어딘가 휑한 웹사이트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를 본 나래는 만족한 듯 청하와 윤슬의 손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세상에는 돈은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널렸잖아, 그런 사람들을 노리는 거야."
***
"아무리 머릿속에 화려한 이미지가 있다 해도, 그걸 실제로 표현할 자료가 현실에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쌤들은 하나같이 자료 참고만 하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지도 않아요! 맨날 옆자리 애랑 비교만 하고, 정말 답답해요."
벽에는 색이 바랜 풍경화가 삐뚤게 기대어 있었고 구겨진 스케치북과 엎질러진 연필 깎기들이 미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4평 남짓의 창고는 아무런 세계를 담고 있지 않아 이들이 벌일 행위에 적합한 공간이었다. 나무 받침대가 하나둘 떨어지고 둘 사이의 좁은 간격이 미세하게 틀어지기 전에.
"감 잡았어요! 당신 안에 머물던 예술의 빛이 현실로 피어나길 바라요. 자자, 살짝 따끔합니다."
윤슬은 희망자의 미간을 짚었다. 희망자는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지면서도 서늘했다. 다음 순간 생전 처음 맛보는 상쾌한 기류가 좁은 창고 안을 스치고 지나갔다. 곧이어 무언가 오래된 어떤 감각이 머릿속을 덮치자 황당함을 제치고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영적인 시야가 트이니 눈앞에는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오래된 감정이 깨어나 본인을 마주하고 있었다.
"우와우와 미쳤다, 진짜로 외계인이에요?!"
"당연하죠!"
혼자서 환상을 더 감상할 수 있게 자리를 비켜주곤 손에 담긴 두둑한 지폐뭉치를 옆에 건들거리는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받은 사람은 화려한 손놀림으로 정확한 액수를 세고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 돌려주었다.
"잘 해결하고 왔어?"
"응,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줬어!"
"수고했네. 아, 걔는 다음 희망자랑 얘기하고 있어. 근데 얘기하는 사람 족족 다 울더라? 뭐 평소에 힘든 게 많았나, 암튼 꼴 보기 싫어."
둘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노골적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선생을 지나 학원 밖으로 나섰다. 밖은 하늘빛 바람이 은은하게 싱그러움을 싣고 건물 사이를 활보하고 있었다. 이제야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돼 있었던 것이 경쾌하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슴 부근이 이상하게 울리는, 설렘도 공포도 아닌 익숙하지 않은 떨림이었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그래, 가자."
해가 제자리를 떠나가고 습기 가득한 여름밤공기가 수평선 위로 내려앉았다. 일을 마친 둘은 깜빡거리는 주홍빛 가로등 아래 기대어 콘 아이스크림을 홀짝였다. 아직 이 편안한 침묵이 익숙하지 않은 나래가 머리 위로 흩날리는 나방들을 손으로 휘저으며 물었다.
"그래서... 왜 이 일 하는 거 찬성했어? 어쨌든 너로 돈 벌겠다는데, 나였으면 기분 나빠서 튀었겠다."
윤슬은 과자 밑부분을 삼킨 후 나래를 바라봤다. 가로등 빛에 반사되어 오늘따라 안광이 더 돋보였다.
"재밌는 것 같아! 어딘가에 소속돼서 그 일에 헌신적인 행위 자체가 말이야. 상대가 너희라 더 좋아. 내가 도움이 돼준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이나 기뻐!"
나래는 괜히 퉁명스럽게 내던지고 싶어졌다. 손에 든 아이스크림은 윗부분 그대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언제 바다로 돌아갈 거야? 거긴 가는데 돈도 안 들고, 같이 갈 반려도 있으면서."
"평생 사람으로 살아온 애가 그 넓은 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절대 불가능할걸. 난 그런 거 기대 안 해. 자기가 살아온 모든 걸 버리고 다시 첫걸음부터 시작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통수를 후려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스스로 가족이라고 칭했던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그 둘이 각자 삶을 살러 떠난다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넌 그럼 청하한테 평생 맞춰주면서 같이 살 생각 없는 거야?"
"응. 각자 원하는 삶이 있는 거니까, 난 걔가 따라오지 않더라도 바다로 돌아갈 거야."
"뭐? 그래? 그렇구나."
***
"이제야 오다니! 참으로 빨리도 오시는군요, 그래도 와주셔서 감사해요!"
희망자는 떨리는 손으로 윤슬의 어깨를 흔들었다. 애써 가라앉힌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제가 아직 어려서 능력을 아주 크게 쓰면 하루에 한 번밖에 못 쓰거든요. 화가 나셨다면 미안해요."
"아니요? 이렇게 귀엽게 생기신 분한테 화라니요, 가당치도 않은 소릴!"
정신없는 도심의 밤 속 누군가의 깃발과 함성이 대합창단을 이뤘다. 그러다 눈에 띄는 한 무리를 발견했다. 차가운 도로 위에 한없이 작지만 분명한 존재감을 가진 꼬물이들이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위로 다들 주먹에 무기 하나씩을 쥐고 정해진 구호를 외치고 있었지만, 꼬물이들은 자신들만의 무기를 잃고 전의를 상실한 듯 보였다. 나래는 본인보다 장황한 소음을 못 이겨 먼발치에서 귀를 틀어막고 인상을 찌푸렸다. 윤슬은 양쪽 어깨에 놓인 떨림을 감싸 안고 내용을 재차 다시 확인했다.
"그래서... 이 응원봉들을 밝혀주면 되는 건가요?"
"뒤에 모인 이 사람들 전부요! 티무산에서 샀더니 몇 시간 만에 픽-꺼져버리는 거예요. 다들 흥이 식어버리기 전에 얼른 다시 불을 켜야만 해요!"
불이 꺼진 한 곳은 우주 속 블랙홀처럼 그 공간 하나만이 공허하고 모든 마음을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윤슬은 그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도 귀찮으니까 한 번에 다 처리하자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다들 음악과 함성 소리에 정신없어 보였고 말은 오가지 않았지만, 마음이 묘하게 하나로 맞닿고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켰다. 불이 꺼진 이들이 서로를 붙잡고 뿌리로 얽히자, 투명한 푸른빛 실 가닥이 땅 위로 흐르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별빛이 실로 뭉쳐진 것처럼 수천만 가닥의 빛줄기가 사람들을 감싸 안았다. 그 빛줄기들은 각각 행과 열을 맞추어 형형색색의 빛을 만들고, 각자 개성에 맞게 휘날렸다. 본인들에게 다시 생겨난 빛에 사람들은 동시에 고개가 솟아올랐다. 한 명이 환희가 담긴 비명을 지르자 너나 할 것 없이 곳곳에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나래는 희망자 손에 든 돈봉투를 가로채고 잽싸게 윤슬과 함께 그 현장을 빠져나왔다. 윤슬은 사람들을 향해 한껏 웃어 보이다 점점 멀어지는 환희에 살짝 아쉬워 물었다.
"넌 저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아? 사람은 모일수록 즐겁잖아!"
순수한 물음에 최대한 솔직해져 보기로 했다.
"뭐, 사람들끼리 뭉쳐서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다는 건 대단하다고 생각해. 근데 꼭 그 공동체에 어울릴 필요는 없어. 소신껏 살자.“
"그렇구나! 아이스크림 먹을래?"
"... 그래."
익숙한 얼굴인 편의점 직원과 작은 인사를 나눈 뒤 어제와 똑같은 장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나래는 옆을 흘깃 쳐다보았다. 별안간 네가 속한 외계인 집단은 왜 군집생활을 하지 않느냐 묻고 싶어졌다. 윤슬은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입에 갖다 대려다 순간 손을 멈추고 이내 말했다.
"우리 종족은 각자의 자유를 중요시해. 서로 속박하지 않지만 방임하지도 않아. 가는 길에 만나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더 나은 존재로 이끄는 것이 우리들의 긍지야."
어느 순간 이들의 앞에 불 꺼진 상가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1층 카페는 손님들이 다 떠나가고 직원으로 보이는 한 명만이 어제와 같은 자리에서 울고 있었다. 청하는 맞은편에 앉아 혼자 일방적으로 말을 걸고 음료를 홀짝이기를 반복했다. 윤슬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입에 퍼지는 유럽을 베어 물었다.
"사람은 툭하면 울고, 쓰러지고, 화가 날 정도로 나약해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어. 아마 이상적인 존재가 ‘완전함’을 꿈꾼다면, 현실적인 존재는 ‘안전함’을 꿈꾸는 걸지도 몰라.“
"응, 응."
"꿈의 결이 다른 이들은 서로 결핍을 채우고 난 뒤엔 결국 각자의 길로 흩어질 수밖에 없어."
"그럼, 저 애가 혼자 자립할 때까지 옆에 있다가. 나중엔 다 헤어지게?"
윤슬은 바삭바삭 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시선은 계속 한 곳만을 바라봤다.
"벌써부터 차였네, 불쌍한 자식."
"난 한눈에 봐도 알아. 나와는 정반대로 살아와서 절대로 서로한테 맞춰줄 수 없을 거야."
건물 속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곧이어 청하가 나오고 우는 희망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윤슬이 청하를 향해 똑같이 손을 흔들었다. 나래가 떠나가는 희망자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뭐라 말했길래 만나는 사람 족족 저렇게 질질 짜냐?"
청하가 어설프게 아이스크림을 받으며 어깨너머로 시선을 흘렸다. 방금 있었던 일은 크게 기억에 남을 만한 순간도 아니었다.
"그냥... 무작정 공감해 줬지."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뭐라 했냐고?"
"댁이 잘못한 거 하나 없고, 그 사람들이 이상한 거다 뭐 이런 얘기들."
"의외로 적재적소가 있네?"
"잘하는 것 같아?"
"당연하지. 사람들이 리뷰에서 네 얘기밖에 안 해. 그리고 너 방금 3시간이나 시달리고 왔어."
***
"진짜로 사람 고문하는 일은 안 받아?"
"죄송합니다. 해당 행위는 뒷수습이 어려워서요."
"아아, 안 되면 말아. 나 참, 진작 말할 것이지 괜히 기대했네."
상담도 받지 않고 급하게 현장으로 부른 이유가 이것 때문이냐, 나래는 한껏 짜증을 냈다. 본인보다 썩어빠진 또래는 오랜만에 본다며 나머지 둘에게 이만 돌아가자고 했다. 청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윤슬은 희망자를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무대 세트장 쪽으로 관객이 몰리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입구로 나가는 사람은 이들 셋만이었다.
"아직 말 안 끝났는데?"
희망자의 한마디에 셋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조명 좀 손봐줘."
방금까지 고문을 말하던 녀석이 지금은 조명만 손봐달라니, 급격히 평범해진 요구에 셋은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희망자는 점점 더 인원수가 많아지는 관객을 피해 부랴부랴 무대 아래 공간에 이들을 꾸겨 넣었다. 희망자는 협소한 공간 아래서 궁상맞게 앉은 이들을 보며 말했다.
"무례하게 군 건 미안한데 난 도움이 필요해요. 노래 하이라이트 부분이 되면, 무대 조명 전부를 내가 있는 쪽으로 몰아줘요."
희망자의 어깨를 밀치며 무대 밑에서 빠져나온 윤슬의 손에 지폐뭉치가 쥐어졌다.
"당신만 돋보인다니, 다른 사람들이 불쌍하잖아요."
"걔들은 다 인맥빨이에요. 진짜 실력으로 들어온 게 아니란 말이에요, 값은 두 배로 낼 테니 요구한 거나 제대로 들어줘요. 먹고 튀면 진짜 안 돼요, 그거 내 전재산이란 말이에요."
셋은 맨 앞줄로 몸을 욱여넣었다. 짧은 몇 초간 오만가지 감정이 담긴 욕설과 신체를 맞대는 소리가 간신히 붙잡고 있던 정신 줄을 끊어놓고 코끝을 자극하는 담배 연기와 향수 냄새가 이대로 돈을 들고 튈까라는 생각을 덧붙이게 했다. 순간 자욱한 안개가 무대에 내리 앉았다. 조명이 공간을 파고들고, 말없이 연주가 시작됐다. 곧이어 사람들의 함성이 누군가를 가리켰다. 센터 쪽 음악에 심취한 꼬물이가 어색하게 음을 맞추며 화려하게 손을 휘젓고 있었다. 기색에 비해 소박한 퍼포먼스였지만, 그럼에도 이 무대가 듣는 이의 귀를 완벽하게 정화하는 이유는 무대 뒤쪽에서 화음을 얹으며 드럼을 빈틈없이 내려치는 희망자 때문이었다. 셋은 알 수 없는 자부심에 사로잡혀 희망차게 희망자의 이름을 외쳤다. 그 소리에 희망자는 셋이 있는 곳을 향해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나래와 청하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윤슬은 이다음 희망자의 순간이 올 거라는 걸 단숨에 알아챘다. 그의 그림자는 흐릿하고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분명히 진심이 흐르고 있었다. 모든 소음이 정적을 맞이하고 선두로 나서는 이가 주인공이 되는 순간, 희망자는 손을 번쩍 들어 올려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리고 힘차게 내려쳤다. 극장 안에 모든 관심이 단 한 사람에게로 쏠렸다. 한 음 한 음이 쌓일수록 그에게 다가오는 빛이 점점 늘어났다. 분위기에 휩쓸려 내뱉는 함성은 잦아들고 모두가 진심으로 그를 향해 외칠 때, 파란 불빛이 모든 조명을 그에게로 이끌었다. 자기편이 활약하는 모습은 그 어떤 때보다 짜릿한 일이었다. 그 최상의 상태에서 모든 공연이 끝난 후 희망자의 표정은 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희망자는 한껏 들뜬상태로 셋을 테이블에 앉힌 뒤 비싼 안주를 마구 시켜줬다.
"진짜 뒤지게 고마워요! 그게 내 마지막 공연이었거든요. 앞으로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일 거예요."
홀린 듯이 고기 안주를 뜯는 둘을 뒤로하고 청하가 물었다.
"밴드는 이제 그만두시는 거예요?"
"네, 이제 슬슬 취업해야 해서요. 이런 성격에 잘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어릴 때 한 번이라도 좋은 추억이 있으면, 그 기억으로 버티면서 살아가곤 하잖아요."
그 말에 청하는 윤슬을 바라봤다. 세상 저렇게 만족스럽고 행복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희망자는 윤슬을 빤히 바라보다 시선을 유지한 채 물었다.
"저 애랑 얘기 좀 나누고 싶은데, 잠깐 둘이 있어도 될까요?"
"당연히 안 되지, 우리 애를 왜 데려가?"
나래가 윤슬을 꽉 껴안으며 희망자를 노려봤다.
"궁금한 거 몇 개만 좀 물어보려고 그래. 너희들 시야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을 거야."
청하는 의심의 눈초리에 조심히 손을 갖다 댔다. 곧이어 윤슬을 감싸고 있던 팔에 힘이 스르륵 풀렸다. 윤슬은 문제 같은 거 없을 거라며 둘의 머리를 쓰다듬고 희망자를 따라나섰다. 멀지 않은 곳에서 윤슬을 세워 곧바로 질문하는 모습에 나래는 귀를 허공에 갖다 댔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애매한 거리라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알 수 없었다. 희망자의 입이 윤슬의 머리에 교묘하게 가려져 어떤 단어가 나오는지 유추해 볼 수도 없었다. 정신 사나운 의심을 넣어두고 눈앞의 사람과 대화나 나눠보기로 했다. 어색함이 차오르기 전에 청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 일을 하기 전에는 뭘 하려고 했어?"
"뭔가 기분 째진다, 이런 애들 장난 같은 짓도 일이라 쳐준다니. 동아리에서 영화 시나리오를 썼어."
"그렇구나, 의외네..."
나래는 아무 표정 없이 음료를 들이켰다. 그리고 이내 자세를 편하게 바꿨다.
"왜 그만둔 거야?"
"그냥 뭐, 딱 시작하려던 즈음에 청소년 영화제 예산이 삭감됐길래."
"뭔가 아쉽네."
"아쉽긴, 난 차라리 후련해. 예산 다 사라지고 난 후에 우리끼리라도 계속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는데. 그냥... 돈도 안 되고 사람들한테 정이 너무 떨어져서 그대로 나왔어."
"그렇구나. 저기 아이스크림 있던데 먹을래?"
"단 거 안 좋아해."
얼마 지나지 않아 윤슬이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이들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나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참았으면 해결될 일들을, 일순 감정에 휩싸여 다가오는 기회를 놓치고 있던 것은 아닐까. 만약 학교를 계속 나갔더라면 어땠을까. 어떤 어른들은 이런 애를 보면서 좋은 나날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그런 나날들을 하나씩 사라지게 하고 있다. 무심하게 넘겨짚었던 사소한 문제들이 쌓이고 쌓여, 소중한 기회들을 허무하게 흘러 보낸다. 종종 이런 말을 듣곤 한다. '네가 고생이 많은 건 알지만 이해해야지. 너도 이제 어른인데.' 이 말은 격려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조급한 부추김이다. 아직 충분히 배우지 않았고 책임을 감당할 힘도 없는 사람에게 어른의 태도를 강요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준비되지 않은 인격은 억지로 어른을 흉내 내느라 정신력을 빠르게 소진하고, 바닥난 상태에서 결국 일탈로 밀려나게 된다. 성급한 어른 만들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고함은 두려움 속에서 억지로 철이 든 척을 하게 만들고, 폭력은 몸과 마음의 상처를 방패 삼아 어른 흉내를 내도록 한다. 방치는 돌봄 없는 상황에서 소년을 스스로 책임지게 만들고, 경쟁과 성적 중심의 제도는 성숙을 강요하며 가짜 성숙을 주입한다. 또한 잘못된 사상을 주입하는 어른의 조급함은 소년의 사고를 왜곡시켜, 올바른 성숙을 더욱 멀어지게 만든다. 두려움으로 강요된 성숙, 상처로 강요된 성숙, 돌봄 결핍으로 강요된 성숙, 제도와 경쟁으로 강요된 성숙. 이런 성급한 어른 만들기는 소년의 성장 과정을 단축시키는 압박과 다르지 않다. 건강하게 성숙할 기회를 빼앗기고, 그렇게 길러진 어른은 진짜 무게를 감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겉만 번지르르한 가짜 성숙에 끌린 조급하고 뒤틀린 모습으로 남는다. 결국 성급한 어른 만들기는 조급한 성숙을 주입하는 행위다. 그러나 성숙은 강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간과 경험을 통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며, 성급한 강요는 끝내 상처 입은 소년의 얼굴을 한 어른을 남길 뿐이고 결과적으로 사회에 불안정한 어른을 재생산한다. 결국 많은 사람들을 좋은 나날들을 맞이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리고, 희망 없는 상황은 대물림된다.
"희망자랑 무슨 얘기했어?"
"다음 일거리! 이번엔 두둑하게 챙길 수 있을 거야!"
"하하,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거야."
순간 저 둘을 보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희망찬 감정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끝없이 뻗쳐 있는 이질적인 공허함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이 드리우면 그건 그거대로 이야기를 이어나갈 의지가 생기게 된다. 희망은 상처를 끝까지 지워내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 공허와 맞서게 만드는 시작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