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운 자리
유리창 사이로 흘러나온 빛이 투명한 거울을 드리웠다. 백색광이 무거운 대기로 도달해 잿빛으로 산란하면 마음의 창이 공허를 비추었다. 누군가 각을 잰 것처럼 모든 가구와 소품들이 제자리에 딱 맞아떨어진 이런 장식은 병상에 누워있는 이의 입맛에 따라, 마음이 궁핍한 상황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꾸민 공간일 것이다. 그 공간에 힘이라도 보태듯 한쪽 벽면을 완전히 가릴 크기의 커튼 앞에 깔끔하게 정돈된 침대가 있었다. 잿빛을 실은 공허가 침대 가장자리를 드리우자, 온몸에 붕대를 감은 사람이 나타났다. 그 모습에 당황할 새 없이 갑작스레 뒤에서 젊은 청년의 음성이 들려왔다. 또렷하게 넘어오는 숨이 이쪽을 보라는 듯 공기 중 가시를 드러냈지만 신경 쓸 차례가 아니라는 듯 묵묵히 시선을 유지했다. 돌아보지 않은 채로 바라본 희망자의 눈빛이 짧게 요동쳤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를 끌고 와 침대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은 눈이 깜빡거리며 이쪽을 향했다. 무기력하고, 텅 빈 눈동자에 푸른 실타래가 자리 잡았다.
"뭐 하려는 거예요?"
"대화요. 이제 할 수 있어요."
"제가 제대로 설명을 못 드렸나 본데..."
"보호자님이 좋아하는 노래가 이거 맞죠?"
놀란 보호자의 음성이 발걸음을 빨리했다. 질문이 쏟아지기 전에 그 조급함을 가로챘다.
"그리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때 내는 웃음소리는 이렇죠."
의자 바퀴를 타고 자리를 스르륵 벗어나 매끄러운 바닥을 딛고 침대 주위를 이리저리 굴렀다. 처음 봤을 땐 무지 섬뜩하고 외로운 공간이었지만, 사람을 묘하게 안정시키는 곳이었다. 이 섬뜩하고 다정한 공간 자체가 희망자의 마음속과 닮아 있었다.
"어떻게 하셨어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낸 소리를 들은 거예요. 작지만 예쁜 소리가 났어요. 그리고 평소에 말 좀 그만 걸어, 반응하기 진짜 귀찮으니까.라고 전해 달라고 하네요, 하하!"
"..."
병실 밖은 저마다의 이유로 복도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누군가가 깨어나서, 누군가가 깨어나기를 기다려서. 청하는 기다리는 쪽이었다. 똑같은 풍경에 질려 눈을 돌렸더니 곧바로 벽에 걸린 그림이 들어왔다. 하나하나 의미들이 응축되어 완성된 그림은 보는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다음 순간 윤슬이 병실 문을 박차고 달려 나왔다. 복도를 활보하던 발걸음 소리가 멈추고 하나같이 그곳을 바라봤다. 이내 모든 시선을 사로잡은 윤슬이 외쳤다.
"저 사람 이상해! 밑도 끝도 없이 막 우는데 소리도 참 독특해! 보통 사람은 흑... 흑 이렇게 우는데, 저 사람은 으헹헹힝 이렇게 울어!"
그 모습에 청하는 입술 가장자리를 깨물며 터지는 웃음을 참았다. 지나가는 사람들 뒤로 어린애 같은 왜소한 체구를 가진 희망자가 보였다. 꺼흑 소리를 내는 보호자를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청하는 윤슬을 타이르곤 병실 문을 조금씩 밀며 말했다.
"나랑 다시 얘기해 보자."
숨 크게 들이쉬고 내쉬고. 손바닥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진정시키는 신호가 닿으면 첫 단계가 끝난 것이었다. 평소 호기심에 가까이 한 책이 하등 쓸모없다고 생각한 것 치고는 꽤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실존에서 이론이 먹히면 긴장감과 동시에 불안이 사라지고, 차근차근 다음 단계로 나아갈 발판이 생길 뿐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미숙하고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청하는 중요한 부분에서 말을 더듬기도 하고 가끔 떨리는 손을 등 뒤로 숨기곤 했다. 희망자는 그 모습을 보다 보호자의 손에 천천히 무언갈 적었다. 보호자는 표정이 살 굳더니 이내 안절부절 눈알을 도록 굴렸다. 윤슬이 답답하다는 듯 보호자의 손을 확, 틀어잡고 자신과 시선을 맞췄다.
"무슨 의미던가요?"
"아... 왜 멍청하게 구냐고 하네요."
"이 사람이! 어리니까 멍청하지!"
"죄송해요, 흑으... 으헹헹."
"왜 저래."
쌓아 온 단계를 무너뜨리는 건 정말 별것 아닌 감정이었다. 윤슬은 청하가 쩔쩔매는 불편한 상황을 어떤 방식이든 빨리 끝내고 싶었다.
"희망 내용이 뭐 이래?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천체의 자리를 바꾸려면 신이 돼야 한다니까!"
윤슬이 자양강장제를 입에 문 채로 숨을 삼킬 새도 없이 외쳤다. 툭, 소리와 함께 누군가 정교하게 쌓아둔 빈 병들이 무너졌다. 짧고 느리지만 명확하게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런 청하의 노력이 갸륵해서라도 윤슬은 다시 얌전히 앉았다. 그 모습에 다른 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곤 차근차근 말을 이어갔다.
"예전에 본 책에서 용을 모시는 신녀가 별의 신령을 부르는 의식을 했다는 내용이 있었어.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보는 건 어떨까?"
윤슬은 머리를 감싸고 유리병을 으작으작 씹어먹었다. 충격에 다들 놀람을 금치 못하자 윤슬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가에 묻은 조각을 털어냈다. 다시 짧게 숨을 뱉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유성은 별이 아니라 외계인이에요."
순간 시간이 멈춘 듯, 모든 소음이 사람들을 빗겨 나갔다. 모든 행동이 강제로 제 숨을 틀어막고 누군가 본인들을 깨워주길 기다렸다.
"제가 별을 불러 천체를 이동시키는 힘은 없지만, 다시 그 외계인을 불러내어 또다시 유성처럼 보이게 할 순 있어요."
희망자의 바람은 순간이 남아 있을 때 다시 유성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신이 붕대로 칭칭 감긴 소녀가 이런저런 제약이 많은 상황에서, 무언가를 즐긴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의 모성은 지금 전쟁 중인데, 저처럼 도망친 이들을 잡으러 이 행성도 한 번 찾아왔더라고요! 그때는 사람의 육신으로 어찌어찌 기운을 가려서 걸리진 않았는데, 힘을 사용해서 다시 그들을 이쪽으로 부르는 행위는 아주 위험한 일이에요. 그리고 음, 요즘은 핸드폰 하나로 언제든지 별구경을 할 수 있는 시대잖아요."
윤슬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푹 떨궜다. 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자연의 거대함을 담기에 사람의 기술은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분명 실제 모습을 눈에 담는 그 감동은 생애 통틀어 가장 황홀한 기억이 될 것이란 걸 말이다. 청하가 윤슬의 등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혹시 별 영상을 눈앞에 실현시키는 건? 저번 입시생 때는 그렇게 했잖아."
"아니, 함부로 별을 모방할 수는 없어. 이건 내 양심에 걸린 문제야. 너희 사람들이 그 옛날 우상을 세워 신을 모욕하는 짓과 똑같은 행위란 말이야."
역시 안 되는구나. 다들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떨궜다. 무거운 공기의 흐름이 방 전체를 감싸기 전에 또다시 감정이 고조된 소리가 공간을 지배했다.
"하지만 자본 앞에서 뭔들 못 하겠습니까?!"
곧이어 요구한 값의 10배가 늘어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보호자는 무슨 그런 천문학적인 단위로 부를 수 있냐, 천체를 못 부르니까 돈을 불리는 거냐 묻자, 윤슬은 자연스럽게 계속해서 날아오는 요구를 강단 있게 끊어냈다. 희망자는 똘망똘망한 눈매로 흥미진진하게 관전했고, 청하는 안절부절 불안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윤슬은 일행들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상황이 생기면 제일 먼저 발 벗고 나섰다. 거리에서 시비가 걸릴 때도, 직원이 잘못 계산하여 가진 돈을 몽땅 털릴 때도 상대가 어른이고 연약한 아이이고를 떠나 겁내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였다. 막무가내로 보일 수 있는 면이었지만 든든하다는 느낌은 가시지 않았다. 윤슬은 이들의 상황을 듣고 아슬아슬하게 5배로 합의 보는 것을 제안했다. 하늘 아래 떨어진 자비에 희망자는 자동반사적으로 고개를 격하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장소를 공원으로 옮겨야 해서 윤슬이네가 먼저 가 있기로 했다. 꽤 늦은 시간임에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의외로 공원은 밤이 돼서 찾아갔을 때가 더 재밌고 설렜다. 이들은 벤치로 쫄래쫄래 가 앉아서 지나가는 산책하는 강아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붕붕 흔들리는 꼬리에 팔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흔들어 댔지만 이쪽은 신경도 안 쓰는 강아지를 뒤로하고 청하는 윤슬을 향해 물었다.
"있는 거 없는 거 다 뺏어갈 줄 알았는데, 맞춰갈 줄도 알고 착하다."
"그거 욕하는 거 아니지?"
볼을 쿡쿡 찔러댔지만 정정하지 않았다. 윤슬은 피식 웃으며 잡은 볼을 놔주곤 말했다.
"아까부터 생각하던 건데 말이야, 너 왜 사람들이 동반자살 하는 줄 알아?"
순간 청하가 날아온 공을 맞고 억, 소리를 냈다. 사과도 하지 않은 채 공을 요구하는 이들을 윤슬이 똑똑히 바라보며 한 손으로 으깨버리고 벤치 뒤로 던지니 지나가는 개가 물어뜯었다. 순간 주변을 산책하던 어른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윤슬은 그 여운을 만끽하며 경치가 아주 장관이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나에게 할 일이 주어 지면 언제든 그 일에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는데, 길이 안 보이는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으니까, 할 이유가 없으니까 살아 있을 가치를 못 느끼는 거지. 근데 그 상황에서 의지할 사람도 하나도 없어. 우와, 생각하니까 진짜 기분 더럽다."
윤슬이 청하의 머리를 토닥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듣고 보니 사람보다 사람에 대해 깊이 아는 것 같았다. 단순히 힘이 들어서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그 사람의 기분은 누구도 함부로 말하지 못할 것이다.
"아까 그 울보 말인데, 침대 밑에 밧줄 살짝 나와 있는 거 자기 몸으로 가리더라. 그냥 본능적으로 알았어. 얘네는 여기서 더 포기하게 되면 진짜 희망도 뭣도 다 버려야 하는구나. 아, 저기 왔다! 슬슬 시작하자."
휠체어를 탄 희망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도통 헷갈렸다. 윤슬은 청하의 손을 잡고 희망자를 바라봤다. 거창한 기대도 미련한 불안도 남기지 않은 채, 희망자는 그저 준비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가 닿자 무수한 에너지를 하늘에 쏘아 올렸다. 파밧-! 이제 유성이 떨어질 차례다. 아니, 본인들을 잡으러 올 외계인들을 부를 차례다. 다음 순간 어둠을 가르며 또 다른 푸른빛이 떨어졌다. 윤슬이 쏘아 올린 빛과는 전혀 다른 결이었다. 모든 걸 집어삼켜버릴 듯한 푸른 불덩이가 짙은 구름을 뚫고 하늘을 향해 내리 꽂혔다. 다들 숨도 못 쉬고 그 광경을 바라보니, 찢어진 하늘 틈 사이로 불덩이가 세상의 불을 켜듯 푸르게 물들였다. 곧이어 모두가 고개를 내리지 못하고 찬사를 퍼부었다. 짧은 아쉬움과 진하게 남는 푸른빛 여운. 빛은 소리도 숨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삼켰다. 한차례 지나간 뒤, 아이들은 엄청난 경험에 설레어 날뛰었고, 어른들은 이 광경을 사진으로 찍지 못한 것에 한탄했다. 윤슬은 느닷없이 청하의 뒤로 숨었다. 청하는 당황할 틈도 없이 자신을 감싼 손에 미묘한 떨림이 묻어 있어 차마 윤슬을 떼어놓지는 못했다. 희망자는 고개를 내리지 못했다. 지금까지 버텨온 순간들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한순간이 증명해 주었다. 그 정도로 아름답고, 다시는 겪지 못할 두 번째 기억이었다. 순간, 누군가의 알림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처음엔 대중적이고 단순한 선율이 점점 뇌리에 꽂혔다. 단순한 알림이 아니라 경쾌하고 신나는 리듬이 통제를 벗어나 점점 속도를 올렸다. 그에 따라 박동이 재촉하듯 속도를 끌어올리고, 템포가 가속페달을 밟은 듯 치솟았다. 사람들은 익숙하지만 생소한 흐름에 점점 감정이 고조되어 이다음 큰 것이 올 거라는 확신에 입꼬리를 점점 치켜들었다. 그 확신을 저버리지 않듯 감정선이 폭발하는 노래가 치솟았다. 황홀함이 순간 온몸을 지배하니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허상이 너무나 일찍 끝나버리고 난 이후 보호자는 자신의 책임인 휠체어 쪽을 바라봤다. '고맙다 멍청아.'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희망이 이쪽을 향해 웃고 있었다.
***
"너무 많이 산 거 아니야? 그리고 윤슬 이놈아 네 발로 좀 걸으라고!"
윤슬은 나래 등에 업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희망자를 만나고 나서는 항상 졸음에 못 이겨 공원 벤치나 비상계단에서 잠을 자다 끝내 업히곤 했다.
"내가 업을까?"
"아니, 얜 나만 들 수 있어."
이상한 데에서 자존심을 부리네,라고 생각하며 나래를 바라봤다. 나래는 평소와 다르게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질끈 묶고 앞머리를 넘긴 채로 모자를 푹 눌러썼다. 새로 구한 알바에서 요구하는 건 청결과 위생, 미소로 가득한 친절이었다. 나래가 지닌 이미지와 전혀 반대였지만 그럼에도 꾹 참고 있는 이유는 새로 생긴 책임감 때문이었다. 하고 싶은 건 다 하면서 마음 가는 데로 살 것 같아도 항상 투덜거리면서 요구하는 걸 듣고, 금방 화내는가 싶다가도 다시 장난스럽게 구는 그의 성격이 신기하고 좋았다. 그런 생각을 매번 다시 떠올리는 청하는 두 손 두 발 봉지에 구속돼 발끝 하나 들기조차 버거웠다. 이래서 장 볼 때 다들 리스트를 적는 건가 싶었다. 순간 나래가 반가운 소리로 앞쪽을 가리켰다.
"어? 저기 네 언니 있다."
순간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들었다. 언니는 머리채를 휘어 잡힌 채 바닥 위를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