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운의 잔해
이 앞에서 본인이란 존재는 너무나도 작고 한순간이다. 걸어가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얻은 모든 불만과 정의가 집어삼켜진다. 종국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이 앞에서 본인이 준비한 모든 것이 부질없이 사라지게 된다. 눈앞에 상대와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고 있지만 결코 본인이 중심은 아니다. 이 앞에는 본인의 삶의 몇 배인 어른이라는 존재가 스며들어 있다. 본인이 생각한 것보다 위대하고, 가까이 있고, 언제나 볼 수 있지만 언제나 볼 수 없는 어른은 마치 눈앞에 펼쳐진 장황한 산과 같다. 세월이 쌓인 산의 크기는 눈에 다 담을 수 없고, 마음으로 다 헤아릴 수 없다. 산은 항상 그 자리에 있고, 본인은 부랑자로서 그 산 한가운데를 방황한다. 사람들은 지나간 발자취들을 따라 산이 될 준비를 한다. 위험천만한 산길을 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다시 태초부터 가야 할 길을 올려다보는 대신 옆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바다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아울러 바다 위 반짝이는 윤슬이 이쪽을 유혹하면 본인도 모르는 새에 모든 걸 포기하고 결코 닿을 수 없는 윤슬을 향해 달려간다. 그간 있었던 모든 의미 없는 노력들이 바닷물에 씻겨 내려간다. 상쾌함이 지나치다. 소리를 지르고 싶다. 생전 안 해보던 말도 지껄이고 싶다. '커도 너무 커서 눈에 다 담기지도 않는 산을 죽어라 오르다 옆을 보면, 산보다 더 커다란 바다가 있어. 윤슬도 거기 있고. 난 끝까지 정상으로 가려했는데, 소담한 윤슬이 용맹한 발걸음을 멈춰 세운 거야, 그런 거야. 내 탓이 아니야.'
***
유리문이 끼익 열리는 소리가 등 뒤로 메아리치고, 동시에 차가운 바람이 경찰서 안에서 거칠게 활보했다. 뒤이어 또각또각-구두굽으로 바닥을 찍는 소리가 귀를 짓누르듯 다가오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는 형광등 불빛 아래 그림자를 우직하게 세우고 말 한마디 없이 공간 전체의 분위기를 정적으로 메꿨다. 그때 옆에서 차를 타던 경찰 한 사람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쪽에 앉으세요."
경찰이 의자를 가리켰다. 그는 의자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이쪽을 향하는 시선을 쉬이 떼지 않았다. 바닥을 울리는 구두굽 소리가 점차 멀어 갈 때쯤이 돼서야 섬뜩한 눈빛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철제 의자가 스치면서 나는 금속성 소리가 방 안에 정적을 놓자, 동시에 모두가 긴장의 끈을 붙잡았다. 다음 순간 그가 허리를 곧게 세우고 자세를 고정함과 동시에 입가에 진한 차향이 스쳐 지나갔다. 경찰은 긴장된 공기를 가르고 조심스레 잔을 내밀며 말했다.
"신원 보증인으로 오신 분 맞습니까?"
질문이 떨어지자, 그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단정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경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서류철을 꺼내 책상 위로 펼쳤다. 도장을 찍는 소리와 함께 공기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옆에서 숨을 몰아쉬던 청하는 눈치를 살폈다. 순간 보호자라고 불리는 그의 음성이 날카로움을 싣고 청하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허리 펴고 똑바로 앉아라."
그 한마디에 눈이 번쩍 떠짐과 동시에 오랜 시간 앉느라 뻣뻣해진 상체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경찰은 이름, 주소, 연락처 등 몇 가지 절차적인 질문을 이어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찻잔 곁에 단정히 두른 손끝만 단단하게 고정할 뿐, 시선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차가운 침묵은 청하를 꾸짖겠다는 말도, 지켜주겠다는 말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저 그런 행동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경찰은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피해자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직 알아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쪽은 봤죠? 같은 곳에 있었을 거 아닙니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본인을 정조준한 말투에 머리가 새하얘지고 입술이 쉬이 떼어지지 않았다. 순간 그가 찻잔을 고요히 밀어내며 경찰을 향해 말했다.
"압박하듯 묻는다고 기억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 말은 얼핏 청하를 감싸는 것 같았지만 한심하다는 눈빛이 가득했다. 이 사람 주변에만 있으면 본인은 한없이 초라한 사람으로 벗겨져 있었다.
"... 힘들겠지만 그날 그 애가 어떤 상태였는지 떠올릴 수 있습니까?"
***
한바탕 축제 분위기였지만 어느새 텅텅 빈 부스엔 직원들끼리 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돌아오는 눈길이 없자 절로 발길을 끊었고, 그렇게 해까지 저물 때쯤 인기척들이 다 빠져나가서야 겨우 윤슬과 청하를 찾을 수 있었다.
"야, 너네. 나만 쏙 빼두고 가냐."
청하와 윤슬은 허공에 물을 튕기며 불만을 가득 실은 목소리로 신경질을 부렸다.
"나래 네가 경품 받는다고 몇 시간 동안 투호만 했잖아."
"그래! 지루해서 돌아가실 뻔했어!"
나래는 얕게 한숨을 쉬며 눈동자를 위로 한 바퀴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번 희망자 완전 잘못 걸렸어. 화 좀 냈다고 리뷰 개같이 뿌려놓은 것 봐! 이제 아무한테도 연락이 안 와."
그 말에 청하는 들고 있던 조개를 우수수 떨어트리고 고개마저 떨궜다. 윤슬은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듯 말없이 허공만 응시했다. 순간 청하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지켜주세요.'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 웹사이트를 만들고 관리하는 사람은 나래였고, 연락망은 청하였기에 청하는 희망자한테 무슨 일인지 말해달라고 했다. 몇 분 동안 화면 속에 1은 사라지지 않은 채 묵묵부답이었다. 나래가 흥분한 표정으로 청하의 어깨를 탁탁 치며 말했다.
"야 빨리 전화 걸어, 이거는 가야 해!"
"조금 위험해 보이는데."
"이거 전 재산 주는 희망이잖아! 빨리 걸으라니까!"
그 말에 청하는 눈을 반쯤 뜨고 고개를 돌리며 희망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희망자님?"
수화기 너머에는 아무 음성도 들려오지 않았다.
"장난으로 넣으신 거면 그냥 끊겠습니다."
순간 장난감 총 같은 둔탁함과 희미하게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괜찮으신-"
"여, 여기 아치교 3층인데 빨리 좀 와주세요."
"경찰 부를까요?"
"아니, 부모한테 죽으려고 당신한테 전화한 게 아니에요."
나래가 황급히 휴대폰을 뺏어 전화를 끊었다.
"아치교? 이 사람이 장난하나, 거기가 말이 게임방이지, 완전 짐승 소굴이잖아. 마시고, 약하고, 토하고.“
"어쩌지, 왜 이런 곳을 갔을까?"
"딱 봐도 각 나오잖아, 삐뚤어진 도련님 같은 거겠지. 돈 많고 시간 많고 호기심에 갔다가 한방에 나락 가는 곳이니까."
순간 윤슬이 나래 등에 매달려 해맑게 말했다.
"가자!"
"뭐? 이 딴 데 들어가서 무슨 개짓거릴 당할 줄 알고?"
"전 재산을 준다잖아, 그 돈 받으면 이제 너희 고생 안 해도 돼!"
그 말을 들은 나래와 청하는 짜기라도 한 듯 윤슬을 붙잡아 파도 속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발길질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사정없이 물을 튀겨댔다.
"윤슬아, 지금 희망자는 제정신 아닌 사람들과 같이 있어. 만약 인과력 때문에 네 능력이 안 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결코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땐 건물을 무너트릴 거야!"
"아이고 윤슬아. 그 건물 수리하는 값은 어떡해."
"희망자한테 갚으라 해, 부자라며!"
"그 정도로 돈이 많은 사람일지는 아직 모르-"
뒷목의 급소가 맞아 들어오는 순간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 긴장이 풀린 다리 쪽부터 천천히 쓰러졌다. 점점 멀어지는 심장 고동소리를 마지막으로 둘의 시야가 꺼졌다.
"말이 많다, 좀 자라.“
***
"그 애는 모든 상황에서 침착했고, 하는 일에 대부분은 우리를 위하는 것이었어요."
"맞은 이후에 기억은 아예 없는 겁니까?"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바닥에 흥건히 떨어진 바닷물이 현장의 증거를 나타내는 것 같았고, 목 부근에 난 작은 상처가 그 장면을 뒷받침하는 듯 보였다. 순간 뒤에서 수갑이 의자 쇠 받침대에 찰랑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사소한 소음이 거칠게 방안을 긁어대자, 모든 시선이 윤슬에게 쏠렸다.
"저 친구 딱 봐도 일진 뭐 그런 거죠. 머리색 한번 특이하네, 눈도 그렇고."
"그런 말 마세요, 저 생김새는 타고난 거란 말이에요. 저 애는 지금 당장 자력으로 이곳을 나갈 수 있는데 제가 곤란해질까 봐 남아있는 거예요. 여기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니에요, 원래 집도 이곳이 아니었다고요."
"집이 어딘데?"
"엄청 멀어요. 바다에 있어요."
"항구도시 사는가 보네."
중간부터 서류를 넘기며 일체 시선을 이쪽으로 옮기지 않는 반응에 절로 힘이 빠졌다. 고개만 돌려 윤슬을 바라봤다. 그림자 진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는 얼굴 아래 공손하게 모인 손목에는 수갑이 미세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앉은 자세가 일절 흐트러짐 없이 반듯해서 그 모습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꽤 오랫동안 바라보았음에도 이쪽을 한번 쳐다보지 않자 다시 앞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가 말을 꺼냈다. 냉정하고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아직은 귀가 조치가 어렵습니다. 추가 확인이 필요합니다."
"증거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아이를 계속 잡아 두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애도 피해자입니다. 저 아이도 최소한의 조사를 마쳤다면 시설에 인계하거나 돌려보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고개를 번쩍 들어 그를 올려 보았다. 지금 돌아가면 윤슬은 더 이상 이곳에 있어 줄 이유가 없다. 본인을 막는 사람을 죽여서라도 이곳을 나갈 것이 눈에 훤했다.
"엄마, 저 애를 도와줘야 해요, 이대로 가면 쟤도 따라 나올 거고 모두가 곤란해질 거예요."
"수갑을 차고 있잖아."
거친 발걸음에 이끌려 미련도 후회도 다 남긴 채 그를 따라나섰다. 순간 일정하지 않은 발걸음이 골목길로 방향을 틀었다. 어찌나 빠른지, 장소가 어두워졌다는 걸 한 발 뒤늦게 알아챘다. 순간 그가 뒤를 돌아봤다. 무심하던 그 눈빛에 청하가 담겨있지 않았다. 그 시선을 넘어 청하도 뒤를 바라보자 윤슬이 우뚝하니 서 있었다. 그가 화를 내듯 물었다.
"얘야, 어떻게 나왔니?"
대답을 준비하는 듯한 정적에, 수갑이 부딪히는 소음이 올라탔다. 윤슬은 보란 듯이 으깨진 수갑을 들어 보였다.
"힘으로 풀었어."
그는 황당한 듯 다음 말을 꺼낼 새 없이 윤슬을 쳐다봤다. 윤슬은 청하를 스치고 지나가 성큼성큼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내 반려랑 인사하려고 나왔어."
그는 동공이 흔들리더니 이내 호흡을 가다듬었다.
"청하를 말하는 건가?"
그 말에 잠시 시선을 위아래로 흝은 뒤, 코끝으로 짧게 숨을 내뱉었다. 윤슬은 그를 잠시 올려다보더니 이내 안심하라는 듯 어깨를 툭툭 털며 말했다.
"나한테 데려갈 자격 같은 게 어딨겠어. 저 애는 내 반려이기 전에 네 딸이니까.“
말을 끝으로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아섰다. 걸음걸이마다 발소리 대신 금속성 소음이 점점 커지고 묵직해졌다. 표정은 공허하고, 덤덤했다. 본인을 향하는 청하의 시선에 한껏 웃어 보였다.
"잘 지내."
"유, 윤슬아."
"그동안 재밌었어."
"난 그러니까... "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그는 팔짱을 끼고 이들이 하는 말을 지켜보았다. 쓸데없이 말을 끼얹지도, 거슬리는 행동을 보이지도, 존재감을 드러내려 애쓰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이들의 마지막 순간이 끝나길 기다렸다. 눈물도 나오지 않는 상황에 여자애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와락, 청하를 끌어안았다. 숨이 막히지도 않고, 그렇다고 탁 트이지도 않는 그런 조여움에서 여자애가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네가 원하면 저 여자를 사라지게 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