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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ee Sep 06. 2024

라벤더와 번개탄

세상은 악하고 나는 약했다

세상은 악하고 나는 약했다


주의) 자살, 자해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악했고 나는 약했다. 나는 너무 나약하기에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삶이란 것을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세상에서 사는 것을 그만두고 싶어졌다. 나 자신을 부정하며 억지로 세상에 자리 잡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의미가 없었다. 타인을 재단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험담하며 하이에나처럼 살아가느니, 그냥 나인채로 죽고 싶었다. 가슴께에 꽉 막힌 이것을 없애고 내가 진정으로 평온한 숨을 내쉬려면, 나는 사는 것을 멈춰야 했다. 살기 위해선 죽어야 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본격적으로 그만 살기로 노력하기 시작했다. 


한 달 치 처방받은 약을 모두 모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래도 죽지 않았다. 힘겹게 속을 게워내고, 힘이 하나도 없는 팔다리로 휘청거리기만 했다. 이상하다. 이래도 살아있다니.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렇게 하던데. 그럼 다른 방법을 써야겠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또 하나의 방법. 손목 긋기. 커터칼로 손목을 그어 봤다. 피가 났다. 계속해서 그었다. 계속해서 피가 났다. 그러다 그냥 그만두었다.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손목을 거의 자르다시피 작살을 낼 수 없었다. 그날의 '그만 살기 프로젝트'는 손목에 희미한 흉터를 남긴 채 미완성으로 남았다.


라벤더와 번개탄


향기가 가져다주는 기억들이 있다. 어떤 향을 맡았을 때, 기억 저 너머에 있던 추억이 같이 풍겨오는 그 순간.그 순간들을 좋아한다. 내게 라벤더 향은, 가장 슬펐던 날에 찾아온 마법과도 같다. 10여 년의 시간 동안 수없이 죽기를 시도하고, 실패하고, 시도하고, 실패하는 과정에서, 나를 적극적으로 지켜주고 살려준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친구 A양이 바로 그중 한 명이다. 우울 삽화가 심해지는 가을에서 겨울, 나는 역시나 힘들다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나는 그때 쿠팡에서 번개탄을 주문한 상태였다. 이번에는 진짜, 진짜로 죽을 거야.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그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안은 채, 택배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택배가 오면 나는 진짜 죽는 거야. 얼른 왔으면. 그 순간 문자가 왔다. 택배가 도착했다고. 서둘러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었는데, 서너 개의 택배가 쌓여 있었다. 그중 첫 번째 상자를 열었는데, 라벤더 향 디퓨져가 들어있었다. A양이 보내준 거였다. 그리고 두 번째 박스는 번개탄이었다. 이번 고비도 잘 넘기기를 바라는 A의 마음이 너무나도 따뜻해서, 라벤더 디퓨저의 향이 너무나도 향긋해서, 꼭 이 순간이 마법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번개탄 위에 올려져 있던 상자가 꽃향기 나는 디퓨져였다는 게  마치 친구의 사랑이 나를 죽음으로부터 지켜 준 마법과도 같이 느껴졌다. 나를 이렇게 사랑해 주고 걱정해 주는 사람이 존재하는데, 내가 죽지 않길 바라는 사람이 존재하는데, 내가 그 소중한 마음을 저버리고 죽어버려도 될까? 도저히 그 큰 사랑을 무시할 수 없었다. A 덕분에 나는 매캐한 연기가 아닌, 향긋한 라벤더 향을 맡으며 잠에 들 수 있었다. 혹시나 이 글을 A가 읽고 있다면, 그저 미안하다고 전하고 싶다. A야, 많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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