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지게
아래채에는 가마솥이 걸린 사랑방과 창고가 있고 그 옆에 문도 달지 않은 헛간이 있었다. 그 헛간에는 변소와 거름더미가 있고 거름더미 옆에는 늙은 개 ‘도꾸’와 지게가 있었다. 아버지는 지게를 지고 나면 언제나 헛간에 넣어두었다. 비를 맞을까 봐 염려해서였지만 실상 지게는 다 낡았다. 해진 어깨끈은 가끔씩 짚으로 땋아서 새로 바꾸기도 했지만 두 다리는 반질반질 손때 묻고 닳아서 본래 길이보다 작달막했다.
처음 아버지가 지게에서 꼼쥐 하나를 꺼내준 건 아마 내 나이 대여섯 살 때였지 싶다. 지게 가득 나무를 지고 온 아버지가 나뭇가지에 달린 알록달록하고 동글한 열매 모양 하나를 나뭇짐 속에서 꺼내주었다.
“자 이것 봐라. 꼼쥐다.”
꼼쥐! 그 생소한 이름과 함께 내 기억 속에서 아버지한테 받은 첫 번째 선물이자 노리개였다. 정말 예쁘고 신기했다. 며칠을 가지고 놀다 보니 그것은 말랑해지면서 색도 바래고 모양도 쪼그라졌다.
그 후로 지게에서 나온 꼼쥐는 철에 따라 달랐다. 아버지는 내가 좋아할 것 같은 귀하고 앙증맞은 것을 숨겨 와서는 꼼쥐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꼼쥐는 풋풋한 다래나 머루, 때론 개암이나 돌감이었고 어떤 땐 방긋방긋 웃고 있는 진달래 한 묶음일 때도 있었다.
아버지의 지게는 나뭇짐이나 꼼쥐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똥장군을 지기도 하고 보릿고개를 넘기도 하며 온갖 곡식이나 과일을 옮기는 아버지의 단짝이었다.
애지랑을 떨며 쫄랑쫄랑 아버지를 따라다니던 나는 지게가 보이지 않도록 짊어진 볏단과 푸른 심줄이 울퉁불퉁한 아버지 장딴지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가 힘들어 보여서 우리 논은 왜 이리 멀리 있느냐고 물어보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다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 나이 열다섯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전염병으로 한꺼번에 돌아가시고 홍수로 인해 집마저 물에 떠내려가니 아버지는 어린 동생 셋을 데리고 천애 고아가 되었다. 같은 마을에 불같은 성격인 작은할아버지가 사셨는데 아버지는 동생들을 데리고 작은집에 얹혀살았다. 작은집에서 스물일곱 살에 엄마와 결혼하고 일 년 정도 더 살다가 분가를 하셨는데 그때는 동네 전답의 절반을 차지하던 할아버지의 토지는 작은할아버지의 노름밑천으로 다 사라지고 묵정밭 몇 뙈기밖에 남지 않았다.
아버지는 산 아래 있는 절 논 두 마지기를 부치면서 처자식을 위해 어깨가 다 허물어지도록 지게를 지고 다녔다. 지게를 지는 일, 그것밖에 그때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아버지는 ‘국민학교’까지 다닐 수 있었지만, 그 학력이 지게를 벗어나게 해주지는 못했다. 다만 올바르고 꿋꿋하게 사는 데 힘이 되고 자식들을 교육하고자 하는 욕망의 끈이 될 수는 있었다. 조금씩 전답이 늘어나는 만큼 아버지의 어깨는 더 굳어지고 장딴지의 심줄은 더 굵어졌다. 아버지의 지게도 몇 번이나 바뀌면서 지게 위의 짐들도 바뀌었다.
아버지는 예순을 눈앞에 둔 어느 날 두 다리가 몹시 아파 병원에 갔다. 척추 이상으로 고관절이 모두 삭았다는 의사의 말과 함께 아버지의 두 다리는 힘없이 내려앉았다. 일 년여에 걸쳐 양쪽 다리에 인조 뼈를 심는 수술을 하고 힘겹게 투병하실 때도 나는 그 절절한 아픔을 헤아리지 못한 철부지 딸이었다.
아버지는 몸이 아파도 아버지고, 아버지는 힘들어도 아버지고, 아버지는 외로워도 그냥 아버지인 줄 알았다. 아니, 나는 그렇게 느꼈다. 언제나 든든한 나의 버팀목인 줄 알았다.
“아버지, 의사가 척추 세 개가 아주 오래전에 다쳐서 망가졌다는데 언제 다쳤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앓아누운 아버지를 본 기억이 없어 물어보니 한참이나 대답이 없다가 무거운 입을 떼셨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삼촌 집에서 사는데 동생들도 있고 숙모 눈치가 보여서 겨울에는 깊은 산에 들어가 숯가마에서 일했다. 숯 나무를 해서 지게에 지고 오다가 넘어져서 다쳤다. 너무 아파서 산에서 엉금엉금 기어 내려왔는데 삼촌이 알면 혼날까 봐 동네 머슴살이하는 친구 머슴방에서 한 달을 꼼짝 못 하고 누워서 똥물을 먹고 나았다.”
초점 흐린 아버지의 눈동자가 허공을 맴돌았다. 아버지의 눈을 쫓던 내 눈에서도 아픔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수술 후 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하고 아버지의 등에는 낡은 지게가 또다시 붙어 있었다. 자식들이야 건성건성 쉬어가며 하시라든가 그만하라고 하지만 그 말이 아버지 등에서 지게를 떼어주지는 못했다.
늙은 아내와 인생이란 짐을 지고 자식이란 희망을 가슴에 담아 무거워진 다리를 끌며 휘적휘적 걸어가던 어느 날 그놈의 허리가 또 한 번 아파졌다. 병원을 집처럼 드나들었지만 좀처럼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피안의 세계로 갈 때가 되었던지 더는 집으로 가지 못하고 병원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해 내 생일날, 미역국 한 그릇 끓여놓고 병원에 누워계신 아버지께 전화했다.
전화기 너머 엄마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 서울 있는 큰 애, 전화받아 봐요.’
“아버지!”
“누고?”
“아버지 큰딸이지, 오늘 내 생일이라서, 아버지 나 낳아주시고 잘 길러주셔서 고맙다고 전화했지.”
“그래 오늘 니 생일이제, 생일 축하한다.”
아버지 목소리는 힘이 없었지만 한 음절 한 음절 또박또박 말씀하셨다.
“아버지, 빨리 나아야지. 억지로라도 드시고. 아버지, 사랑해! 억수로 많이.”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아버지께 사랑한다는 말도 난생처음 했다. 내 자식과 남편에게 수없이 남발하던 ‘사랑해’라는 말을 아버지한테는 한 번밖에 하지 못했다.
그리고 한 달이 채 못 돼서 아버지를 다시 만났을 때 아버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주머니 없는 수의를 입고 아주 평안한 얼굴로 영안실에 누워서 나를 맞았다.
떨어지는 내 눈물방울 속에 하얀 나비 한 마리가 아버지의 지게 위에서 나와 훨훨 자유롭게 날개 짓 하며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오래전 아버지를 그리며 써두었던 글을 꺼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