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한동안 나는 내 몸이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소설들 사이를 유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기억이 나는 것은 에트가르 케레트의 소설로 들어갔을 때인데, 그곳에는 다른 소설들로 무한히 진입할 수 있는 연결 통로 같은 것이 있었다.
거기서 엘라를 만났다. 엘라는 비밀을 속삭이듯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치키랑 키스를 하는데 날카로운 쇠붙이에 찔린 것 같은 느낌이 나는 거야. 그래서 치키가 잠들었을 때 그의 입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지. 내가 뭘 발견했는지 알아? 지퍼. 치키 혓바닥 밑에 아주 작은 지퍼가 달려 있었어.” 엘라는 망설임 없이 지퍼를 내렸다. 지퍼를 내리자 치키 몸이 두 쪽으로 쫙 벌어지더니 안에서 유르겐이라는 독일 남자가 튀어나왔다. 엘라는 유르겐과 환상적인 밤을 보냈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유르겐은 멍청한 인종주의자였던 데다 음악을 한답시고 밤낮없이 꽥꽥거렸고 못된 말을 일삼았다.
어째서 엘라는 유르겐을 가만히 둔 것일까. 유르겐을 제거하는 일은 너무나 쉬운데. 나는 엘라를 대신해서 유르겐을 처리하기로 했다. 유르겐이 술에 취해 더러운 말을 지껄이며 난동을 피울 때, 일전에 배웠던 크라브 마가를 이용해 단숨에 그를 제압한 것이다. 팔이 꺾인 유르겐이 아아아,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조금의 연민도 없이 지체도 없이 신속하게 지퍼를 열었다. 그러자 유르겐의 몸이 집업 카디건처럼 쫙 갈라졌고, 안에서 톰 킹이 튀어나왔다.
톰 킹은 삼십 대 중반 정도로 전성기가 지난 권투 선수였는데, 비리비리한 치키나 유르겐과 달리 잘 단련된 근육질 몸을 가지고 있었다. 톰 킹은 시합 준비를 한다는 이유로 어마어마한 음식을 먹어 댔다. 내 몫까지 몽땅 먹어 치우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툭하면 단백질 타령을 했다. 나는 화를 누르고 소를 먹이듯이 톰 킹을 먹였다. 어쩌면 테스토스테론이 폭발하는 권투장에서 그가 승리의 기쁨에 들떠 내 이름을 부르는 장면 같은 것을 상상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면 마치 내가 챔피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나 톰 킹은 그보다 열 살은 더 어린 애송이에게 무너지고 말았다.
“스테이크, 스테이크를 딱 한 장만 더 먹었더라면…. 그놈한테 딱 한 방만 제대로 먹였으면 됐는데, 힘이 달렸어.”
톰 킹은 그렇게 말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바닥에 코를 휑 풀었다. 내 인내심은 한계치를 넘어섰는데, 톰 킹은 눈치가 없었다. 마침 우리는 어둑한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고 주변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잠깐 입 좀 벌려 볼래? 입 안에 혈자리가 있거든. 거길 누르면 기운이 날 거야.”
나는 그렇게 말했고, 톰 킹이 눈물을 마저 훔치고 입을 벌렸을 때 단숨에 지퍼를 내렸다. 그리고 벗겨진 톰 킹을 둘둘 말아 가방에 구겨 넣었다.
이번에는 프랑수아였다. 사실 나는 프랑수아를 보자마자 입을 좀 벌려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는 사실 그리 호감을 느낄만한 외모는 아니었다. 얼굴은 푸석푸석했고 머리카락은 듬성듬성했으며 키는 나보다 조금 작았던가. 그러나 입을 벌려 달란다고 벌려 줄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일단은 가만히 있었다. 프랑수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당신 뭐야?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왜 여기에 있어?”
프랑수아는 팔짱을 끼고 몸을 움츠린 채 눈을 희번덕거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꼬장꼬장하고 골치 아픈 스타일. 나는 그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그 무슨 마트료시카 같은 소리야?”
프랑수아가 쇳소리를 내며 물었다. 듣고 보니 마트료시카랑 비슷하기도 했다. 마트료시카처럼 귀여운 러시아 여자들이 층층이 들어 있는 편이 나을 것 같기는 하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앞장서서 걸었다. 밤공기가 찼고 언제까지고 공원 벤치에 앉아 프랑스 대머리의 짜증을 받아 주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프랑수아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나를 따라왔다.
“이제야 좀 알 것 같군.”
프랑수아가 내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나는 현관문을 열면서 “뭘?”이라고 물었다. 프랑수아는 나를 밀치고 집 안으로 들어갔고, 거실 소파에 제집처럼 턱 걸터앉았다.
“당신은 문학 애호가이거나 허언증 환자야.”
프랑수아는 검지로 나를 가리키면서 뭔가 대단한 거라도 발견한 것처럼 말했다.
“양립 불가능한 사안은 아닌 것 같은데. 둘 다인 걸로 해 그럼.”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잡동사니를 치우면서 건성건성 답했다. 프랑수아가 집요하게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느껴졌다. 휴우, 그에게 관심을 주기로 했다. 프랑수아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비교문학을 전공했어. 대학교수라고.”
“자기소개를 하자는 거야? 알다시피 난 문학 애호가에 허언증 환자야.”
“전체적인 서사는 에트가르 케레트의 『지퍼열기』에서 빌려 왔군. 『지퍼열기』에서 단 한 번 일어난 일을 반복해서 일어난 일로 변형했고. 유르겐은 『지퍼열기』 소속이고, 톰 킹은 잭 런던의 『스테이크 한 장』 소속이지.”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고, 프랑수아는 입을 삐쭉거리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가만있자. 그럼 나는….”이라고 중얼거리면서 눈알을 굴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랑수아와의 생활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그는 아는 것이 많았고 그래서 그를 통해서 괜찮은 책들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뭐, 일종의 퍼스널 쇼퍼를 둔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러나 외출을 했다가 예정보다 일찍 집에 돌아왔을 때, 프랑수아는 주민등록증을 발부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핏덩이와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가 문학을 전공하였으며 프랑스인이고 대학교수라는 걸 고려하면 그리 생경한 조합은 아니었다.
프랑수아는 벌거벗은 채로 집안을 서성이며 “다 설명할게.”라는 말을 반복했다. “못 볼 꼴 보이지 말고 옷부터 입어.” 나는 프랑수아에게 가운을 던져 주었다. 프랑수아는 가운을 걸치고 와인을 따라 마셨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내젓고 다시 잔에 와인을 채웠다.
“이 상황이 끔찍해 보이겠지. 하지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야. 고작 금기를 좀 깨뜨렸을 뿐이니까. 그러니까 아주 덧없는 문명의 금기…. 아니, 문명의 금기도 아니지. 이슬람은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데다가 소녀와 결혼을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헛소리를 하려면 정성이라도 좀 들여. 이슬람이 뭐 어째? 잊어버렸나 본데 여기는 한국이야. 이슬람 신자가 1퍼센트도 안 된다고.”
“프랑스인 입장에서는 이슬람이나 유교나, 중동이나 극동이나 다를 게 없어.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고. 내가 어떤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야.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가치들이 몽땅 무너져 내렸어. 신이 죽은 지는 아주 오래됐고 인간 이성도 주체도 다 죽었지. 내가 살려면 뭐라도, 그게 뭐라도 꼭 움켜쥐는 수밖에 없어.”
“그래서 극동의 어린 여자애 엉덩이를 움켜쥔 거야?”
“아, 제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 줘.”
“좋아. 대신 당신은 이 집에서 추방이야. 내 집에선 내 뜻에 복종하지 않는 짐승은 무조건 추방이니까. 하지만 저건 다 마시고 나가 줬으면 좋겠어.”
나는 핏덩이를 꾀어 분위기를 잡으려고 산 것이 분명한 보르도 와인 두 병을 가리켰다. 프랑수아는 맥이 빠진 듯 허탈한 표정을 짓더니 그건 별문제가 아니라는 듯 와인을 들이켰다. 나는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가 취해 곯아떨어지면 지퍼를 열어야겠다. 비닐장갑이 남아 있던가. 내 손에 침을 묻히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게 프랑수아의 지퍼를 열고 또 누구의 지퍼를 열었더라. 하여튼 헨리에게 정착하기 전까지 몇 명의 남자들을 더 만났지만, 헨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엉망이었다. 나는 외출을 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먼저 헨리의 작은 엉덩이를 토닥였다. 내가 엉덩이를 검지 끝으로 톡톡 치면 그는 앙증맞은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면서 춤을 추고는 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빵이며 우유며 초콜릿이며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너무 쉬웠다. 먹다 남긴 것을 던져 주면, 그것만으로도 헨리는 포식을 할 수 있었으니까. 헨리의 키는 15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았고 몸무게는 글쎄 500그램은 되려나. 나는 헨리를 집어 물티슈로 그의 얼굴과 몸을 꼼꼼히 닦았다. 헨리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감돌았다. 헨리의 단점이 있다면 매번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눈물을 흘리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다리를 벌렸다. 그리고 헨리의 머리통을 가랑이 사이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다. 오, 헨리. 얼마 후 나는 헨리를 꺼냈고 달콤하고 나른한 잠에 빠져들었다.
헨리가 보라색 구슬이 달린 머리핀을 쥐고 내 왼쪽 가슴 아래에 서 있다. 내 머리핀이 왜 그의 손에 들려 있나. 그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 헨리는 내 가슴에 귀를 댔다가 몇 걸음 옆으로 옮기고 다시 귀를 댄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자신의 키보다도 큰 머리핀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든다. 머리핀이 내 피부를 뚫고 들어가 심장에 구멍을 낸다. 가슴이 죄어오는 느낌이 들고 나는 숨을 쉬지 못한다.
나는 발작하듯 잠에서 깼다. 식은땀으로 몸이 축축이 젖었고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몸을 비스듬히 일으켰다. 헨리는 내 가슴에서 굴러떨어져 배꼽 옆에 넘어져 있었는데, 그의 손에는 보라색 구슬이 달린 머리핀이 쥐어져 있었다. 어디서 저런 못된 걸 배운 거지. 헨리는 허둥지둥 머리핀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내 배를 찌르려고 했다. 나는 재빨리 그 몹쓸 것을 집어서 방바닥에 내던졌다. 심장이 날뛰었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가만히 긴 숨을 몰아쉬고 방바닥을 확인했다. 헨리는 목이 완전히 꺾인 채 죽어 있었다.
나는 침대 밑, 서랍 속, 가방 귀퉁이, 쓰레기봉투 안을 뒤졌다. 구겨진 종이처럼 말려 있는 유르겐, 톰 킹, 프랑수아…를 꺼내 판판하게 펼쳤다. 그들과 보냈던 지난날들이 하나 둘씩 떠올라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피곤했지만 생각을 해야 했다. 무엇을 해야 하나. 나는 머리카락을 뽑아서 바늘에 꿰었다. 그리고 유르겐, 톰 킹, 프랑수아…를 꿰매고 접고 뒤집고 다시 꿰매기를 반복했다. 일주일이 지났다. 애도와 창조의 시간이 마침내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 나는 그것을 헨리에게 입혔다. 작은 헨리는 커다랗고 멋진 탈을 썼다. 보기가 아주 좋았다. 이제는 내가 시험에 들 차례였다. 나는 내 혓바닥 아래에 손가락을 넣어 지퍼를 쭉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