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에마뉘엘 카레르는 <돌아온 자들>이라는 TV시리즈 시나리오를 썼는데, 그것은 어느 날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죽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부활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부활한 사람들은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것도 모르고 죽기 전과 마찬가지로 행동한다. 냉장고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먹고 샤워를 하고 삼십 년 전에 자신이 살던 집으로 불쑥 찾아가는 것이다. 에마뉘엘 카레르에 따르면, <돌아온 자들>은 설정만 봐도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는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연출자가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이 꼴 보기 싫어서 중도 하차했고, 카레르가 빠진 <돌아온 자들>은 그의 예감대로 성공해서 에미상을 받았다.
나는 드라마 시리즈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카레르가 던져 놓은 미끼를 물어 <돌아온 자들>을 다운받아 봤다. 시즌 1은 흥미로웠지만 시즌 2로 가면서 어설프게 엉키는 이야기를 참아 주기 어려워서, 흰자위로만 드라마를 봤기 때문에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시즌 2가 망한 이유는 카레르가 빠져서라기보다는 부활이 왜 일어났는지 이유를 밝혀서 이야기를 종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프란츠 카프카가 『변신』을 장편으로 늘리고 싶어서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된 이유를 플래시백으로 집어넣는다면, 이유를 뭐라고 하던, 악마의 저주라고 하던 바이러스 감염이라고 하던 사실 벌레 탈을 쓴 것이라고 하던, 처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차라리 시즌 2를 만들지 않고 내버려 두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때로는 완성되지 않고 시작만 하는 이야기가 낫다고 볼 수도 있지 않나. 아닌가? 뭐 어찌 되었든.
<돌아온 자들>에서 부활은 과학기술을 통해 의지적으로 이루어 낸 성취가 아니라 일종의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그려진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부활이 이루어지고, 마을 사람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떠나보냈던 자들이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돌아왔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그들과 함께 살 방법을 모색하기도 하고, 그들을 배제하기 위해 애쓰기도 한다. 부활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분과 경계를 없애는 것으로, 죽음에서 돌아온 자들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혐오감과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이 부활했다면, 그들은 신인가? 신이 아니라면, 신의 아들인가? 그들이 죽기 전과 동일한 존재라고 볼 수 있나? 어째서 그들은 다시 삶을 얻었나? 이제 기존의 윤리와 규범은 웃음거리가 된다. 살인이 나쁘다고? 왜 죽어도 어차피 다시 돌아올 텐데! 게다가 죽은 자들의 귀환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대상들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부당하지 않은가. 죽은 자들과 경쟁을 하라니?
부활로 인해 야기되는 사회적 문제들은 중요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부활에 대한 나의 관심이 죽은 조상들 ‘모두’를 부활시킨다는 평등주의적 프로젝트나 초자연적 미스터리로서가 아니라 아주 개인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러면서도 신을 믿지 않았고 차라리 자연과학을 믿었고, 의미도 목적도 없는 냉담한 우주를 상상하며 오들오들 떨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나는 코스미즘을 택한 것인데, 그러니까 내세나 천국을 믿는 대신 부활을 믿는 쪽을 택한 것이고, 내 죄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신 대신 코스미즘을 채택한 미래 인류를 믿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래서 부활이 일으킬 사회적인 문제들, 그러니까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한 악인들까지 모두 부활시켜 발생할 전쟁 상태, 혹은 제우스를 믿는 사람들과 포스트휴먼이 뒤엉켜 사는 세계의 무질서 같은 것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부활은 집단적인 규모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었고, 특별히 선택된 사람만 부활되어야 했는데, 위인을 부활시켜서는 안 되었다. 왜냐면 위인의 부활은 위인의 훌륭함이 현대에도 발현될 것인지 여부에만 관심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21세기에도 가장 현명한 사람일까? 소크라테스와 같은 현인을 현대사회는 어떻게 취급할까? 뭐 이런 식의. 그래서 위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되, 반드시 부활시켜야 하는 사람을 찾아야 했는데, 그런 사람을 찾아 헤매던 중에, 아주 우연히 방콕에서 그를 발견했다.
3) 고온다습한 짜증 나는 날에 배를 타고 짜오프라야강을 건넜다. 배에서 내리면 낡은 의과대학 건물들이 보였고 그 건물들을 헤치고 들어가면 더 낡은 건물이 보였는데 거기에 시리랏 의학박물관이 있었다. 건물 내부는 어두웠고 햇볕이 드는 자리에 안내 데스크가 놓여 있었다. 나는 입장료를 내고 장부에 이름과 출신 국가 같은 것을 적었다. 데스크 직원은 입장료는 의학 연구를 위해 사용될 것이며,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고 엄숙한 태도로 관람할 것이 요청된다고, 엄숙하게 말했다.
나는 입술을 앙다물고 양손을 배꼽 위에 모으고 어정쩡한 걸음새로 중앙 계단을 올랐다. 긴 복도를 따라서 전에는 강의실로 쓰였을 것이 분명한 전시실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복도에는 오래된 선풍기들이 윙윙윙 소리를 지르며 돌아가고 있었고, 선풍기 사이사이에 해골과 장기가 무심하게 툭 던져져 있었다. 나무 바닥을 밟을 때마다 삐걱삐걱 관절 꺾이는 소리가 나서 무슨 소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숨을 조금 참았고, 거의 까치발로 복도를 통과해 전시실 내부로 들어갔다.
전시실에는 유리병에 담긴 샴쌍둥이 표본들이 별다른 설명도 없이 진열장을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전시실이 아니라 급히 방부 처리한 시신들을 마구잡이로 쌓아놓은 대형 창고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죄책감과 흥분감이 혼재된 채로, 두려움과 호기심이 충돌하면서 빚어진 이상한 감정적 소용돌이에 휩싸여, 수백 개의 유리병에 담긴 샴쌍둥이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그들은 엉덩이, 등, 팔꿈치, 뒤통수, 얼굴 등 서로 다른 부분을 맞대고 있었고, 손바닥만 한 태아에서 갓난아기까지 크기도 다양했다.
그중에서 눈길을 잡아끈 것은 10~15센티미터 정도 되는 작은 태아 표본이었다. 그는 샴쌍둥이는 아니었고, 홀로, 포르말린 안에 잠겨서, 작은 씨앗 같은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나는 그 까만 눈동자를, 뾰족한 턱을, 또 쫑긋하게 솟은 귀를 쳐다보았다. 권태로운 듯 보이기도 하고 조금 놀란 듯 보이기도 하는 작은 얼굴 앞에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어째서? 어떤 기시감 때문에, 그러니까 나는 이 얼굴을 본 적이 있으니까, 사진에서, 내가 아기였을 때 사진에서, 나는 이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이 아이는 나를 닮았다, 아니 나인 것 같다, 이 아이는 자라서 내가 될 것이다. 왜냐면 이 아이는 눈을 뜨고 있으니까.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고 말했는데, 사실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자궁에서부터 눈을 뜨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태아에게 오얏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오얏은 자신을 이루는 세포들이 사람의 형상을 이룬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눈을 떴다. 그는 아주 어리둥절하여서 눈을 번쩍 뜰 수밖에 없었다. 그 어리둥절함은 갑자기 출현한 자신의 존재와 자궁이라는 세계의 미스터리에 기인했다. 나는 없었는데, 지금은 있다, 지금은 여기에 있는데, 여기는 어디인가, 하는 질문들을 더듬으면서 경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악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는 자궁에서 나오기도 전에, 자기 이름을 갖기도 전에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오얏을 부활시키는 소설을 쓰기로 했다. 오얏을 부활시키는 것은 또 다른 나를 부활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미래에 이루어질 나의 부활을 앞당겨 실행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얏과 나는 서로 등을 붙이고 서로의 반대편을 바라보며 자라다가, 어떠한 우여곡절로 인하여, 분리 수술 도중에 오얏만 숨졌다든가 하는 이유로, 나는 살았고 오얏은 죽었다. 그러나 어째서 오얏이 죽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소설에 나오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오얏을 나의 잠재태라고, 실현되지 않은 또 다른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현실에 밀착된 삶을 살지 못하고 구름 위를 걷듯이 살아가는 인물인데, 오얏을 본 순간 그가 잃어버린 나의 절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삶으로부터 소외된 느낌에서 벗어나 완전한 삶을 살고자 오얏을 부활시키는데, 어떻게 부활시키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소설에 나오지도 않고, 부활시키는데, 부활시키는 데 성공하는데… 그래서 어떻게 되나.
어떻게 되냐면, 오얏은 아주 급속히 성장하여 내 삶을 점차 대체해 나간다. 절반의 현실감밖에 없었던 내 삶은 점점 축소되고 나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 유리병에 갇힌다. 그런데 이건 너무 도플갱어 서사에 충실하지 않나. 오얏이 급속히 성장했을 때부터 어쩐지 나와 대결하는 구도가 만들어질 것만 같지 않나. 그렇다면 도플갱어 서사를 뒤집는 것은 어떨까. 부활한 오얏이 나와 불화하지 않고 나의 의도대로 또 다른 나를 실현하며 살아가면 어떨까. 그러니까 나는 두 배로 노동하고 두 배로 자아를 실현하고 두 배의 일상을 누려 두 배의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정신 나간 것처럼 발랄하고 유쾌하고 긍정적인, 에너지 과잉의, 그런. 그런 소설을 써 보면 좋겠다,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오얏과 내가 두 배로 무언가를 한다니, 그런 상상만으로도 힘이 빠져서 타이핑을 할 기운조차 없었다.
아무래도 도플갱어 설정은 빼 버리는 것이 좋겠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오얏이 잠들어 있는 유리병을 갖게 된다. 그러나 생활에 치여 유리병을 방구석에 방치해 두는데, 방의 온도는 유리병이 부화하기에 아주 적합해서, 열 달이 지난 어느 날 유리병을 막은 코르크 마개가 스르륵 빠지면서 오얏이 기어 나온다. 부활한 오얏은 나와는 닮지 않았고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오래된 태국 사람이었다. 오얏은 내가 알지도 못하는 태국의 전통적 가치들과 문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라서, 그러나 유전과 양육 논쟁을 할 생각은 없으니 이것은 그냥 설정이다, 오얏과 나는 사사건건 갈등을 빚는다. 그래서? 그래서 결국에는 타자가 곧 나라는 것을 깨닫고, 차이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관용하고 공존하고. 그렇게 된다고? 그렇게 작위적으로 환대의 윤리를 전시하자고? 아니, 그럴 리가. 그럼 어쩌자고? 태국인 오얏은 좀 아닌 것 같다고.
문제는 오얏이 아니라 초점 화자로 ‘나’가 자꾸 등장하는 데 있는 것 같다. ‘나’가 등장하는 순간, ‘나’와 오얏의 관계가 문제로 떠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를 빼고 오얏을 단독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써 보는 것은 어떨까. 이야기는 근미래의 어느 공장에서 시작되는데, 그 공장은 베이비 젤리를 만드는 공장으로, 베이비 젤리는 작은 태아 모양의 젤리로, 인공수정으로 만들어 낸 태아를 젤리화한 것이다. 복숭아 맛 젤리, 포도 맛 젤리, 레몬 맛 젤리, 이런 식으로 다양한 맛의 베이비 젤리가 있는데, 이 젤리는 태아가 지니고 있는 영양 성분을 그대로 농축했으면서도 과일 맛 젤리 형태라 태아를 먹는다는 부담감과 죄책감을 없애 준다. 그러니까 생명과 시장에 대한 이야기, 소비하는 생명과 소비되는 생명, 유예되는 죽음과 유예되는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오얏은 젤리가 될 뻔한 태아인데 우연히 유리병에서 빠져나와 살아남게 된다. 오얏은 공장 안에서 베이비 젤리를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다가, 어느 날 출고되는 베이비 젤리들 틈에 끼어 공장 밖으로 나가게 된다. 그렇게 되는데, 어떻게 되나? 오얏은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사건 사고를 일으킨다. 그는 두려움이 없고 긍정적이며 진취적이지만 사회적 규범이나 예의나 상식을 학습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오얏에게는 소비되는 생명과 소비하는 생명을 구분하는 기준이 없으므로, 배가 고프면 유모차에 잠들어 있는 갓난아기의 머리통에 이빨을 가져다 대는 것이다. 나는 웬일인지 신이 나서 이런 종류의 에피소드를 잔뜩 써 내려갔는데, 오얏을 그렇게 자잘한 거리의 무법자로 남겨 두어야 할지, 히어로나 빌런으로 진화시켜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에 오얏은 길거리 생활에 심드렁해져서 제 발로 베이비 젤리 공장으로 기어들어 가고 말았다.
이 밖에도 오얏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무수히 많았지만 그 어떤 것도 완성되지 못했다. 오얏은 개봉도 못 할 영화들에 무수히 출현하였고, 출연료 한 푼 받지 못한 채로 어느 날 생명을 다하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오얏을 등장시켜서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게 되었다. 오얏은 내 마음 안에서 그 자체로 비운의 배우, 도무지 영화 한 편을 이끌어 나갈 힘이 없는 배우가 되어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