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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Nov 19. 2022

[중편소설]소설 없는 소설 (1)

“웃긴 게 뭔지 알아요? 내가 쓴 소설을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데 그 ‘아무도’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고 중간에 그만둬 버리는 거죠. 물론 그렇다고 내가 바틀비가 되고 싶다는 건 아니에요. 당신 책은 이미 출판되었으니까 내가 거기에 낄 수도 없고요.”


 나는 엔리께 빌라 마따스의 책 『바틀비와 바틀비들』을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내 무의식은 내 욕구를 즉각적으로 충족시키는 편이라서 『바틀비와 바틀비들』에 대해 말하고 싶으면 내 손에 『바틀비와 바틀비들』이 들려 있는 식이다.


 『바틀비와 바틀비들』은 바틀비증후군에 걸린 작가들을 추적한 책으로, 바틀비증후군은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 바틀비와 같이 ‘아니요.’의 병에 걸려서 글을 쓰지 않으려는 작가들이 걸린 병을 뜻하는 것으로, 이 책은 아직 쓰이지 않은 미래의 문학에 대한 주석의 형식으로 쓰여 있다.


 나는 엔리께 빌라 마따스와 피에르 바야르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싱글 사이즈 침대 위에서 서로 어깨를 밀치며 옹졸하게 앉아 있었는데, 그것은 내 무의식이 로케이션을 허용하지 않는 관계로, 그들이 내가 잠든 침대까지 날아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엔리께 빌라 마따스와 피에르 바야르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템포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너무 많은 소설이 나와 있어서 그 누구의 소설도 사실 굉장히 궁금하지는 않죠.”

 엔리께 빌라 마따스가 말했다.

 “미래 유령이랑 대화라도 해 보는 게 어때요? 그들이 굉장한 걸 썼을지도 모르니까 아이디어를 몇 개 훔치는 거죠.”

 피에르 바야르가 말을 받았다. 그가 말한 미래 유령은 과거의 작가와 소통을 하는 미래의 작가를 의미하는데, 그는 종래의 표절 개념을 뒤집어서 과거의 작가가 미래의 작가가 쓸 작품을 표절한다는 개념으로 문학사를 새로 구성한 『예상표절』이라는 책을 썼다.


 나는 밤이 새도록 엔리께 빌라 마따스와 피에르 바야르를 붙들고 문학 이야기를 빙자한 신세 한탄을 했다. 그러니까 내가 뭘 쓰고 싶은 거냐면, 나는 감동과 유머가 버무려진 드라마를 쓰고 싶지는 않고, 기존의 서사와 관습을 해체하는 데 골몰하고 싶지도 않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천재적인 내러티브를 구성하고 싶지도 않고, 재기 넘치는 말장난이나 언어 실험을 하고 싶지도 않고,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고 싶지도 않고,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인가, 그렇다는 것인데, 그러나 동시에 그런 걸 다 하고 싶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징징거렸고 엔리께 빌라 마따스와 피에르 바야르는 이렇게 해 봐라 저렇게 해 봐라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랬던 것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밤새 나눈 대화가 늘 그러하듯이 아침이 밝아오자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느라 밤을 다 잡아먹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밤샘 토론의 결과로 나는 미래에 완성할 소설의 주석 노트를 쓰기로 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침에 눈을 뜨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다음의 주석 노트는 과거 유령이 범했던 실패담이자 미래 유령과의 대화를 위한 것이다.    

 



1) 미래 유령 중 하나는 ‘미래의 나’인데, 그것은 몇 달 혹은 몇십 년 후의 ‘나’가 아니라, 수백 년이나 수천 년 후의 ‘나’일지도 모르겠다. 무슨 이상한 소리냐고 생각하겠지만, 코스미즘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코스미즘은 19세기 말 니콜라이 표도로프를 필두로 일련의 러시아 과학자와 예술가, 사회학자들이 지녔던 사상으로,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인류 전체를 불멸에 이르게 하는 것을 공동의 과업으로 삼았다. 죽음은 스스로 부흥할 능력이 없는 미성숙한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과학기술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인간의 진화적 발전이 완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코스미스트들은 과거를 희생시켜 미래로 나아가는 착취적인 인류 역사를 넘어서기 위하여 불멸의 대상을 현재와 미래 인류뿐 아니라 과거 인류에까지 확장했다. 다시 말해, 죽은 조상들을 모두 부활시켜 그들에게 삶을 되돌려 주는 것을 진정한 인간성의 실현이라고 본 것이다.


 코스미즘은 미래주의와 다윈주의와 공산주의와 러시아 정교를 때려 넣고 푹 끓인 것인데, 나는 이 황당한 스프에 한동안 완전히 꽂혀 있었다. 그래서 십 년 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이 근황을 물어보면 코스미즘을 간증했고, 직장을 그만둔 친구를 코스미즘 필름을 상영하는 <모두를 위한 불멸> 전시에 데려갔으며, 파혼 직전인 친구에게는 코스미즘 앤솔로지를 선물로 주었다. 근황이고 직장이고 결혼이고 간에 일단 불멸부터 해야 다음 직장을 찾고 다음 연인을 만나고 근황이 끊이지 않고, 그렇지 않나? 그렇지 않아? 그때 나는 정말 그렇게 믿었고 그래서 꿈에서도 당당히 페테르부르크를 헤매고 다녔다.

 

 페테르부르크는 잿빛 추위로 얼어붙어 있었고 나는 코스미즘 콘퍼런스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콘퍼런스는 지하철과 연결된 주상복합건물 꼭대기에서 열렸기 때문에, 낡고 복잡한 소비에트 지하철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 꿈 지분의 80퍼센트를 차지했다. 요제프 K가 된 꿈인가, 영영 콘퍼런스에 못 가나 싶었으나, 다행히 주상복합건물을 찾아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요제프 K가 된 꿈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건물로 들어가서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건물 안을 뱅뱅 도는 것으로 꿈 지분의 15퍼센트를 채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마침내 꼭대기 층에 도착했을 때는 폐소공포증으로 거품을 물고 쓰러지기 직전이었는데, 이런 불상사를 예감했던지 소비에트의 건축가는 꼭대기 층의 벽 한 면을 통유리로 만들어 놓았다. 


 나는 유리 벽 앞에 바싹 붙어 숨을 몰아쉬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건너편에 고풍스러운 건물 지붕이 보였는데, 지붕은 혁명가들의 두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어라, 그런데 혁명가들의 두상이라니, 저들이 혁명가들이라는 걸 내가 어떻게 알지, 의문이 들었을 때, 비둘기 떼가 후두둑 지붕 위에 내려앉았다. 비둘기들은 유전공학의 세례를 받았는지 현대미술의 세례를 받았는지 독수리만큼 커서 주먹만 한 부리로 혁명가들의 머리통을 콕콕 쪼아 댔다. 그 기이한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는데, 뒤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처럼 생긴 러시아인이, 대충 근육질 대머리라는 뜻이다, 아무튼 그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 비둘기들은 소비에트의 비둘기들로 1991년에 멸종이 되었으나, 이번에 러시아 국영 기업이 권력을 잡으면서 부활시킨 것입니다. 대체 무슨 헛소리시죠? 나는 물었는데, 블라디미르 근육 대머리는 비둘기들의 자태를 보라면서 나를 유리 벽 앞으로 바짝 떠밀었다. 


 그러자 건너편에 앉아 있던 독수리만 한 비둘기들이 난폭하게 유리 벽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비둘기들은 미친 듯이 날개를 퍼덕거리면서 주먹만 한 부리로 유리 벽을 빠직빠직 찍어 댔다. 나는 신경이 빠직빠직 타들어 가는 것을 느끼면서 뒷걸음질을 쳤는데 그러다 그만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빠직,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 벽에 금이 갔고, 비둘기들이 충혈된 눈알을 부라리며 깨진 유리 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날개가 찢긴 비둘기가 피를 뚝뚝 흘리며 붉고 세모난 입을 벌려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꿈에서 깨어나 알람을 껐다.


 알람을 끄고 나서도 망막에는 페테르부르크의 환영이 생생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마치 알프레드 히치콕이나 데이비드 린치가 소비에트 버전으로 만든 영화를 보고 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걸 그대로 옮기기만 해도 그럴싸한 소설이 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잠이 들었고 다시 꿈속이었고 다시 페테르부르크였다. 페테르부르크 길거리에서 아디다스 트레이닝복을 입은 고프닉 청년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벤치에 쭈그리고 앉아 그것을 구경하다가 그 애들과 어울려 보드카에 도시락 사발면을 먹었는데 괜찮은 조합이었다. 그런데 푸틴과 비둘기와 혁명가와 코스미즘이 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야? 고프닉 청년이 물었다. 그런데 내가 그 이야기를 했나? 그런 꿈을 꾸었는데 그걸로 소설을 쓸 거라는 이야기를, 내가 했나? 그러자 청년은 내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별안간 보드카 병으로 내 머리통을 내리쳤다. 나는 비명도 지르지 않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꿈에서 기절을 하는 바람에 기절한 채로 꿈도 없이 이어서 잠을 잤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러한 꿈을 꾸었다는 것조차 잊었고 그래서 코스미즘 소설도 쓸 수 없었다.


 고프닉 청년들의 공격을 받지 않은 다른 러시아 작가들은 코스미즘의 자장 안에서 소설을 쓸 수 있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나 막심 고리키, 레프 톨스토이, 아나톨리 김 같은 작가들이 여기에 포함이 되는데, 보다 직접적으로 코스미즘을 투영한 작품을 써낸 작가는 예브게니 옙투셴코다. 옙투셴코는 『딸기밭』이라는 소설에서 러시아 우주공학의 아버지이자 코스미스트들 중 하나인 콘스탄찐 찌올콥스키를 등장시켜 그가 이렇게 말하게 만들었다.


 “만약 사람들이 오늘날 적대적인 싸움에 쓰는 돈을 서로를 위하는 싸움에 쓴다면 질병뿐만 아니라 죽음 자체도 정복할 수 있을 겁니다. 죽음은 또한 질병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바이러스를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먼 조상을 부활시킬 방법을 배우게 될지 모릅니다. 어떻습니까. 소크라테스와 아침을 먹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과 점심 식사를 하고, 푸시킨과 저녁밥을 먹고 싶지 않습니까?”1)


 나는 소크라테스나 알렉산더나 푸시킨에게 특별한 애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찌올콥스키의 대사에 감동을 받아서 아무 때나 그 대사를 읊고 다녔다. 어떻습니까. 소크라테스와 아침을 먹고, 알렉산더와 산책을 하고, 푸시킨과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습니까? 죽은 조상들 모두를 부활시킨다는 것은 역사에 기록된 위인들과 동시대를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와 아침을 먹는다니. 나는 오트밀과 그릭 요거트를 사이에 두고 소크라테스와 마주 앉아 있는 광경을 상상했다. 


 아마도 소크라테스는 어리둥절할 것이다. 아무래도 낯설 테니까, 내가 무슨 말이든 먼저 해야 할 것 같은데. 부활한 소감이 어떠세요? 이건 아니고. 알려진 것보다는 미남이시네요? 이것도 아니지. 철학자에게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 좋겠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이는 누구입니까?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신탁이 어쩌고 하면서 자기가 제일 지혜롭다고 하면 어쩌지. 고분고분 동의를 해 주기 어려울 것 같은데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하나. 그냥 가십성 루머나 해소를 하는 게 낫겠다. 선생님이 문맹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진짜예요?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자네 질문에 답을 하려면 자네가 생각하는 문맹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겠지? 그렇게 말할 거고, 내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잘못했다고 눈물을 쏟을 때까지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겠지. 그래서 오트밀이 목구멍에서 넘어가지 않겠지. 아침부터 기분을 잡치겠지. 이러자고 소크라테스를 부활시켜야 하나. 그런데 그러면, 소크라테스가 아니면, 누구를 부활시켜야 하나.    


  


 1) 박영은, 『러시아 문화와 우주 철학』. 민속원. 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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