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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Nov 19. 2022

[중편소설] 소설 없는 소설(5)

6) 나는 이런저런 자서전 혹은 자전 소설을 읽으면서 글을 쓰지는 않았는데, 자료 조사를 한 것 같은 기분은 또 들어서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셨다. 한동안 코스미즘을 간증하며 친구들을 괴롭힌 죄가 있었기 때문에, 그때는 잠자코 앉아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이런저런 자서전의 파편들이 떠돌아다녔고, 덕분에 알코올에 얼큰하게 절여진 새벽녘에는 나도 모르게 나의 어린 시절을 고백하고 말았다.


 어렸을 때 내가 살았던 집은 오래된 일본식 가옥이었는데 마당 한쪽 구석에 깊은 구멍 같은 것이 있었어. 밭에서 키우는 옥수수 껍질이나 시든 호박잎, 연탄재 같은 것들을 묻어 두는 구멍이었는데, 너비는 일 미터가 안 되었고 깊이는 이 미터 정도 되었지. 어느 날은 옆집에 사는 빈이랑 그 구멍으로 내려가 보기로 했어. TV 만화로 나온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보고 나와서 괜한 모험심에 불탄 상태였거든. 가위바위보를 하고 빈이 먼저 구멍에 들어갔어. 쿵 소리가 나서 괜찮으냐고 물었는데 대답을 안 하는 거야. 할 수 없었지. 구멍에는 쓰레기들이 부패하면서 만들어진 유독 가스가 고여 있었으니까. 119가 출동했지만 이미 늦었고, 빈이 부모님이랑 우리 부모님은 나를 붙들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다그쳤어. 나는 입이 안 떨어져서 아무 말도 못 했지. 그 후로 빈이 가족은 얼이 빠진 채로 살다가 이사를 갔어. 나는 아직도 가끔씩 내가 그 애를 구멍 안으로 밀어 넣는 꿈을 꿔. 아니면 그 애가 구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 나오거나. 그 애가 아니라 내가 먼저 구멍에 들어가는 꿈을 꾸지.


 난데없는 나의 고백에 친구들은 할 말을 잃고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내가 실제로 겪은 일이 아니었고, 앤드류 포터의 단편 『구멍』을 내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집을 배경으로 변형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내가 실제로 그런 일을 겪은 것 같은 감정을 느꼈고, 그래서 빈이가 죽었다는 부분을 말할 때는 매소드 연기를 하는 배우마냥 울컥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위로를 받고 있을 수는 없어서 친구들에게 진실을 말했다. 그런 소설을 읽었는데 그런 감정이라면 내가 아주 잘 알아서 마치 내가 겪은 일 같았다고. 친구들은 눈 뜨고 코라도 베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얘가 하다하다 별걸 다하는구나, 하는 얼굴이었는데, 나는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써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미 쓰인 이야기를 내 이야기와 엮어서 쓰면, 내 기억이 들어가 있되 나의 이야기는 아니고 다른 모든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농담이기도 하고 공상이기도 한 그런 이야기를 쓸 수 있지 않을까.      



 7) 그렇게 해서 나는 「계속되는 자서전」을 쓰게 되었는데 「계속되는 자서전」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기억한다. 자정을 알리는 시계 소리, 싸늘한 공기, 피 냄새, 소독약 냄새, 찰싹, 엉덩이가 화끈거리고,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 낯선 손길이 까슬까슬한 면직물로 나를 감싸고, 스테인리스 기구들이 부딪치는 소리…. 울음을 삼키고 눈을 떴지, 처음 들어 올리는 눈꺼풀, 뿌옇고 흐린 시야, 녹색 가운, 붉은 피, 예리한 메스. 탈진한 짐승, 드러누운 여자, 내 어머니…. 

 나를 내려다보는 열두 명의 요정들, 그들은 일렬로 나란히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가장 왼쪽에 있는 요정이 입을 열었다. 한 음절도 흉내 낼 수 없는 웅얼거림. 그리고 그 옆에, 두 번째 요정이 또 웅얼거림, 기도 같은, 주문 같은. 세 번째, 네 번째… 요정들은 한 명씩 순서대로 질서 있게 말했는데,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군. 이런 경우, 나는 말을 듣고 있는 건가, 입술이 열렸다 닫히는 광경을 보고 있는 건가. 열한 번째 요정의 웅얼거림이 끝나고, 열두 번째 요정이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불쑥 끼어든 열세 번째 요정. 틀림없이 요정은 열두 명밖에 없었는데 어디서 나타난 건지는 모르겠고. 열세 번째 요정은 자정에 파견된 것이 탐탁지 않은 듯, 물론 그렇겠지, 누가 야근을 좋아하겠어, 피로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째서인지 나는 열세 번째 요정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가 한 말은 바로, 너는… 죽을 것이다. 열두 명의 요정들은 돌멩이를 삼키기라도 한 듯 사색이 되었고. 열세 번째 요정은 무덤덤한 얼굴로 사라졌다. 나는 열두 번째 요정을 바라보았다. 열세 번째 요정의 저주를 풀어 주는 것은 당신의 몫이지 않나.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그러나 열두 번째 요정은 입을 열지 않았고. 백 년 후에 긴 잠에서 깨어난다거나, 뭐 그런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아? 나는 열두 번째 요정을 채근하는데…. 

 따님입니다. 간호사가 나를 안아 든다. 아니 잠깐만요, 열두 번째 요정의 말을 못 들었다고요. 그러나 내 말은 간호사의 귀에 응앵응앵으로 번역될 뿐이라서, 나는 드러누운 어머니의 가슴에 내동댕이쳐졌다. 고개를 돌렸을 때 요정들은 이미 모두 사라졌고. 나는 절망적이고. 어머니, 저주를 받았어요, 어쩌죠? 나는 어머니의 살결에 코를 묻고 흐느낀다. 어머니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지. 귀여운 아가, 잘 자라, 우리 아가….     


 내 삶의 기억과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를 엮어 쓰고 보니, 모두가 아는 이야기 속에 잠입해 여기저기 지문을 남겨 놓은 것 같은, 그래서 후대에 전해질 보편적인 이야기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요정들로부터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받으면서 태어나서, 유치원에서 생일 파티를 하던 날에는 키 큰 왕자님의 꾐에 빠져 그를 따라갔는데, 갑자기 왕자님이 끈적거리고 지저분한 개구리로 변신해 나는 신고 있던 유리 구두를 벗어 던져 그를 몰아냈고, 집으로 돌아와서 조금 훌쩍이다가 처마 밑에 둥지를 튼 새끼 제비의 다리에 밴드를 붙여 주었는데, 그 대가로 군부독재가 막을 내렸지만 우리 집 살림살이는 크게 나아지지 않아서…. 나는 그런 일들이 정말로 생각이 나서 자기 전에 일기를 쓰듯이 「계속되는 자서전」을 써 내려갔다. 그러나 에피소드가 이어질수록 내 경험과 기존의 작품을 억지로 엮어 쓰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서 파일을 닫고 멍하니 책상에 앉았다. 책장에 꽂힌 로버트 쿠버가 자기 작품을 읽어 보는 것이 어떠하겠냐는 듯이 헛기침을 해 댔다. 그래, 뭐 까짓것 어려울 것도 없지. 로버트 쿠버가 쓴 『잠자는 미녀』를 펼쳤다. 소설 속에서 잠자는 미녀는 계속해서 꿈을 꾸었고, 덤불을 헤치는 왕자는 영원히 성에 도달하지 못하였는데, 미녀의 꿈과 왕자의 모험은 시작부만 서로 다른 버전으로 영원히 반복되었다. 이 작품이 되게 좋지는 않지만 나쁘지도 않다는 생각은 그러고 보니 내가 쓴 것도 되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는 예상치 못한 생각으로 이어졌고, 이상한 에피소드를 빼고 새로운 에피소드를 꾸며 쓰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알 수 없는 희망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기까지 했다. 그래서 파일을 다시 열었고 에피소드를 몇 개 더 썼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다시 자신이 없어졌고, 이번에는 진짜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 같아서 날름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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