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희는 아무 말 없이 수염을 쏘아보았다. 미사일이 힘없이 격추되어 테이블 위로 우수수 쏟아졌다. 그러나 울리희는 수염의 도발을 너그러이 수용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그러니까 울리희는 정말로 있지도 않은 정자를 기증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었다!
울리희의 뒤늦은 자각과는 별개로 울리희가 정자 기증을 열렬히 원한다는 사실은 아주 논리적인 현상이었다. 울리희의 해석에 따르면 조너선 메이어르의 연쇄적인 정자 기증은 시대정신을 담고 있었고, 조너선 메이에르와 울리희는 동시대를 살고 있으므로, 마침내 3단 논법에 따라 소크라테스가 죽듯이, 울리희 역시 정자를 기증하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욕구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울리희는 숨이 멎은 듯 멍한 얼굴로 가만히 수염을 응시했다. 그러고서는 마음속으로 있지도 않은 정자를 기증해야겠다, 는 문장을 반복해서 읊조렸다. 그러자 배꼽 부근에서 뜨거운 마그마 같은 것이 끓어오르는 느낌이 드는 것도 같았다.
그 마그마를 이루는 입자는 물론 정자일 것이었다. 그리고 울리희는 이 정자에 대한 고대로부터 온 소식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 정자에 호문쿨루스(극미인)라 이름 붙은 극소한 크기의 인간들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5) 정자는 호문쿨루스를 무사히 난자까지 운반하는 임무를 맡고 있으며, 난자는 호문쿨루스에게, 그러니까 크기가 작을 뿐인 온전한 인간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맡는다.
울리희는 어떻게 해서든 정자를 기증할 것이다. 그래서 극미한 자기 자신을 시원하게 방출할 것이고, 극미한 울리희는 혈기 좋게 성장할 것이다. 울리희가 작은 울리희들이 성장하여 세계로 뻗어나가는 광경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있을 때, 수염은 울리희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수염은 격추된 미사일이 떨어진 테이블을 괜스레 티슈로 닦으면서 자신을 쏘아보던 울리희의 시선이 점차로 몽롱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수염과 울리희 사이에 놓인 팽팽한 침묵이 수염의 폐를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수염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러고는 이 고밀도의 침묵에 균열을 내기 위한 아무 말을 내뱉어 보기로 했다.
수염이 선택한 아무 말에는 오늘의 기온과 습도, 소시지의 질감, 맥주가 소변으로 변환되는 속도 같은 것 등이 있었으나 무엇보다도 수염의 혓바닥을 오래 잡아둔 것은 가속주의였다. 수염은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적 실천, 그러니까 일상적인 사보타주와 탕비실 횡령을 울리희가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자신이 얼마나 마르크스주의적인지를 증명하려고 애썼는데, 가속주의를 떠들어대는 것도 그러한 증명의 일환이었다.
수염이 내뱉은 아무 말들은 울리희의 귓바퀴를 맴돌며 침입의 기회를 살폈다. 그러나 대부분은 울리희를 둘러싸고 있는 호문쿨루스 방어 체계를 뚫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운이 좋은 몇몇 구절들이 용케도 살아남아 울리희의 고막에 당도하였는데, 공교롭게도 그 구절들은 울리희가 마침내 결단을 내리도록 이끌었다.
5) “…극미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피부, 모발, 지방, 근육, 정맥, 동맥, 인대, 신경, 연골, 뼈, 골수, 뇌, 분비선, 생식기, 체액, 관절로 되어 있으며,―말 그대로 영국의 대법관 나리만큼이나 활동적이며, 그에 못지않은 우리의 동포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극미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득을 볼 수도, 손해를 입을 수도 있으며…”
『트리스트럼 섄디』, 로렌스 스턴. 문학과 지성사. 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