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너선 메이어르의 새로운 유토피아에 대하여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 지난 세기에 인류가 집합적으로 꾸었던 꿈―공산주의 유토피아라는 꿈을 영화화하려고 했다면, 조너선 메이어르는 개개인이 각자 고립적으로 꾸는 꿈―자기실현이라는 꿈을 물질화해냈다고 말할 수 있다.
자기실현이라는 이상은 나르시시즘의 전장에서 승리하려는 꿈으로, 마침내 자기 자신을 세상에 증명해내기 위한 끊임없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자본이 제 몸을 불리는 가치 증식의 순환을 계속하는 것처럼 절대로 끝나지 않는데, 왜냐면 자기 증명은 거듭되는 자기 생산과 자기 증식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장이 정체되면 사회 경제적 시스템이 위기를 맞는 것처럼, 나르시시즘의 사회에서 자기 생산과 자기 증식의 공정이 멈추면 자기의 유토피아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게 된다.
바로 여기서 조너선 메이어르의 탁월함이 빛을 발한다. 조너선 메이어르가 자기 증명의 수단으로 선택한 연쇄적 정자 기증은 생물학적인 자기 생산으로, 자신을 대량 생산하기 위한 포드주의적 책략이다. 그 결과로 조너선 메이어르는 550번의 자기 복제라는, 그 어떤 권력과 부를 거머쥐었던 인류도 차마 가닿지 못한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그가 만든 자기의 유토피아는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으며 더 많은 복제와 증식을 계속해 나갈 뿐이다.
과연 기다림이 길수록 유토피아는 더 나아진다.4)
2) 조너선 메이어르의 혁명적 예술에 대하여
조너선 메이에르의 연쇄적 정자 기증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찍지 못한 영화만큼이나 혁신적인 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스케일의 측면에서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은 조너선 메이에르를 따라올 수 없는데, 왜냐면 에이젠슈테인은 기껏해야 자신이 만든 세트장에서 혹은 섭외한 장소에서 영화를 찍었을 뿐이지만, 조너선 메이에르로 말할 것 같으면 전 세계를 배경으로 실시간으로 영화를 찍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조너선 메이에르가 찍고 있는 영화의 배우들은 메이어르의 정자로 수태된 550명의 자녀로, 캐스팅은 그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이루어졌으며 그들이 사는 삶은 그대로 영화가 된다. 그는 역사상 존재했던 그 어떤 감독보다도 많은 영화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데, 적어도 550편의 영화가 촬영과 상영을 동시에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조너선 메이에르가 이전에 존재한 적 없는 혁명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연출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배우들에게 아무런 디렉션을 주지 않고 그들의 좌충우돌을 그저 내버려 두는데, 왜냐면 시나리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심지어 배우들은 자신들이 캐스팅되었다는 것조차 감독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 배우들은 그저 자신의 삶을 살 뿐이지만 그들의 삶은 그 자체로 조너선 메이어르에 의해 기획된, 라이브로 진행되는 총체적인 영화 예술의 일부가 된다.
만약 조너선 메이에르가 마음을 바꾼다면 다른 방식으로 영화가 연출될 수도 있겠다. 아니 어쩌면 그는 현재 다른 방식의 연출을 감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자신에게 550명의 배다른 형제자매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의 주인공들에게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는 이런 카피를 쓸 수 있는, 보다 상업적인 영화로의 전환을 위해 스스로를 연쇄 정자 기증자로 고소하고 그 사실을 언론에 알리는 수작을 부린 것이다.
4)『<자본>에 대한 노트』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알렉산더 클루게. 문학과지성사. 1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