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어디 보자, 처음으로 코바늘에 걸려 나온 실오라기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었다.
에이젠슈테인은 마르크스의 시나리오에 따라『자본』을 영화화하기로 결정했다고, 작업 노트에 썼다. 그 터무니없는 발상이 울리희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울리희는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클립들을 보며 잠을 설치다가 그에 대한 오마주로 작업 노트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을 위한 노트> 라는 파일을 만들고 『자본』에 필적할 만한 저작을 영화화하는 것에 대한 노트를 쓰려고 한 것이다. 울리희는 공란을 채울만한 이런저런 저작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그 어떤 것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울리희에게는‘마르크스’같은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공산주의 유토피아(라고 그때만 해도 믿었던) 소비에트에 살았던 에이젠슈테인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신앙이었으나, 소비에트와 함께 이데올로기도 유토피아도 모두 다 멸망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울리희에게는 그 어떤 신앙도 없었다.
『율리시스』의 기법으로 영화를 찍겠다는 에이젠슈테인의 기획은 기존의 영화 예술을 파괴하고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구축하려는 것이었으나, 울리희는 작업 노트를 쓰려고 했을 뿐 영화를 찍을 생각은 없었고 더군다나 혁명적인 예술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결국 에이젠슈테인을 모방하여 작업 노트를 쓰려던 울리희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 실패와 함께 울리희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기획에 자신이 매료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었다. 세상은 빠르게 돌아갔고 울리희의 관심을 잡아끄는 것은 너무나도 많았다. 그러니까 550 명의 자녀를 둔 정자 기증 왕, 조너선 메이어르의 소식이 불현듯 날아와 울리희의 위장을 들쑤시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래서 다음에 끌려온 실오라기는 조너선 메이어르였다.
울리희는 조너선 메이어르가 에이젠슈테인의 기획을, 고대로부터 온 것처럼 아득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실패한 기획을, 완전히 새로운 개념과 도구로 부활시켰다고 결론지었다.
여기서 울리희는 더부룩한 속을 가라앉히려 코바늘로 손을 따고 다시 한번 트림을 했다. 그러고는 코바늘을 바싹 움켜쥐고 눈을 가늘게 떠 본격적으로 바느질에 집중할 태세를 취했다.
그러니까 조너선 메이어르는 나르시시즘이라는 개념과 유전 공학이라는 도구로 예술이라는 분과를 완전히 새롭게 정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