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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Sep 10. 2024

예술분과로서의 나르시시즘(7)

그래서 난자가 필요해. 있지도 않은 난자 말이야.


울리희가 열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수염은 몸을 뒤로 빼 등을 의자 등받이에 바짝 붙였다. 울리희가 수염의 손을 끌어당겼다. 수염은 엉거주춤 팔꿈치를 테이블에 기댔다.


내 것을 원하는 거야? 그러니까 나의 난자를? 있지도 않은?


수염이 아리송한 말투로 물었다.


응. 나는 너의 있지도 않은 난자를 원해.


울리희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서 뭐 실제로 아이가 생긴다고?


수염은 물음표 모양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렇다니까.


울리희는 맥주잔을 들어 수염의 잔에 부딪혔다.


하지만 난 아직 아이를 만들 생각이 없어.


수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관없어. 어차피 내 아이니까. 넌 그냥 내 호문쿨루스에 영양분을 공급해 주기만 하면 돼. 내 아이를 잠시 맡아 둘 인큐베이터 같은 게 되는 거지. 그러니까 두려워할 것 없어.


울리희는 수염의 손등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울리희의 말이 모욕적으로 들릴 수도 있었겠으나 수염은 그렇게 듣지 않았고, 다만 허구의 정자가 허구의 난자와 만나 실재하는 아이를 만드는 그림을 그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네 있지도 않은 정자가 내 있지도 않은 난자와 어떻게 만나는데?


수염이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울리희의 입에서 막힘없이 답변이 흘러나왔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해 두기라도 한 것 같았다.


두 가지 방법이 있어. 하나는 내가 있지도 않은 정자를 있지도 않은 정자은행에 기증하는 거야. 그러면 너는 그 있지도 않은 정자은행을 통해서 내 있지도 않은 정자를 기증받을 수 있어. 그렇게 해서 나의 있지도 않은 정자는 너의 있지도 않은 난자와 있지도 않은 정자은행의 있지도 않은 시험관에서 만나는 거지. 다른 하나는 중간 유통 단계를 생략하는 거야. 있지도 않은 정자은행을 거칠 필요 없이 내 있지도 않은 정자를 네 있지도 않은 난자에 다이렉트로 쏘아주는 거지. 말하자면 아주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는 거랄까.


수염은 눈알을 곰곰이 굴리며 ‘있지도 않은’이 만들어내는 굴곡진 논리를 좇았다.


그래서 너는 어느 쪽을 선호하지?


울리희가 물었다.

물론 수염은 중간 유통 단계를 생략하는 쪽을 선호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중간 유통이 길어지면 일이 복잡해지고 비용이 많이 들고 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울리희의 있지도 않은 정자가 수염의 있지도 않은 난자에 도달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울리희와 수염은 기능적이고도 효율적인 편이었다. 

울리희는 자신의 있지도 않은 정자가 수염의 있지도 않은 난자와 결합하여 수염의 있지도 않은 자궁에 착상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세 번의 ‘있지도 않은’이 작동하여, 부정과 부정과 부정이 결합하여 허구성이 상쇄되지 않으므로, 그래서 이중 부정의 마법이 깨지므로, 고쳐 생각해야 했다.

 

그러니까 허구적 정자는 허구적 난자와 결합하여 허구적 자궁에 허구적으로 착상한다. 


이렇게 해서 네 번의 허구가 작동하게 되었고 그 결과 허구성이 완전히 상쇄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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