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은 우크라이나의 도시로 집중되고 있으며 국경을 넘어 우크라이나를 떠나는 피난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1986년 원전 폭발로 막대한 피해가 일어난 체르노빌 도시가 있는 나라로 접근하면 이해가 빠르다.
유럽 동부와 러시아 국경에 위치한 동유럽 국가로 우크라이나는 유럽 전체에서 영토가 가장 넓은 나라이며 밀, 옥수수, 보리 등 곡류 생산량이 많고 천연광물이 풍부한 나라이며 한국과는 1992년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3만 명이 넘는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어 한국문화, 한국음식 등 정서적으로 한국과 친숙한 나라이며 여성 검찰총장부터 밭을 가는 여자가 김태희이고 소를 모는 여자가 한가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녀가 많은 나라로 유명하다.
특히 동유럽의 한류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K-Pop과 한국영화, 한국 드라마의 인기가 매우 높고 2010년에 시작된 K-Pop 동호회가 현재 70여 개로 증가한 상황은 우크라이나 젊은이들에게 한국문화의 호감도가 매우 높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카르파티아(Carpathia) 산맥 북부지역에 슬라브 민족이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이동하다 7세기경 드니프로(Dnipro) 강 서쪽 지역에 동슬라브 민족이 정착하고 9세기에 동슬라브 민족의 최초 봉건국가인 키에프 공국(Kyiv Rus)을 세운다.
지금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프를 중심으로 북부 발틱 해에서 남부 흑해, 동부 볼가(Volga) 강에서 서부 티사(Tisa) 강에 이르는 지역이 키에프 루스의 영토이고 9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초반까지 200여 년간 키에프 공국은 봉건국가로서 발전을 거듭하였으며 블라디미르 대공 (Volodymyr the Great980~1015) 때에는 그리스 정교회를 수용하고 비잔틴 문화를 받아들이며 가톨릭 국가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블라디미르 대공이 사망한 후 12형제간의 권력투쟁이 벌어졌으나 야로슬라프 (Yaroslav the Wise 1036~1054)가 왕위에 오르면서 키에프 공국의 전성시대가 이어지지만 키에프 공국은 1223년부터 3차례에 걸쳐 몽골 타타르족의 침입을 받았고 1240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멸망한다.
몽골 지배 이후 많은 인구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북부로 이동했지만 울창한 산림 속에 있던 소공국 모스크바는 몽골군의 침입을 피할 수 있었으며 모스크바 지역을 중심으로 상업과 교통의 요지로 발달하였고 러시아는 키에프와는 다른 왕조를 세우고 후에 거대한 러시아로 부상한다,
이후 2세기에 걸친 몽골의 지배 하에서 우크라이나 영토의 대부분은 14세기 중반 이후 리투아니아, 폴란드, 터키, 몰도바에 의해 분할되었고 1569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합병으로 드니프로 강 서쪽은 폴란드에 귀속된다.
우크라이나는 오랜 기간 동안 몽골,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지배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고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을 3대 동슬라브 민족이라 지칭한다.
우크라이나와 구소련의 갈등은 17세기에 이르러 심화되기 시작했고 1922년 소비에트 연방이 수립되면서 주변 많은 국가들이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합병되었으며 우크라이나도 소련에 편입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국민 대다수가 소련에 합병을 거부했기 때문에 스탈린은 우크라이나를 억압하는 정책을 폈고 소련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우크라이나의 농작물을 약탈해 소련으로 가져갔으며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주민 390만 명이 기근으로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러한 소련의 차별적 정책 때문에 우크라이나 국민의 반 소련적 정서는 깊어 갔다.
우크라이나는 수도 키에프가 위치한 드네프르강을 경계로 서쪽은 친 유럽 성향, 동쪽은 친 러시아 성향으로 나누어지는데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우크라이나가 완전한 독립을 했지만 우크라이나에는 러시아인들이 17%가 살고 있었고 연결된 국토로 인해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러시아 국경 근처에 위치한 돈바스 지역은 매장된 천연광물이 풍부해 광업, 공업 시설이 대규모로 들어서면서 러시아계 사람들이 이주하기 시작했고 러시아 언어를 사용하는 러시아인들이 살게 되었으며 우크라이나 말을 쓰고 공업 현장에 속하지 않은 우크라이나인들은 대부분 서쪽에 거주했다.
북대서양 조약기구 나토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는 1948년 구소련의 세력 확대와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을 주축으로 유럽 연합이 결성한 군사동맹이고 냉전시대 1955년에 나토에 대응하기 위해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기구 WTO(Warsaw Treaty Organizaion) 소련권 군사동맹을 결성한다.
동서독 붕괴 후 1990년에 동, 서독 대표와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가 모여 독일 문제를 논의하는 회담에서 나토는 더 이상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구두로 소련 측에게 전달한다.
다음 해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사회주의가 무너지자 자연히 바르샤바 조약 WTO도 해체되면서 WTO에 가입했던 동유럽 국가들은 나토에 가입하기 시작했고 우크라이나도 나토에 가입을 희망하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게 경제제재를 시작했으며 우크라이나는 핵보유국이었지만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통해 안보 보장과 경제 지원을 받는 대가로 핵을 포기한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야누코비치가 유럽연합(EU)과의 무역협정을 무기한 연기하고 금융지원을 약속한 러시아로 돌아서자 2013년 유로마이단 시위가 일어났다.
유로마이단은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면서 시위는 과격화되며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국제사회의 비난이 커지자 우크라이나 의회의 가결로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탄핵되고 러시아로 도망친다.
이후 친 서방 정권이 들어서지만 유로마이단 시위는 크림 반도 합병과 돈바스 내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크림 반도는 러시아 지역에서 유일하게 겨울에도 얼지 않는 연안과 항구가 있어 흑해를 통해 지중해와 대서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러시아의 가스관이 연결된 통로이다.
크림 반도는 원래 러시아의 영토였으나 구소련 시절 우크라이나 영토로 귀속이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소련 붕괴 이전부터 크림 반도를 되찾고 싶어 했으며 크림 반도는 러시아인 58%와 우크라이나인 24%가 살고 있었다.
푸틴은 이러한 인구 비율을 이용해 흑해 함대의 관할권을 놓고 갈등을 벌이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무력으로 점령한 후 96.6%의 찬성투표를 통해 크림 반도가 러시아에 합병되지만 부정 선거였기 때문에 유럽연합과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는 크림 반도의 러시아 합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크림 반도를 차지한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영토로 만들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해 왔는데 현재에도 친 서방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 러시아 돈바스 반군의 내전이 계속되고 있으며 러시아의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서방 유럽의 영향권에서 나토의 군대와 러시아 국경을 마주하는 상황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우크라이나는 세계 3대의 곡창지대이며 체르노젬(chernozem)이라 불리는 지구 상의 비옥한 흑토 25%가 있는 토지로 엄청난 밀을 생산하고 석탄과 철 외에 광물자원이 풍부한 나라이기 때문에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하려는 야욕은 경제적 이익 또한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는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을 개시했고 블라디미르 렌젠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범죄 행위에서 대량학살의 조짐이 보인다.”며 "전 세계는 러시아의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의결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촉구했으며 조 바이든 대통령은 유럽연합(EU), 영국, 캐나다, 일본, 호주 등 동맹국과 함께 2022년 2월24일 첫 번째 러시아 제재안을 발표했고 유럽연합(EU)도 대 러시아 제재안을 채택했다.
브렉시트를 선언하고 유럽연합을 탈퇴한 영국도 고강도의 강력한 비난을 러시아에 쏟아부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 장관은 우크라이나를 방문해 렌젠스키 대통령을 만났고 조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가 더 이상 달러를 결제할 수 없을 것이라 경고했으며 미국과 프랑스 등 6개국 정상은 러시아를 은행 국제결제망에서 퇴출하고 SWIFT 전산 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는 강력한 금융제재를 시행하겠다고 선언했다.
러시아에서 대량의 천연 가스를 수입하는 독일은 우크라이나 사태에 소심했지만 독일도 우크라이나에 전차 1000대와 미사일 500기를 지원했고 네덜란드, 프랑스, 체코도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기로 결정했으며 미국은 다시 3억4천만 달러의 추가지원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현재 우크라이나 도심 곳곳에 러시아의 미사일과 포탄이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내리 꽂히고 있으며 첨단 미사일 공격이 계속되고 민간인 지역 폭격, 민간인 사망자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벌써 1,000 명 이상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으며 우크라이나 지하철역은 거대한 반공호가 되었고 폭격을 피해 시민들은 보이는 지하로 무작정 들어가고 있다.
국경검문소 근처로 피난하는 행렬과 우크라이나 가족을 맞이하려는 주변 국가 가족들이 몰려드는 반면 걸어서라도 조국을 지키려 우크라이나로 다시 들어가는 젊은이들의 행렬도 이어지고 있다.
13만 명이 넘는 우크라이나 국민이 민병대에 지원하고 있으며 열약한 환경에서도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손수 화염병을 만들고 전직 대통령 페트로 프로센코 대통령도 소총을 들고 방위군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나토가 동진을 멈추겠다는 계약을 먼저 위반했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게 수천만 달러의 지원을 해 주었지만 러시아를 배신하고 우크라이나는 나토에 가입하려 했다는 목소리를 높이며 우크라이나 침공은 나토의 위협에 대항한 정당한 러시아의 안보 행위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전쟁은 이미 터졌고 서방 유럽 국가 나토 동맹국들은 뒤늦게야 지원을 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국은 아니기 때문에 현재 동맹국으로 직접 참전은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우크라이나의 절박한 사태는 과거 중국, 러시아와 미국 사이에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로 분열돼 피를 흘려야 했던 한국전쟁을 연상하게 한다.
하루빨리 전쟁은 멈춰야 하며 무고한 생명이 살육되는 참상은 막아야 한다.
조선일보 A1 헤드라인에 “美, 러시아 제재 한국만 빠졌다 “는 기사가 첫면을 장식을 했다.
러시아와 거래를 하는 한국기업의 입장도 배제할 수 없지만 정치적 입장으로 이쪽저쪽 눈치 보며 시간 끌지 말고 동맹국과 함께 전쟁을 중지하기 위해 OECD 가입국으로서 한국 정부도 하루빨리 국제적 협력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모든 국가와 국제사회의 강력한 지원과 제재를 통해 러시아 푸틴의 만행을 제지하기 위한 전 인류의 힘을 모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