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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 Jan 03. 2023

긍정의 희망 의미 부여

가치 창조

심리학에서는 구조화되고 정형화된 삶의 방식에 의미를 부여하고 긍정적 작용을 보다 활발하게 하기 위한 자극적 기법을 의미 부여라고 한다.

현대 사회는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일률적인 스케줄을 따르고 업무는 다르지만 반복되는 생활을 바쁘게 살고 있다.

서로 다른 개체로 구성된 사회이지만 획일화된 생활 방식에 맞춰야 하는 정형화된 구조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직장에서는 상하 관계의 질서에 따라 상부의 지시가 직책을 거쳐 내려오고 사업도 역시 갑과 을의 관계가 존재한다.

어느 사회나 동일한 조직 체계이며 그 구조에 적응하지 못하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정형화된 일반적인 일상에서는 승진이나 매출 상승이 아니라면 변화 없는 생활이 지속된다는 뜻이고 거기에 삶의 질을 위한 문화생활이 추가되지 않으면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매일 꼭 같은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부터 산에 오르고 보다 나은 삶을 기대하며 새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은 자신이 만든 계기를 통한 긍정적인 의미이고 변화를 위한 의미 부여이며 생일이 되면 나이 한 살 더 먹는 것에 축하를 하고 파티를 하는 것도 긍정적인 의미 부여이다.

가령 나쁜 일이 생겼을 때 그 일을 계기로 좋은 변화가 있을 거란 희망을 갖는 것도 긍정적 의미 부여이지만 부정적인 일을 기회로 반대의 상황을 기대하는 것은 역기능의 자극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합리화나 승화도 당연한 의미 부여이고 변화를 위한 자극은 모두 의미 부여란 관점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우리가 속한 사회는 자의든 타의든 연결된 관계를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자신의 고유한 삶의 의미에 외부의 영향을 받게 되면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며 그것은 지금 보다 더 나은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30이 넘으면 변화를 싫어하고 안일한 습관에 젖어 버리는 본능이 있다고 한다.

익숙해진 생활이 편안한 것이고 힘들게 적응한 환경에 자신이 맞춰졌기 때문이며 나이가 들수록 이런 심리는 강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편한 것에 대한 애착은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위험도 있다.

지금 현재에 만족하며 정해진 행동반경, 자신이 만든 구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매너리즘(mannerism)과 연관시킬 수 있으며 매너리즘은 반복적인 일이나 생활에 익숙해지면 시작할 때의 의욕이나 적극적인 성향, 창의성이 없어지고 변화를 싫어하게 되는 부정적인 상황을 말하며 심하면 슬럼프(slump)와 의욕상실로 발전하기도 한다.

감성에 의해 행동하고 좋아하던 것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되며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고 회의감이 드는 상태를 말하는데 반복적이고 변화 없는 업무와 생활을 지속적으로 하는 직장인에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젊을 때나 연애를 할 때는 계절이 바뀌면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여행도 자주 가고 즐길 것도 많다.

영화 개봉작은 극장에 가서 꼭 보고 신간 서적이 나오면 아무리 바빠도 읽어야 하며 유행에 민감해서 쇼핑도 자주 하던 라이프 스타일이 사라지고 나이가 들면서 일이 끝나면 집에서 TV나 보고 움직이는 게 싫어지게 된다.

그러면서 흔히 "나이 들면 다 그렇지 뭐, 우리만 그런 게 아니야." "우리가 몇 살인데 들처럼 그렇게 해야 돼?"라고 합리화를 하면서 스스로 진짜 꼰대가 되는 상태를 매너리즘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든다고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확률이 높은 것만은 아니고 반복적인 생활패턴과 수동적인 업무와 생활의 권태감이 지속될 때 일어날 수 있는 증상이므로 편한 것만 추구한다는 것은 적극적인 생각과 행동을 차단하는 좋지 못한 습관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이런 상황이라면 뭔가 변화를 추구하기를 원하는데 더 나아지기 위한 자발적 자극이 의미 부여이고 긍정적인 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의미는 애써 찾으려 노력하고 억지로 갖다 붙이는 것을 의미 부여라 할 수는 없으며 의식적으로 없는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는 노력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자신이 처한 현실과 거리가 먼 이상을 강하게 추구하며 이상을 현실로 의미를 부여하고 생활한다는 것은 동일시(identification) 현상이며 모순일 뿐이다.

그리고 사실은 그게 아닌데 스스로 만든 의미가 형성되지 않고 현실과 기대의 간극이 벌어지는 것을 실감하게 되면 누구나 실망과 자책을 하게 되며 이전의 생활 보다 더 큰 좌절감에 빠질 수 있다.

지금 보다 더 나은 삶을 원하는 것은 당연한 긍정적 마음이고 미래 지향적 사고이지만 자세히 보면 삶의 의미는 반복되는 우리네 일상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위하여'를 외치며 건배를 하는 것은 습관이라 해도 표출되는 강력한 의미가 포함된 행위이고 공식 석상에서 상을 받는 수상자에게 주는 박수 세례 또한 축하를 더하는 의미 부여이다.

그리고 아프거나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으며 따뜻한 위로를 전달하는 행위는 회복을 기원하는 가장 최선의 의미 부여라 할 수 있다.

살다 보면 좋은 일, 궂은일 순서 없이 마주치며 꼭 같이 반복되는 생활을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보람과 만족이 다름 아닌 삶의 의미이며 특히 불행이 닥칠 때 반대의 현상을 바라는 역기능의 자극도 때로는 심리적 안정에 도움이 되는 유용한 의미 부여이다.

옛말에 좋은 일은 나눌수록 커지고 나쁜 일은 나눌수록 작아진다는 얘기처럼 어떤 상황이든 긍정의 기대를 희망하는 마음이 의미 부여인 것이다.


이제 새해가 밝았다.

지난 과거의 궂은일과 상처도 아픔도 다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이라면 새로운 의미는 벌써 부여한 것은 아닐까 여겨진다.


그러나 진정한 삶의 의미는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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