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그래도 아빠가 미안해~
4월12일 토요일
오랜만에 일정이 없는 토요일이다.
초5 아들도 일정이 없다.
아내만 교회에 식사 봉사를 하러 낮 시간에 집에 없다.
외동이라 뭔가를 해야 한다. 아니면 어디라도 가야 한다.
서서히 강박이 찾아올 즈음, 뇌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 "야구장에 가자"
프로야구 일정을 검색했다. 집이 성남이라 잠실, 목동, 수원, 인천 모두 가능.
응원하는 팀은 한화, 기아, 두산, 롯데, ssg. 우리나라 구단의 절반을 응원하고 있다.
오늘은 아들이 유일하게 응원하는 삼성팀의 수원 경기가 예정되어 있었다.
높아진 야구 열기에 시즌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표가 있을까 하고 검색했더니, 웬일! 원정 응원석 앞자리에 표가 있다. 수원구장은 처음이라 주차를 검색하였더니 사전 예약시스템이다. 실패. 수원까지 대중교통으로 1시간 30분이 나온다. 대기 시간을 합치면 2시간이 되겠지만 올 시즌 첫 관람이라 백번 감당할 수 있다.
버스 대기 시간이 길었지만 아이도 신났다. 시즌 시작 전에 미리 주문했던 삼성 유니폼을 입고 한껏 들뜬 모습이다. 아이나 어른이나 기대감은 피로를 잊게 한다. 버스에서 오늘의 선발 투수와 그동안의 기록들을 점검하며 오늘 경기를 함께 예상했다. 아직 아기 같이 느껴지지만 어느덧 이렇게 커서 야구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참 새롭다.
버스가 수원 구장에 도착할 때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버스 기사님! 와이퍼는 왜 작동하시는 거예요..ㅠㅠ 내 눈에도 와이퍼가 필요할 것 같은 기분이다. 버스에서 내리니 비가 온다. 강한 비가 아니라서 이 정도면 선수들 시원하고 촉촉한 상태에서 경기를 할 수 있을 거라 스스로 위로하며 빼놓을 수 없는 기념품 샵에 들러서 이것저것 구매했다.
우천 취소는 경기 시작 시간인 14시 전에 결정됐다. 씁쓸한 아이의 표정과 걸음걸이가 눈에 들어온다. 슬픔을 걸음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제는 후 폭풍을 감당할 시간이다.
"그래. 아들아! 너의 실망과 분노를 맘껏 쏟아내라. 다 받아줄게. 지금은 너의 시간이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엄청난 속도의 계산이 시작되었다.
- 이 상황을 회복할 방법은 무엇일까?
- 다른 구장의 표를 확인하고 넘어갈까?
- 기념품 샵에 다시 가서 폭풍 쇼핑으로 실망한 마음을 달래줄까?
- 여기는 수원이니 통닭거리에 가서 갈비맛 통닭의 맛을 느끼게 해 줄까?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자차로 이동할 수 없어서 모두 불가능.
에드워드 리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유명한 셰프 같다. 부디 아이의 상처 난 마음을 달래줄 맛의 치킨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유니폼을 입고 우산을 쓰며 귀가하는 사람들을 창가에서 보며 슬픔의 치킨을 뜯는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보니 조금의 위로가 되는 듯하다. 치킨은 엄청 잘 먹는다. 슬픔과 섭취는 별개인 것 같다.
다시 1시간 30분이 걸려서 귀가했다.
늘 자차로 이동을 했기에 운전에만 집중했었는데, 오랜만에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면서 아이와 손잡고 얼굴을 비비면서 너무 좋은 시간을 보냈다. 얼굴을 마주하며 오늘처럼 길게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쉽게 오지 않는데, 오늘은 그러고 보면 참 좋은 시간이었다.(조금의 자기 위로가 섞였습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던 하루였지만 욕심이 있다면 아들에게도 뭔가 느끼는 하루였으면 한다.
- 인생이 언제나 내 계획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
- 삶의 변수는 항상 존재하고 좋은 대안이 늘 있다는 것. 그것은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 발견할 수 있다는 것.
- 슬픔 이면에는 희망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