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형의 연애
첫 화
누가 먼저 연락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누가 먼저 할 것이냐에 대한 문제였다
카페에서 나와 동생을 기숙사까지 데려다주는 동안 손에는 계속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어서 동생을 데려다주고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고 있는 것이었다. 최대한 태연한 척, 아무 걱정 근심 없는 척 인자한 미소로 동생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마음에도 없는 격려와 안부를 건넸다. 자 이제 뒤 돌아 몇 발자국만 더 걷다가 전화를 거는 거야.
골목을 꺾어 들어가 동생이 나를 볼 수 없는 곳이 되자마자 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괜히 문자로 연락했다가는 언제 올지 모르는 답장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 내 마음은 여유롭게 누군가의 답장을 기다려줄 만큼 차분하지 못하다.
오랜만이네?
한 달여 만에 먼저 목소리를 낸 건 그녀였다. 어느새 우리는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가며 말하고 있었다.
“전주에는 어쩐 일이야? 이 시간에” 긴장한 티를 감추고 내가 천천히 말했다.
“파견 왔어. 비교적 짧게 한 달. 이제 다음 주면 다시 올라가”
“고생했네”
“응, 지금은 어디야? 아까는 동생?”
“응, 대학을 여기서 다닌다는데 이걸 얼마 전에 처음 들었네. 지금 시간 돼?” 어쩌면 서로가 가장 기다리고 있을 질문은 내가 먼저 하는 것으로 용기 냈다.
“지금 몇 시지? 기숙사라 너무 늦게 들어가면 안 돼서 한 시간 정도 괜찮을 것 같네” 그녀가 답했다. 그녀에게서 오는 승낙은 어떤 질문에 대한 승낙 이든 늘 반갑다.
너무하네. 대리한테 너무 무리시키는 거 아니야?
영혼 없는 나의 리액션이 이어졌다. 금방이지만 길었던 한 달간의 그녀에게 있었던 근황에 열심히 맞장구 쳐줬다. 그러나 서로가 알지 않은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이 대화의 종착역은 따로 있다는 것을. 회사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래서 지금 네 마음은 어떤 상태이며, 내가 궁금하지는 않았는지, 내가 보고 싶지는 않았는지.
아니, 어쩌면 너는 그 질문이 나오는 것만은 피하고 싶을지도 모르겠구나.
시간이 꽤나 흘렀다는 것을 그녀도 직감했는지 핸드폰을 살폈다. 어느덧 50분이라는 시간이 흘러 우리에겐 10분 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거 혹시 불편하지 않았어?” 정적이 더 흘렀다가는 이제 곧 타임아웃이 선언되어 버릴 것만 같아 그녀를 붙잡아두려는 마음에 본론으로 넘어갔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 건 그 사람의 자유니까. 하지만 내게도 같은 마음을 요구했다면 그때는 힘들었을 거야”
“너는 아무 마음이 없었어?”
“그때도 말했지만 나는 우리를 친구로 바라봤어. 마음이 생기고 싶다고 바로 생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야. 나는 시간이 더 필요해”
서로의 눈이 마주쳤고 그녀의 눈빛은 지금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해져있는 건 내 의지를 벗어나버렸어 나도 어쩔 수 없는 거라고,라는 말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왜 이 모든게 이렇게 갑자기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가, 그게 궁금해" 내가 물었다.
"갑자기라는건 없어. 그냥 내가 여유가 없어진거야. 환경이 갑자기 그렇게 되버린거구. 우리가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내가 지금만큼 바쁘지는 않았어"
"나는 그게 갑작스러웠어. 바빠졌다고 한들 이렇게까지 잠시의 틈도 안줄만큼 바빠질 수가 있을까? 없다고 하는 시간은 무엇을 위한 시간을 말하는걸까? 나한테는 어떤 설명도 없이 말 그대로 갑자기 일어나버린 일이었어"
"내가 이렇게 대하는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해봤어. 나는 만나면 그 순간에 집중했고, 네가 소홀했다고 말하는 건 그냥 우리가 떨어져있을 때의 그 시간들을 말하는거야. 그리고 나는 그 떨어져 있는 동안, 연락에 대해서도 이렇게 열심히여야 할 필요까지는 없었던 사이였다고 생각해" 그녀가 당당하게 말했다.
"말했잖아. 네가 말하는 그 이상의 관계와 마음을 바란다면 나는 더 오랜 시간들이 필요하다고. 내게 그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그녀가 이어서 덧붙였다.
시간. 그녀가 말하는 시간은 무엇일까. 그냥 이렇게 가끔 연락하고 가끔 만나는 그런 과정이 더 필요하다는 것일까? 그녀의 마음이 이 사람에게는 열어도 괜찮아,라는 안심을 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말하는 것일까? 초반에 다정했던 그녀의 모습이 생생했기에, 이러한 거리감이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도 그 마음을 이해했다. 오히려 낯선 이에게 더 다가가기 쉽다. 알아가며 가까워지게 되면, 그만큼 더 조심스럽고 마음에 경계가 드러선다.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며 다시 한번 예전 나 자신에게 건넸던 질문을 떠올린다.
그녀와 사귀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이 친구와 해낼 수 있는가? 나는 마음을 열 자신이 있는가? 어렵사리 이 친구의 마음을 얻고서 한순간에 마음을 닫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그녀가 ‘그래 이제는 좋아’라고 말할 때, 나 역시 ‘그래, 나도 좋아’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아직 이 모든 무거움을 입 밖으로 꺼내어 같이 해결해 나갈 자신이 없다. 내 손으로 너를 놓더라도, 네 발로 지쳐 떠나가는 것을 나는 아직 볼 용기가 없다.
둘은 서로 상극이네요.
언젠가 상담 선생님께서 나와 그녀의 관계를 두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와 쉽게 가까워지지 못하는 사람과 마음 주는 것이 두렵지만 한번 마음을 내어주면 그 사람에게 깊이 주려는 사람. 만약 그 사람이 마음을 열고 가까이 다가온다면 감당할 수 있으시겠어요?”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아직 누군가 만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나름 선을 그으려고 했었어. 많이 참기도 했었고”
그녀도 커져가는 자신의 마음을 경계하며 내게서 선을 그으려고 했었다. 비록 지금은 두렵고 무서운 자신의 마음에 가려져 그녀의 속마음을 내비치고 있지 않지만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녀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가를.
다시 우리 둘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에게 얼마남지 않은 시간 때문이었다.
한참 전 마지막으로 시간을 봤을 때 10분 남았으니, 이제 한 2분쯤 남았을까?
“예전에 나한테 그랬지? 자주 출장 가는 여의도에 꼭 날 데려가고 싶은 식당이 있었다고. 가끔 여의도를 지나갈 때면 주변을 둘러보고 생각해. 어딜까, 언젠가 이 근처를 같이 와서 가고 싶었다는 그 식당에 가보는 건가, 하고 말이야” 그녀가 말했다.
“맞아, 그 식당 초대권이 있어서 초대권 사용 기한이 지나기 전에 같이 가고 싶었어. 마땅히 같이 갈 사람도 없고 해서. 이제 한 2주 남았으려나?”
“나도 이번주에 서울 올라가는데. 이번 주말에 가보는 건 어때?”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하는 그녀를 나도 응시했다. 지난달 이맘때쯤 나는 그녀의 연락을 기다렸다. 답장이 오는 데까지 걸리는 긴 시간 탓에 답답한 마음을 한가득 안고 있었음에도 전혀 힘든 티를 내지 않았다.
얼굴 보는 것은 더 힘들었다. 내게 거리를 두는 것이라 확신했다. 만남 초반에 느껴졌던 나에 대한 호기심과 긴장은 모두 사라지고 무언가로부터 겁을 느낀 것 같았었다.
“우리… 다음에 가자.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녀 손을 꼭 잡고 내가 대답했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거절했다.
한 달이라는 공백이 있었음에도 이렇게 다시 보니 너무 좋다. 내게 납득되지 않는 답을 주지만, 그럼에도 좋음은 어쩔 수 없다. 지금 좋아하는 이 감정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다. 이 친구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묻어나오는 진심과 책임감 그리고 내가 말하기도 전에 나의 감정을 먼저 알아차려주는 공감력까지, 위로받고 싶고 기대고 싶어 하는 나의 결핍을 안아줄 수 있는 사람으로서, 내가 간절히 바래왔던 사람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도 그녀도 서울에 올라가 다시 만남을 이어간다면 머지않아 서로를 향한 지금의 이 마음은 금세 변하고 나도 그녀도 서로를 밀어낼 수밖에 없는 마음의 불안으로 힘들어할 것을 잘 알고있다. 또다시 그 힘든 시간은 그때와 변함없이 반복된다. 연락하고 좋아하고 겁을 먹고 떨어진다.
훗날 우리 중 누군가는 먼저 연락을 시도해 볼지도 모른다. 그게 한 달 후가 될 수도, 반년 후가 될 수도 있다. 사람 일은 모른다. 자존심 부리며 끊은 연락이 평생의 단절이 될 수도, 평생 끊고자 했던 단절이 잠깐의 떨어짐이 되기도 하니까. 그러나 만약 이것이 영원한 안녕이 된다면, 이 만남은 또다시 안겨준 수많은 상처들 중 하나로 기억될까, 아니면 처음으로 상처 주지 않고 웃으며 헤어진 기억으로 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