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번째 푸른 봄
어둠을 태우는 붉은 불꽃을 봤을 때는 꿈을 꾸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점점 살갗 안으로 타들어 가는 연기를 보며 곧 현실임을 직감했다. 광철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옆에서 입을 벌리며 깊은 잠에 빠진 영순의 뺨을 연신 때렸다.
“영순아, 양영순! 얼릉 일어나부러라, 큰일 났다 아이가!”
광철의 다급한 외침에 영순도 실눈을 떴다. 그러다 이내 매캐한 연기를 들이마시고 콜록거리며 정신을 차렸다. 영순은 이내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돌아보니 복도 저편에서 거센 불길이 치솟으며 통로가 막힌 상태였다.
“오, 오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우리 이제 어떡해?”
“일단 저짝으로 가보자잉! 얼른!”
광철은 영순의 손을 잡고 아직 불길이 퍼지지 않은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두 사람이 극장 전체가 화마 속에 삼켜지고 있다는 걸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화재가 시작됐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거대한 불길 속에 극장 전체가 집어삼켜 가는데 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어, 어떡해? 우리 죽는 거야? 이, 이렇게?”
“그런 거 아이다, 정신 좀 똑디 차려라잉!”
그들에게 거리를 좁히며 거세게 다가오는 집채 만 한 화마 속에서 영순은 죽음을 직감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광철은 자신이 입고 있던 두터운 점퍼를 벗어 체구가 작은 영순을 감싸고 안아 들었다. 영순이 두려워하지 않도록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그대로 내달려 굳게 닫힌 창가로 몸을 던졌다. 그 충격에 창문이 산산조각이 나고 두 사람의 몸은 공중에 떠올랐다. 2층에서 몸을 내던졌으니 곧 그대로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리라 직감했지만 의외로 낙하의 충격은 크지 않았다.
“야, 너 괜찮냐? 눈 좀 떠봐라잉!”
“여그 사람 떨어졌당께! 얼른 구급차 좀 불러라잉!”
어느 새인지 출동한 소방대원들이 그들을 아래에서 받아준 덕분이었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인 새벽인데도 갑자기 발생한 대형 화재에 소방대원들이 진압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일부 시민들도 잠에서 깬 채 황망한 얼굴로 나와 현장을 에워싸고 있었다. 연기를 깊이 들이마신 영순은 소방대원 품에 안겨 병원으로 실려 가면서 흐려지는 의식 속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부서져 가는 광주극장을 두 눈가에 담았다.
그렇게 일제 강점기였던 1935년 광주 최초 조선인 대상 극장으로 설립돼 33년간 다양한 영화를 상영하고 다양한 공연을 개최하며 문화의 중추적 역할을 맡았던 광주극장은 1968년 1월 18일, 무대 뒤편에서 발생한 원인 불명의 화재로 잿더미가 됐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불길과 싸워 간신히 살아남은 영순과 광철은 기절한 채로 인근에 있는 전남대학교병원에 나란히 실려 갔다. 목숨에 지장이 있던 건 아니었으나 연기를 꽤 깊이 들이마셔 의식을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병실에서 두 눈을 뜬 영순의 두 눈에는 자신이 죽은 줄 알고 눈물을 훔치던 가족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영순이 정신을 차리자 가족들은 모두 울음을 터뜨리며 하느님과 부처님을 찾아 감사드리며 그녀를 얼싸안았다. 필호는 병실 한구석에 서서 두꺼운 잠자리 안경을 벗은 채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으으…. 숨 막혀…! 이것 좀 놔 줘…!! 컥컥. 근데 광철 오빠는 어떻게 됐는지 알아?”
“광철 오빠? 그게 무신 소리여? 그게 누구당가잉?”
그제야 영순은 광철과의 인연을 가족들에게 털어놓았다. 광철은 영순보다도 먼저 눈을 떠 옆 병실에서 몸을 회복 중이었다. 광철은 침대 위에 환자복을 입은 채 앉아 있었고 그 옆엔 광철 어머니 영이 앉은 채 사과를 과도로 깎고 있었다. 그 순간 영순이 필호와 함께 병실을 찾아왔다.
“광철 오빠!”
“영순아!”
활짝 웃으며 광철을 찾아온 영순을 보고 메말랐던 광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영순은 광철이 무사한 걸 보고 기뻐하며 그의 목을 얼싸안았다. 광철 역시 영순의 등을 토닥이며 다친 곳은 없는지 물었다. 필호가 등 뒤에서 헛기침을 하자 두 사람은 그제야 떨어졌다.
“나는 영순이 애비 되는 양필호라고 하네. 그래. 자네가 그동안 우리 영순이 노래 스승으로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주었다지? 이번에 극장에서 불났을 때도 구해주고. 고맙게 생각하네.”
“…아, 아닙니더.”
광철은 필호에게 영순이 자신을 그저 노래 스승으로 소개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다. 그 사이 영순은 그런 광철의 속도 모르고 광철 어머니 영과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영이 깎아놓은 사과 하나를 해맑게 집어 먹었다.
“나는 조선대학교 여자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하교 후엔 우리 딸내미랑 친구들 모아서 공부방도 하고 있네. 자네도 괜찮으면 공부방에 오게나. 내가 공부를 봐주겠네.”
“아따 세상에, 선생님 참말로 고맙습니더.”
필호의 말에 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몇 번이고 허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영도 남편인 창화도 가방끈이 짧다 보니 아들인 광철의 공부를 어떻게 지원하면 좋을지 방도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영순과 광철은 모두 별 탈 없이 퇴원하고 봄이 되자 각각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공부방은 일주일에 두 번 영순의 집 사랑방에서 열렸는데 기존 멤버인 영순, 향미, 동오에 더해 광철이 합류했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광철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소녀 부대 중 하나였던 향미는 광철과 같은 공부방에서 수업을 받게 된 데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향미는 광철의 눈에 들고 싶어 매번 꽃단장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광철의 관심은 그다지 받지 못했다.
광철은 공부방 일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고등학생인데도 공부에는 영 재능이 없어 부끄러움을 느꼈다. 필호가 주재하는 수업 시간에서 광철이 세 살 아래 동생들인 영순, 향미, 동오도 아는 지식을 광철은 답하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 영순은 음악은 그리 아는 게 많으면서 광철 오빠도 바보인 구석이 있는 줄은 몰랐다고 깔깔 웃었다. 영순을 보면서 광철은 더욱 얼굴이 화끈거리고는 했다.
광철의 눈치를 본 향미가 그럴 때마다 시험 보려고 외운 그깟 토막 상식 하나 더 알고 있다고 젠체하지 말라고 영순을 응징하고는 했다. 그럼에도 광철의 가창력이나 기타 연주 실력이 탁월한 건 사실이었기에 여전히 인근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축제나 행사에 자주 출연했다. 그의 실력을 눈여겨본 음반사에서 가수 계약 제안을 받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광철은 그래도 학업은 다 마치길 원하는 부모의 기대에 맞춰 가수 제안은 거절하고는 했다.
영순에게는 그 모든 게 그림의 떡과 같은 일이었다. 영순은 가수를 반대하는 필호 몰래 틈틈이 음반사에 지원서를 넣었지만 결과는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낙방뿐이었다. 정말 필호 말대로 영순의 가창이 형편없는 걸지도 몰랐다. 광철의 소개를 받아 알게 된 음반사에 지원 서류를 넣어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10월을 맞이해 가을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화마에 삼켜져 잿가루가 됐던 광주극장은 재개발을 거쳐 개관을 앞두고 있었다. 또다시 음반사에서 거절당한 영순은 그 모습을 먼발치서 멀거니 지켜보고 있었다. 향미와 동오 모두 영순이 얼마나 상심했는지 알았기에 쉽사리 말을 걸지 못하고 그 옆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이미 한 번 불나서 무너졌던 극장을 다시 문 여는 게 의미가 있을까? 예전에 그 극장이 아닌데. 또 그런 불이 나지 말란 법도 없는데….”
영순은 그렇게 비아냥거리며 이죽거렸다. 무엇이든 딴지를 걸고 넘지 않고서는 단단히 엉켜버린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양동레코드까지 쫓아가서 광철에게 매달려 발성의 기본부터 박자 타는 법, 유명 가수 모창하는 법 등을 배워 열심히 갈고닦았는데도 소용없었다. 왜 세상은 음악을 향한 영순의 이런 진심과 노력을 몰라주는 건지, 가수에 대한 열병과 같은 지독한 짝사랑을 언제까지 혼자 해야 하는지 몰라 영순은 서러웠다.
“우리 아부지가 해준 얘긴디 세상에 ‘테세우스의 배’라는 게 있다 카드라.”
그런 영순을 보고 동오가 입을 열었다. 동오가 말문을 열자 영순과 향미 모두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지간한 일에는 입을 먼저 대는 일이 없던 동오였기에 자연스레 시선이 쏠렸다.
“옛날 그리스에 말여, 사람을 잡아묵고 사는 황소 괴물을 잡은 테세우스라는 영웅이 있었단다잉. 아테네 사람들은 그 테세우스가 탔던 배를 곱게 모셔뒀는디, 세월이 지나가믄서 배가 썩기 시작한 거여. 그래서 낡은 판자를 하나씩 떼내고 새 판자를 박았단 말이지. 헌디 그렇게 낡은 판자를 자꾸 갈아 끼우다 보면 말여, 언젠가는 원래 그 배 조각은 하나도 안 남을 거 아녀. 그라믄 그 배를 계속 테세우스의 배라 혀도 되겄냐잉?”
“야, 권동오. 그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여? 알아듣게 좀 쉽게 말해불어라.”
향미는 동오에게 어려운 소리를 하지 말라고 타박했다. 영순은 동오가 하는 말을 들어보자며 향미를 말렸다. 그러자 동오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 배를 새 판자로 바꾼다 한들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냐잉. 새로 지은 광주극장이 옛날 그 극장이 아니라 혀도 그렇다고 광주극장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냐.영순이 너도 마찬가지여. 설령 다른 길로 간다 혀도 영순이 너는 영순이여. 음악을 좋아하는 양영순, 그건 안 바뀌는 거여.”
동오의 그 말이 영순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가수는 영순의 길이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음악을 사랑하는 영순의 본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다른 길을 찾아볼 필요가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영순은 그 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감을 잡기 못 했다. 하지만 그 실마리를 찾는 데는 의외로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이듬해 여름 춘재네 가족이 이사 왔기 때문이다.
“이젠 여그가 우리만의 음악 감상실이여, 아, 아니지. 음악다방 ‘빛고운 세라비’랑께~”
춘재의 아버지 박일봉은 오랜 서울살이 동안 뼈 빠지게 일해 모은 돈을 탈탈 털어 그 해 겨울 사직골에 본인 명의로 음악다방을 하나 차렸다. 그가 서울에서 사는 동안 청춘을 갖다 바쳤던 서울 무교동에 위치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음악감상실 세시봉이 1969년 5월 전세 계약 만료로 폐업하자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세시봉의 이름도 기리고 일봉의 고향인 광주의 별명 ‘빛고을’을 합쳐 간판을 달았다.
세시봉은 불어 C'est si bon을 우리말로 음차 한 것이다. 뜻은 아주 멋지고 훌륭하다는 소리다. 세시봉처럼 일봉은 ‘인생은 그런 거지’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 C'est la vie에서 착안해 다방 이름에 세라비를 붙였다.
일봉이 대중음악의 열렬한 마니아이자 영업에 진심이었던 터라 광주에서 노래 좀 듣는다는 사람들은 이 다방에 금방 관심을 가졌다.
세시봉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던 일봉의 뛰어난 입담으로 전해 듣는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등 내로라하는 가수들의 일화는 어디서도 할 수 없는 진귀한 경험이었다. 영순과 광철도 일봉의 피리 소리에 홀려 다방까지 흘러들어 온 무리 중 하나였다. 공부방 멤버들인 향미와 동오도 자연스럽게 동석했다.
“아따 진짜루 조영남을 눈앞에서 봤다요?”
“그라면 이 사람이 속고만 살았당가? 조영남 씨가 얼매나 엘리트라구~ 성악으로 톰 존스 노래 딜라일라를 부르는데, 크~ 그거 안 들어봤으면 말을 마라잉.”
조영남이란 이름을 그저 라디오에서나 건너 들었던 광주 시민들의 두 눈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TV도 흔하지 않던 시절 일봉의 생생한 무용담으로 사람들은 마치 조영남의 무대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상상하며 행복에 겨웠다. 하지만 그 모습이 아니꼬운 불청객이 있었다.
“흥! 그래봤자 남의 노래 앵무새처럼 따라 부르기만 하는 딴따라일 뿐인데 뭐가 대단하다고.”
순간 좌중의 시선이 불청객에게 쏠렸다. 일봉의 세 아들 중 막내인 춘재였다. 춘재는 서울에서 자라며 친했던 친구들과 연을 다 끊긴 채 아버지 고향인 광주로 내려오게 된 데 아직도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춘재의 딴지에 흥이 끊긴 일봉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박춘재! 너 시방 그게 뭔 헛소리여? 아부지가 바깥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말라 했잖여!”
“왜 맞잖아요. 우리나라 딴따라들은 자기들이 노래 쓸 머리가 없어서 맨날 외국 노래 번안하거나 베끼잖아요~ 그런 게 뭐가 대단하다는 거예요?”
“아니, 저 놈의 새끼가!”
일봉은 얼굴을 붉히며 버럭 화를 냈다. 좌중은 술렁였다. 춘재는 그런 아버지를 골탕 먹였다는 생각에 히죽 웃었다. 그때였다. 영순과 광철이 자리에서 나란히 일어나 춘재에게 다가갔다. 춘재는 두 사람이 나란히 압박하듯이 다가오자 당황해서 뒤로 물러났다.
“춘재라고 했나? 너 정말 우리나라 가수들이 전부 그렇다고 생각하니?”
“니가 아는 세상이 다가 아녀, 꼬마야. 이런 가수도 있다잉.”
춘재는 영순과 광철을 보고 지기 싫어서 정말 그런 사람이 있으면 이름을 대보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영순과 광철은 마치 미리 준비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합을 맞췄다. 광철은 기타를 치며 목을 실컷 긁으며 음을 냈다. 영순은 그 옆에서 자연스럽게 추임새를 넣었다.
모두 다 우아한 보법으로 시 낭송하듯이 부드럽게 노래를 부를 때 두 사람은 무대 위에 갑자기 난입한 야인을 연기했다. 날카로운 철을 긁는 듯한 목소리로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며 외치는 그들의 몸짓은 좌중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모두가 정숙한 무대를 선보일 때 야수와 같은 신선하고 파격적인 에너지로 데뷔하자마자 눈길을 끌었던 한대수의 카리스마를 그대로 재현한 무대였다.
품바 공연처럼 야성적으로 무대를 휘젓고 다녔다. 즉흥적으로 입을 맞췄는데도 영순과 광철의 합은 관객을 매료시키는 힘이 있었다. 노래가 다 끝나자 춘재는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꼬맹아, 너 어디 가서 이런 외국 노래 들어본 적 있어?”
“이거 한대수 ‘물 좀 주소’라는 노래여. 이 가수가 열여덟 살 때 직접 만든 거다잉. 내가 우리 아부지 친구 초대로 여기 있는 내 동생을 데리고 남산 리사이틀 가가꼬 직접 들었응께, 증인도 있당께.”
“그, 그건…!”
“이제 알았으면 다음부터는 함부로 까불지 말아라.”
반박한 말을 찾지 못해 부들거리는 춘재를 뒤로 하고 영순과 광철은 서로 마주 보며 손뼉을 쳤다.
★ DJ's Pick
한대수-물 좀 주소! (1974년)
1974년 발매된 한대수 1집 '멀고 먼 길' 수록곡. 정식 음반에 수록된 건 1974년이었으나 1968년 한대수가 세시봉에서 '행복의 나라로' 등과 함께 공연한 바 있다. 한대수는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의 유명세엔 못 미치지만 엄연한 원조 세시봉 출신 가수다. 이 노래는 행복의 나라로와 마찬가지로 한대수가 18살에 작곡했다. 1969년 9월 한대수가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개최한 리사이틀에서도 선보였다. 당시 정장 차림의 외국 번안곡 공연이 유행이었던 기조와 달리 록의 색깔이 가미된 지작곡을 부른 한대수의 존재는 파격 그 자체였다. 발표 이후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노래 속 물이 민주주의를 상징한다고 해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