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번째 푸른 봄
양동레코드에 들어선 영순은 조용히 앉아 뒤엉켜버린 생각의 끈을 풀고자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생각을 가다듬었다. 어디서부터 복잡하게 엉켜버린 이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 막막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과거에 잔뜩 꼬여 있던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내려치고 왕이 됐던 것처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그동안 까맣게 잃어버렸던 25살까지의 주요 기억은 되찾았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 이전의 기억은 돌아왔지만 정작 이 시절을 공백으로 만든 사고의 원인은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다. 과거로 돌아온 삶에 순응할지, 70세 본연의 몸으로 돌아가야 할지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당장 2025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만약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면 그 길을 선뜻 갈 수 있을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쉽게 움직이지도 않는 관절을 간신히 옮기며 힘겹게 오르내리던 봉천동 고갯길, 사고 이후 수시로 찾아오는 두통과 허리와 어깨 통증에도 몸을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하는 요양보호사 활동, 돌아가봤자 반겨주는 이 하나 없는 좁은 집. 그 일상을 다시 떠올리니 영순은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곰곰이 생각하면 나쁜 점만 있던 건 아니었다. 요양병원 직원들은 친절했고, 환자들도 일부 진상을 제외하면 정중했다. 하지만 영순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그렇다고 고향에 다시 돌아와서는 소속감을 찾았냐 하면 그 또한 아니었다. 이곳엔 가족이 있고, 그리웠던 친구들과 음악이 있지만 이들 역시 지난 45년간 그 누구 하나 영순을 찾지 않았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왜 그 누구도 연락이 닿지 않았을까.
왜 갑자기 모든 것과 단절된 그 사고 1년 전으로 돌아온 걸까. 그렇게 영순은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되풀이했다. 그렇게 영순은 더 복잡한 심연 속으로 침잠했다.
“영순아, 너 괜찮디야? 이거 좀 마셔라.”
광철이 영순을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찬물을 따른 컵을 건넸다. 영순은 고맙다고 답하며 찬물을 들이켰다. 비록 해결된 문제는 없지만 속이 좀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광철은 영순의 옆자리에 앉으며 걱정스러운 듯이 말을 건넸다.
“사실 눈치 보여서 그동안 말 못했는디, 너 요즘 왜 그라냐? 한 달 새 딴 사람이 돼 불었더라.”
다른 사람. 그 말이 영순에게 딱 박혔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여기 사람들이 보기에는 갑자기 1979년에 돌아와 적응 못 하고 방황하고 있는 영순이 그전 이들이 알던 영순과는 다른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사람들이 보기에 영순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기억을 잃고 주변을 전혀 몰라보는 돌연변이처럼 보일 테니. 영순은 문득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광철이 양동시장에서 재회한 이후로 왜 그렇게 틈만 나면 집에 자주 찾아와 영순을 만나려고 그토록 노력했는지 깨달았다. 갑자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순에게 생긴 일을 알고 싶어서였던 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영순은 그동안 광철을 피해 다녔던 일이 괜히 미안해졌다.
“…다른 사람이 된 게 맞을지도 몰라.”
“그게 무슨 소리여? 알아먹게 좀 말혀봐라.”
광철은 깜짝 놀란 얼굴을 순간적으로 영순에게 가까이 들이밀었다. 영순은 그에 놀라 뒤로 몸을 뺐다. 광철은 영순이 다시 거리를 두자 자신이 다급했다는 생각에 다시 몸을 원위치로 복귀시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런 말 해도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 26살 이전 일은 여태까지 하나도 기억을 못 했어. 왜 기억을 못 하는지도 모르고 살았어. 그래서 그랬던 거야.”
“뭐라꼬? 그게 무슨 소리여? 니 지금 스물다섯 아녀? 스물여섯 되기 전 일은 기억을 못 한다는 게….”
“맞아. 사실… 나 미래에서 왔어.”
광철은 영순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유였던 탓이었다. 영순은 그런 광철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떨궜다. 하긴 누가 이런 일을 이해하겠는가. 광철도 어머니 금자처럼 자신을 정신이 이상한 사람 취급할 게 뻔했다.
“그라쿠만…이제야 알겄다. 그런 게 아니믄 니가 그럴 리가 없제.”
“내 말… 믿어주는 거야?”
영순은 광철의 말을 듣고 놀라서 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해월선녀처럼 신비한 능력을 가진 이가 아니고선 그 누구도 영순의 처지를 이해해 줄 만한 사람은 없을 것만 같았다.
“당장 믿기 어렵지만 그런 거 아녀쓰믄 니가 갑자기 그렇게 변할 리가 없제. 그라니까 말혀 봐. 그동안 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디?”
영순은 그 말을 듣고 울컥했다. 과거로 돌아온 뒤 누구도 그녀에게 있었던 일을 들어주려고 한 이는 없었다. 갑자기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순을 모두 이상하게만 여길 뿐이었다. 영순은 광철에게 지난 45년간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풀어놓았다. 광철은 영순이 하는 말을 진지하게 귀담아듣고는 영순이 말을 끝내자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니 말대로라믄 큰 일이구만. 내년에 무슨 큰 일이라도 생긴다믄…. 참말로 답답했겠다잉.”
“응.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막막해.”
그러자 광철은 영순의 손에 자신의 손을 깍지 껴서 잡았다. 마치 어둠만이 내려앉았던 광주극장 안을 거닐다 무서움을 쫓고자 ‘열아홉 순정’을 흥얼거렸던 영순의 손을 맞잡고 광철이 그 노래를 함께 불러주었던 그때와 같았다. 그때와 같이 광철은 부드럽게 영순을 바라보았다.
“이 오라버니가 있잖냐, 뭐가 그리 걱정이여. 내가 뭐든 도와줄라니께, 우리 같이 답을 한 번 찾아보자잉.”
그 한 마디에 영순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했다. 그 얼굴에 살포시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광철은 이제야 웃냐며 영순의 왼쪽 볼을 살짝 꼬집고는 흔들었다. 영순은 광철에게 그만하라고 투정 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나 다녀올게.”
“어디 가? 가지 말어. 나도 같이 가.”
“어매, 그러면 안 되제잉! 영순인 일 나가는 거 아녀라잉!”
영순이 출근하려고 나설 때마다 부쩍 말숙이 뒤따라 나가려고 하는 일이 늘었다. 그러면 금자가 뒤에서 말숙을 끌어안고 필사적으로 말렸다. 하지만 영순을 따라 집 밖으로 따라 나가려고 말숙이 거세게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금자는 진땀을 뺐다. 결국 힘이 빠진 금자의 두 손이 풀려 말숙을 놓치자 말숙은 슬리퍼를 구겨 신고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현관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할머니!”
“어매!!”
그럼 영순과 금자가 동시에 경악하며 허겁지겁 달려 나가 협공하여 말숙의 팔다리를 붙들고 다시 집안에 데려놓고는 했다. 말숙이 매번 이거 놓으라며 팔다리를 파닥거리며 거세게 반항해 영순과 금자 둘 다 진땀 빼며 애를 먹기는 했지만.
“아이고, 영순아 니 일 나가야 할 텐디 맨날 할매 때문에 고생 많다잉, 미안허다. 저번 달에 잠깐 정신 말짱했을 때 극장 한번 다녀오더니 그 뒤로 재미 붙여 불었는지 틈만 나면 나가볼라 혀.”
“나 없는 동안엔 엄마가 할머니 뒤치다꺼리 하느라 힘들잖아. 나 갔다 올게.”
다년간 쌓은 요양보호사 경험으로 금자가 혼자 시모 말숙을 감당하는 게 얼마나 힘들지 영순은 짐작할 수 있었다. 둘째 달호는 현재 입대했고, 올해 새내기 대학생이 된 막내 영자 역시 학업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어머니 금자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앞섰지만 영순은 다방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매주 수요일은 광철이 ‘빛고운 세라비’에 출근해 주목할 만한 노래에 대해 소개하고 공연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광철의 공연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영순은 마음이 들떴다. 또 그가 오늘은 과연 어떤 노래를 소개할지도 매우 궁금했다.
다방에 출근하자 춘재가 매우 저기압인 채로 영순을 맞았다. 휘파람을 불면서 즐겁게 일을 준비하는 영순과는 영 딴판이었다. 춘재는 그런 영순을 보면서 어딘가 묘하게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순이 누님, 요즘 뭐 좋은 일 있었당가?”
“오늘은 어떤 새로운 노래를 만나게 될지 기대되잖아.”
영순은 그렇게 환하게 웃으면서 춘재에게 대답했다. 춘재는 영순이 예전처럼 밝고 당차게 대답하는 걸 보고 무언가 달라졌다는 걸 직감했다. 미래의 영순이 회귀한 뒤로는 기억하고 있는 게 별로 없다 보니 어딘가 늘 위축됐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춘재는 영순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궁금해 말을 걸었다.
“그게 다인 거 같진 않은디? 나중에 일 끝나고 충장로나 한 번 놀러갈랑가?”
“어? 광철 오빠! 어서 와!”
그때 광철이 통기타 가방을 멘 채 다방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런 광철을 본 영순은 활짝 웃으며 맞이했다. 그런 영순을 보고 춘재는 등 뒤에서 씁쓸함을 혼자 삭였다. 항상 그랬다. 영순이 활짝 웃음꽃을 피울 때면 그 뒤엔 광철이 있었다. 그런 춘재를 두고 영순과 광철은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오늘은 무슨 노래를 갖고 왔어?”
“요즘 산울림이니 샌드페블즈니 블랙테트라니 그런 밴드들이 참말로 인기 많잖아. 서울 친구한테 들었는데, 배철수 그 양반도 활주로 나와서 음반사 들어가 가 새 밴드 만들어서 이번에 1집 낸다드라. 음반은 다음 달에 나온다 카드만, 내가 미리 하나 구해왔제잉~.”
“그럼 이게 송골매 1집이야? 대박이다!”
영순은 ‘젊은이의 벗 송골매 신곡 모음’이라 글자가 새겨진 음반을 두 손에 들고 두 눈을 반짝였다. 송골매라는 이름을 듣고 감격하는 영순을 보고 광철과 춘재는 모두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시기에는 아직 송골매가 현재처럼 이름을 떨친 유명 밴드가 아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영순에겐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송골매 1집은 배철수와 구창모가 주축이 되어 유명세를 떨친 현재의 송골매와는 다른 음악을 담고 있었다. 그 음악이 담긴 따끈따끈한 음반을 손에 넣다니, 영순은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밀려오는 감동을 금치 못했다.
"왜 울고 그라냐? 니가 아는 애들잉가?"
"그럼 잘 알다마다. 송골매가 얼마나 위대한 밴드인 줄 알아? 그 초창기 음반을 구하다니…. 꿈만 같아. 아, 세상만사가 원래 여기 실린 노래였구나. 이거 정말 명곡이지."
송골매 1집을 보고 방방 뜨는 영순을 광철과 춘재는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광철이 영순에게 송골매가 어떤 밴드냐고 그러자 묻자 잔뜩 신이 난 영순은 현재 광철과 춘재 입장에서는 앞날을 실컷 떠들었다. 1981년 송골매가 구창모와 드럼 오승동, 베이스 김상봉을 영입해 발매한 2집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단 사실, 어쩌다 마주친 그대와 모두 다 사랑하리가 모두 그 시기에 나와 전천후로 인기를 끌었다고 설명했다.
무대 준비를 종용하러 온 사장 일봉이 들렀다가 영순의 송골매 찬양에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영순은 그대로 ‘빛고운 세라비’를 찾아온 손님들 앞에서 광철의 공연과 함께 송골매의 치적을 늘어놓았다. 손님들은 광철이 공연한 송골매 노래는 반신반의로 들었으나 영순이 소개한 송골매가 누릴 향후 전성기에 대해선 관심을 가졌다. 영순의 말은 손님들 입장에서는 미래에 벌어질 일이었으니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광철의 공연을 보러 다방을 찾은 향미와 동오는 그 말을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 오도카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노래가 좀 애매한디, 그 말을 우리가 우째 믿을라냐?”
향미가 딴지를 걸듯이 물었다. 하지만 영순은 그런 향미를 보고도 화를 내기는커녕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때 가서 보면 되지. 세상만사 모든 일이 뜻대로야 되겠니?”
가사를 응용한 재치에 좌중이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렇게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을 끝마치고 귀가한 영순에게 그리 반갑지 않은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어머니 금자도, 동생 영자도, 일찍 퇴근한 아버지 필호도 부산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들 표정이 잿빛으로 변해 어두웠다.
“다, 다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이고, 영순이 왔냐. 이걸 우째쓰까…니 할머니가 감쪽같이 사라져불었당께.”
금자의 말에 영순은 심장이 바닥 밑으로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 DJ's Pick
송골매-세상만사(1979년)
송골매 1집 A면 두 번째로 수록된 곡. 송골매는 항공대 캠퍼스 밴드 활주로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밴드다. 1집은 배철수(보컬, 드럼), 이봉환, 이응수(베이스), 지덕엽(기타) 체제의 송골매 1기 때 발매했다. 전천후로 히트한 2집에 비하면 폭발적인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시조를 좋아한 이응수의 색깔이 녹아든 가사와 지덕엽의 곡조는 한국적 록이라 할만한 토속적 정서를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