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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누 Oct 25. 2021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의 소설을 기다렸다. 진열대에 쌓여있는 책을 보자마자 아무런 생각없이 집어 들었다. 작가에 대한 믿음이었다. 내 생각을 흔들고 한뼘 더 자라게 해주리라는 믿음 . 한강의 전작 '소년이 온다.'를 읽고 한강을 믿게 되었다. 내 생각의 흐름을 한시도 놓아주지 않는 한강의 글을 읽으며 작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란 걸 알게되었다. 글쓰기를 더 두렵게 만들기도 했지만 감정의 진폭을 넓혀주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더 깊게 만들어 주었다. 한강의 새로운 작품을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작별하지 않는다' 제목만으로 어떤 내용일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차례를 펼쳐본다. 1부 새, 2부 밤. 결정, 실, 폭설....새, 나무 은유적인 표현일까? 차례를 찬찬히 살펴보아도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 흔한 머리말도 없이 표지로부터 가장 짧은 거리에서 바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작가들이 가장 어려워 한다는 첫 문장을 읽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작가에게 내 마음을 내어줄 시간이다. '소년이 온다'를 펼쳤을 때는 책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광주사태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큰 틀을 준비하고 한 문장 한 문장 채워나가는 읽기에서는 자칫 작가가 치밀하게 설계해 놓은 길에서 벗어나기가 쉽다. 한강의 필력으로 내 큰 틀을 깨버리지 않았다면 '소년이 온다'는 한강의 의도대로 읽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활짝 열린 마음만으로 다가가고 싶었다. 흠뻑 빠지고 싶었다. 


 몇 년전 친구와 제주도 둘레길을 걸었다. 자동차로 관광지만 돌아보는 여행과는 사뭇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제주의 속살을 조금이나마 만나볼 수 있었다. 일본군이 파놓은 산속의 참호들이 있었고, 많은 시신들이 발굴된 제주4.3사건의 현장도 한참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제주사람들의 외지인들에 대한 텃세가 심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막연히 섬사람들의 특징이려니 생각했던 스스로를 반성하는 시간이었다. 제주도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이 아니었다. 적어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쳤던 시기에는...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4.3사건을 다루고 있다. 억울하게 끌려가고, 이유없이 죽임을 당해야 했던 많은 사람들을 목도하고, 소식없이 사라진 가족을 기약없이 기다려야만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눈과 새 그리고 두 사람을 통해 조금씩 그날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화자인 경하는 마치 작가 자신을 옮겨 놓은 듯 하다. 실제로 한강이 인터뷰를 통해 밝혔듯이 '소년이 온다' 집필이후 악몽에 시달리며 힘겨워 했던 상황이 초반에 경하를 통해 그려진다. 


 경화와 그 친구인 인선은 삶인지 죽음인지,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시간 속에서 대화를 나누며 4.3사건을 되새겨 나간다. 그 날의 억울함이 비참함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오빠와 남편을 잃은 인선의 어머니를 통해 생생하게 그려지는 4.3사건의 단면이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든다.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을 읽을 때면 늘 어디까지 사실일지 스스로 묻게 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건들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면서 읽어 나아갔다. 문민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가슴 속에 꾹꾹 눌러 놓아야 했던 이야기들이 이제서야 세상 밖으로 나와서 실체를 드러낸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 동전의 양면처럼 닮아있다. 광주사태와 제주 4.3사건은 뿌리가 하나로 이어진 연리지와 같다. 사랑하는 가족이 눈앞에서 아무런 이유없이 끌려가고, 쓰러져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시대의 폭력이었다. 연약한 개인은 그저 더 좋은 시대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몸 속에서 발버둥치는 진실을 꾹꾹 누르며 하루를 살아내야만 했다. 터저나오려는 진실을 담고 있으려니 가슴은 만신창이가 되다가 오히려 잠잠해 졌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이해하려면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과 군사독재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 정신과 문화의 근간에 놓였던 날카로운 가시들이다. 한강은 '소년이 온다'에 이어 '작별하지 않는다'로 진실을 마주한다. 작가와 함께 진실을 마주할 때 독자들도 각자의 아픔을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읽는 내내 마음이 가라앉았다.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나는 다시 일어선다. 


"숨을 들이 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려치자 성냥개비가 꺽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이번엔 제주 4.3사건이야?"라는 생각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작가 한강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과 농밀하게 쌓아올린 한 문장 한 문장이 마음에 전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다. 한강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물론이거니와 '소년이 온다'를 읽은 독자라면 꼭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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