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벤다허브 Aug 05. 2022

 3. 아프더라도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오뒷세이아를 읽으며 수다를 나누다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 Zion.T의 양화대교 가사 일부 -     


 우린 입버릇처럼 “행복하자”라고 말한다. 우리 삶의 최종 목표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고, 거기에는 고통과 고난의 자리는 없다. 그곳까지 가는 동안 만나게 되는 고약한 그 녀석들은 반드시 극복하고 사라진 후에야 종착역인 행복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에 기쁘게 다가올 ‘행복’이란 녀석은 굴비마냥 천장에 매달아 놓고 지금의 아픔과 슬픔을 마지못해 억지로 삼키고 있다. 그런 자린고비의 삶을 우리는 열심히도 살아내고 있다. 행복=삶-고통-슬픔-아픔-어려움-힘듦. (-:빼기) 이런 공식처럼 고난과 슬픔과 아픔 같은 요소들이 모두 사라지면 행복만이 남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것들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하지만 행복을 그렇게 쳐다만 보느니 조금씩 떼어서 맛을 보길 택하는 경우가 최근 몇 년 사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욜로나 워라밸, 소확행이 유행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이다. 나 또한 사소한 것에서 작은 행복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버스를 타고 일하러 가는 시간이나 가족이 모여 함께 보드게임을 즐기는 일이나 이사 다닐 필요가 없는 내 집이 있다는 사실들이 그런 것들이다. 그렇게 현재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삶이 현재의 고통을 감수하며 미래의 막연한 행복을 꿈꾸는 삶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내 앞의 행복을 조금 더 키우기 위해 눈앞의 어려움을 잠시 참고 견딘다고 해서 다가올 미래가 그 인내의 시간을 보상해준다는 보장은 없다. 다가올 행복이 현재의 것보다 더 크고 오래간다는 약속도 없다. 혹시라도 그렇게 천장에 매달린 굴비처럼 바라만 보다가 행복의 맛조차 잊어버린다면 먼 훗날 그것을 만나더라도 지나칠지 모른다. 이런 나만의 개똥철학으로 ‘행복하다’를 남발하며 지내 하루하루가 자못 만족스러웠다. 어쩌면 이에 스스로 도취하여 그 만족감은 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집에 돌아가서 귀향의 날을 보기를 날마다 원하고 바란 다오. 설혹 신들 중에 어떤 분이 또다시 포도주빛 바다 위에서 나를 난파시키더라도 나는 가슴속에 고통을 참는 마을을 갖고 있기에 참을 것이오. 나는 이미 너울과 전쟁터에서 많은 것을 겪었고 많은 고생을 했소. 그러니 이들 고난들에 이번 고난이 추가될 테면 되라지요. 
오뒷세이아 제5권 219행   

  

 오뒷세우스가 자신을 붙잡는 칼립소에게 건네는 말이다. 그가 누구인가? 고대 그리스 영웅들 중 가장 지혜롭다고 불리는 이다.  그런 그가 칼립소와 함께 하며 얻게 될 신과 같은 삶을 거부하고 고난이 가득한 귀향을 선택했다. 늙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이곳에서의 행복과 나이 든 아내와 자신을 기다릴 부모 그리고 어린 아들을 만나는 행복 중 후자를 선택했다. 비록 그것을 위해 엄청난 불행의 과정을 겪더라도 가치가 더 크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생겼을까? 귀향한다고 해도 아내와 고향 이타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지 않은가.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 코앞에 놓인 것을 놓기는 쉽지 않다. 특히 엄청난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도 알면서도.


  오뒷세이아를 읽으면서 차라투스트라를 자주 떠올리게 되었다. 닮은 구석이 있는 두 사람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끊임없이 산에서 내려간다. 그곳에서 어리석은 인간들을 돕고자 하지만 정작 자신이 고통받고 상처받은 채 다시 산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또 내려간다. 고난 속으로. 산에서의 행복을 버리고. 그렇게 차라투스트라는 고통도 우리 삶의 일부임을 수긍하고 받아들이고 위버 멘쉬를 꿈꾼다. 이 두 명의 이야기를 통해 나 또한 행복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본다.


 왜 꼭 행복하려 하는가? 행복한 삶이란 존재하는가? 행복하지 못한 삶은 행복한 삶보다 가치가 떨어지는가? 행복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오히려 고통을 만드는 일은 아닌가? 어느새 이것이 내 최대 고민거리가 되어버렸다. 살아온 날을 되뇌어도 힘듦이 가득했고 현재도 나름의 어려움이 있고 앞으로도 당연히 있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결국 고난은 나와 떨어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악착같이 떼 버려야 하고 멀리해야 하는 전염병 같은 존재로 여긴다. 이것이 어쩌면 행복하지 못한 삶은 꼭 실패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하는 강박관념 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항상 어려움을 만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그것이 내게 왔을 때 억울함은 그나마 적을 것이다. ‘왜 하필 나지?’라는 생각보다 ‘아, 또 만났네. 이번에는 어떻게 이겨볼까?’라는 긍정적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또한 내 불행은 나의 책임이 아니라 인생과 세트로 묶인 녀석이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 나에 대한 미움도 사회나 타인에 대한 원망도 걷을 수 있다. 그래서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는 이야기보다 ‘아프더라도 행복하자’를 더 권하는 바이다. 

오뒷세우스의 말처럼 이번 고난도 추가될 테면 되라지!

이전 08화 2. 선물, 씁쓸한 것이 되었습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