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로 판단되는 삶, 소문의 근원

by 주엉쓰

얼마 전, 지인과 “소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본,

그러나 막상 말하려 하면 쉽게 꺼내지지 않는 이야기.

어떤 사람은 그 일을 인생의 한 장면처럼 흘려보내고,

어떤 사람은 평생 마음속에 남겨둔다.

나는 어느 쪽이냐면,

지금까지도 ‘어떤 감정’으로 남아 있는 쪽이다.


지인은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로

이유 없이 오해를 받고 있었다고 했다.

그 억울함이 며칠 동안 꺼지지 않았다고도 했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듣는 편이 훨씬 많은 사람이었기에

더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그 감정이 너무 익숙하게 느껴졌다.

마치 오래전에 겪었던 상처 하나가

다시 불린 듯 가라앉아 있다가

슬며시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지 않나.”


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말은 위로도 아니고, 문제 해결도 아니다.

그저 내가 살아오면서 내려온,

현실적인 결론일 뿐이었다.

소문이라는 건 이미 누군가의 입을 떠난 순간

잡을 수 없는 풍선과 같다.

누가 어디서 붙잡아 어떤 말을 덧붙였는지,

누가 어떤 감정으로 왜곡했는지

돌아가는 과정은 아무도 모른다.

나에게 도달했다는 건 결국

이미 여러 번 변질된 상태라는 뜻이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소문 속에서도

내 옆에 남아 있는 사람은

어차피 남았을 사람이라는 것.

떠날 사람은 그런 계기가 아니었어도 떠난다는 것.


나는 지인에게 그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전달했다.

소문은 인연을 가르는 도구가 아니라,

이미 벌어져 있던 관계의 틈을

드러내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그 말을 하면서도

한편에서는 묘한 씁쓸함이 스쳤다.

사실 그 말은 지인에게 들려주기 위한 말이기도 했지만

결국 내게 해 왔던 말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왜 사람들은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를

마치 진실인 것처럼 쉽게 믿을까?”


이 질문의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사람들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이미 만들어진 이미지’를 통해 보기 때문이다.

그 이미지가 틀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이미지에 맞는 이야기가 들리면

더 쉽게 믿는다.


내가 몇 번이고 겪었던 오해들도 대부분 이랬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요리하는 돌아이’님도

방송에서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평소 인상이 어둡다는 이유로,

말을 아낀다는 이유로,

수없이 오해를 받았다고.

그 말이 쓸데없이 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그 감각을 너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날티 난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정말 이유 없이 들었고,

그때는 그게 그냥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 떠들어도

혼나는 건 늘 나였다.

어른들은 늘 말했다.

“네가 주도한 거 아니야?”

“네가 친구들을 선동했겠지.”


하지만 사실은 반대였다.

말썽을 부리는 건 대개 내가 아니었고,

나는 말리던 편이었다.

그런데도 상황은 늘 내 탓이 되곤 했다.

그때는 스스로도 혼란스러웠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는데

항상 혼이 나니,

그 순간을 넘기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좀 그런 이미지인가 보다’ 하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이런 오해는 같은 방식으로 반복됐다.

내가 하지 않은 말도,

하지 않은 행동도,

누군가의 입을 거치면

“그럴 법하다”라는 결론과 함께

내 몫이 되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쓴 문장이 있었다.

“아니 뗀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경우도 있더라.”

이 문장이 나를 이상하게 흔들었다.

그 문장은 명확하지도, 길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짧은 문장이

나를 오래전에 경험한 감정으로

순간적으로 데려갔다.


이유 없이 뒤집어쓴 오해들.

해명해도 의미가 없었던 시간들.

억울한 순간을 삼키고 넘겼던 날들.


그 말은 사실과 다를 때도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

하지만 뒤늦게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너 이미지가 좀 그렇잖아.”


이미지.

얼마나 가벼운 단어인가.

그런데 그 단어는

누군가의 인생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어느 날은 오래된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그 친구가 툭 던지듯 말했다.


“생각해 보면 너랑 같이 늦은 날에도

항상 혼난 건 너였어.”


평생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다는 말.

그 시절을 같이 겪었던 친구가

내게 그렇게 말해주는 순간

나는 그동안의 억울함이

한 번에 해소되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그 친구를 늘 깨우러 가던 것도

그 친구가 전날 밤 술을 마시자고 하면

말리던 것도 늘 나였다.

하지만 그 친구는

‘착하고 성실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고,

나는 ‘그 친구를 방해하는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그 당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아니라고 말해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지 앞에서는

사실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까.


나이가 들고 더 많은 사람을 겪다 보니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게 됐다.


부당한 순간에 침묵하는 것은

결국 내 몫으로 남는 상처의 무게를

더 크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


그 상처는 시간이 지나야 만 위로받을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상처는

남이 위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때의 나’를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위로되는 경우도 있다.


그 과정을 겪으며

나는 한 가지를 명확히 깨달았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의도치 않게 이런 상처를 준 적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내가 겪은 오해를

다른 사람에게도 반복했을 가능성.


그래서 그 굴레를 끊기 위해서는

마음을 조금 더 튼튼하게 다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부드럽게 여는 방법이 필요하다.

누군가를 이미지로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타인의 말로 구성된 진실이 아니라

내가 선택해 듣고 믿는 조각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남의 말이 아니라

‘내가 본 사람’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해야 한다.


소문은 가볍게 퍼지고,

오해는 오래 남고,

이미지는 쉽게 만들어지지만

정작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늘 가장 늦게 발견된다.


나는 이제야 그 단순한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걸 늦게 알았더라도

이제라도 알게 된 게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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