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래엄마는 아파트단지 내 도서관(넓은 세상도서관) 모임 중 하나인 ‘갱년기협회’에 나간다. ‘000 협회’라니, 모임의 규모(?)가 짐작된다.(^^) 갱년기를 전후로 한 중년 여성들의 모임이지 싶다. 도서관에서 책모임을 하거나, 자원봉사를 하는 이들, 아파트 이웃 주민들이 ‘갱년기’로 의기투합한 모임일 듯싶다. ‘모종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가.
한국사회라는 특수성(?)에 비춰볼 때, 중년 여성의 삶은 잘 설명(?)되지 않는 어떤 ‘힘’을 장착하는 때이다. 이 시기는 집안에서 확실하게 ‘주도권’을 갖는 시기이다. 자식들과의 관계에서나, 남편과의 관계에서나 확실하게 ‘실권’을 행사하는 시기이다.(믿거나 말거나, 인정하거나 말거나) 그런 그녀들이 중년의 이름으로, 갱년기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여하튼 나래엄마는 이 모임을 꽤나 애정하며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녀 스스로도 ‘갱년기에 들어선 것 같다.’라고 진단하면서, 어떤 정체성의 혼란을 보이기도 한다. (정체성의 혼란이라고 표현해 보지만, 혹자는 그것을 ‘짜증 부린다.’라고 말한다.)
나래아빠인 나도 나이를 잊고 사는 것이 좋고, 불가피하게 나이를 거론해야 할 경우라면 굳이 ‘약봉지 나이’를 깐다. 2023년 ‘약봉지’ 나이로 통일이 되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 참 좋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나이로 세대를 구분하는 경계선이 모호해지기도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나이 듦’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이런저런 탈출구를 찾아보지만, 뾰족한 수가 있을 수 없다. 나래아빠도 간혹 정체성의 혼란(!)을 호소한다. 누군가는 나래엄마와 마찬가지로 ‘갱년기 증상’으로 진단한다. 나 스스로는 “성격이 급해서 그래. 그게 잘 안 고쳐질 뿐이야.”라고 반박한다. 정확히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아니, 모르고 싶다.
어느 부부나 그렇듯이, 우리 부부도 가끔(?), 서로 민감한 경우(점잖게 표현)가 있다. 부부사이의 문제는 셀 수 없이 많겠지만, 그중 ‘갱년기’도 한몫하고 있다. 중년, 나이 듦은 몸의 변화와 함께, 심리 변화가 따른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세대 변화와 심리 변화.
심리변화의 한 복판에는 불안 심리도 자리한다. 젊음과 그 시절로부터 멀어지고,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어떤 불안이다. 다가오는 미래를 살아가는 것에 대한 불안도 있다. 그런 심리를 ‘고독’이라고 해야 할지, ‘외로움’이라고 해야 할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이런 불안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고, 가장 가까이 있는 이와 나누고 싶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부부가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해 주면 퍽 다행이다. 그런데 갱년기가 문제가 되어 서로가 문을 닫거나, 한쪽이 문을 닫게 되면 ‘갱년기의 질곡’으로 빠져들 수 있다. 각자 자신만의 질곡이나 딜레마에 빠지게 되고, 간혹 문제를 상대에게 돌리게 된다.
나래엄마는 갱년기의 질곡을 갱년기협회를 통해 헤쳐 나가고 있다. 모임에서의 지지와 위로는 일종의 ‘사회적 돌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좋은 동네, 좋은 이웃이 있으면 좋은 이유이다. 힘들 때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웃의 관계, 사람의 관계가 있는 곳이 건강하다. 나래엄마와 달리, 나래아빠는 자신의 골방에서 은둔, 기거하고 있다. ‘자립, 독립’ 어쩌고 하면서 말이다.
‘나래네’는 갱년기 부부에 이어 사춘기 딸이 있다. 갱년기 두 명과 사춘기 딸 한 명. 숫자상으로는 갱년기가 2대 1로 ‘우위’이다. ‘사춘기 딸이 갱년기 부모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라고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다.
한편 안쓰럽기도 하다. 맘껏 사춘기를 뿜어내고, 사춘기의 권리나 권력을 누릴 시기인데, 종종 갱년기 부모에게 ‘상황’을 선점당해 버리곤 한다. ‘사춘기’ 딸이 비집고 들어가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 제 때 누렸어야 할 사춘기의 채워지지 않는 몫이 불만으로 쌓일 수밖에 없다.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한반도 주변 정세나 세계정세가 만만치 않게 돌아가고 있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나래네 정세도 한반도 주변 정세 못지않게 불안하고 때론 위태롭다. 그런데 다행이다. 딸은 지금 동네에서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과정을 다녔다. 언제든 수다를 떨 수 있는 마을 친구이자 학교 친구들이 있다. 친구들과 수다를 통해 엄마와 아빠 뒷담도 하면서 자신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있지 않을까 싶다. 현재까지는 겉으로 큰 탈은 없어 보인다. ‘평화의 시대’로 보인다.(부디 아무 일 없기를^^)
그렇다면 나래네 ‘평화의 시대’는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 것일까. 나래 엄마는 딸의 강력한 지지자로서 협상을 맺고 있다. 나래아빠는 먹는 것을 좋아하는 딸에게 가끔씩 과자를 투척하는 것을 통해 불만을 잠재우고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것은 일시적인 ‘미봉책’에 가깝다. 나의 태도를 지켜보는 나래엄마의 시선만 봐도 그것은 명확하다.
나래와 나래엄마는 돈독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음이 분명하다. 나는 갱년기 부부관계와 사춘기 딸과의 부녀관계 모두에서 불안하고 위태롭게 ‘기거’하고 있다. 삼자 동맹관계를 맺고서 ‘기거’가 아닌, 확실한 ‘동거’의 관계 속에서 ‘안정감’을 찾고 누려야 함에도 현재로서는 위태롭다. 이미 나래엄마와 딸의 동맹관계가 너무 공고해져서, 다른 틈을 찾기가 어려운 상태인지도 모른다.
한편 이런 엄혹한 현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나만의 세계를 ‘고집’하고 있다. 이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있다. 셋 중에 가장 ‘꼴사나운 모습’으로 말이다. 이런 때는 2대 1로 내가 불리하다. 갱년기 부부와 사춘기 딸이 불안한 듯 공생하는 나래네의 모습이다. 특히 갱년기 부부의 위태로움은 나래가 ‘균형자’ 역할을 하면서 ‘위험관리’가 되고 있다.
코로나 위기 이후 세계가 미국과 중국의 대결구도를 중심으로 ‘강대강’ 구도, ‘자국 우선주의’로 가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켜보면서 세계정세가 ‘신냉전시대’로 가는 것을 우려한다. 이러한 세계의 대결구도와 흐름은 한반도 평화와 직결될 수 있어 엄중한 문제이다.
복잡하고 엄중한 국제질서와 결부되어 있는 한반도에서 남과 북이 특정 국가와의 동맹관계를 필요 이상으로 강화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상대편(진영)을 자극하여 자칫 어렵게 유지되고 있는 ‘균형’을 깨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잘 예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여 어떤 계기로 인해 위기가 생겨서 이러한 균형이 깨지더라도, 다시 본래의 균형을 되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균형자의 역할’이다. 균형자의 역할,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한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