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참사의 가장 큰 책임은 기업에게 있다. 기업은 법적인 규제가 아니더라도, 기업 스스로 소비자들에게 안전한 제품을 만들 책임이 있다. 너무도 당연한 원칙임에도 이러한 원칙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이유는 그 사회의 수준에서 기인한다.
소비자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회인지. 아니면 기업의 이윤추구 행위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회인지.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후자인 한국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가습기살균제참사 이후의 사회는 이전 사회와 확연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소비자가 봉이 아닌 사회여야 한다. 소비자의 생명과 안전의 가치가 최우선으로 여겨지는 사회여야 한다.
우리 사회는 가습기살균제참사와 4.16 세월호참사와 같은 재난 참사를 겪었다. 다시 발생한 10.29 이태원참사는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그동안 산업현장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희생을 당했다.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죽거나, 시민재해로 무고한 시민들이 죽는 중대재해가 더 이상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중대재해처벌법’을 만들어 냈다. 어렵게 도입된 이 법이 후퇴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가습기살균제참사를 거치면서 도입된 화학물질등록평가법, 화학제품안전법, 화학물질관리법(이하 화학 3 법)이 후퇴되어서는 안 된다. 기업의 불법을 억제하고 소비자들의 권리 구제를 위해서 집단소송제가 도입되어야 하고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도 더욱 확대, 강화되어야 한다. 제품안전기본법과 소비자기본법, 제조물책임법이 소비자의 생명과 안전을 중심으로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기업들은 안전 관련 법과 제도의 규제를 준수해야 하며, 이를 위해 안전관리 역량을 쌓을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은 안전 확보를 위한 국제적 노력에도 적극적으로 부응해야 한다. 가습기살균제참사 당시 유엔 인권보호관이 한국을 방문해서 현장 조사를 했었고, 개선안을 권고했다.
국제사회에서 생명과 인권, 안전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논의하고 도입을 진행하고 있는 기업 공급망 실사제도, 기업 인권경영 제도, 기업에 대한 사회책임투자를 강화하기 위한 ESG(환경, 사회, 거버넌스)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나는 가습기살균제참사 피해자 활동을 하면서 중대재해처벌법 도입을 위한 사회적 논의('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연대')에 부분적으로 참여한 경험이 있다. 기업의 불법행위로 중대재해를 일으킨 기업에 대해서 영국의 '기업살인법'과 같은 엄격한 처벌제도를 도입하자는 논의였고, 법안 제정을 위한 시민사회 운동조직이었다.
가습기살균제참사의 경우 엄청난 인명 피해 규모에도 불구하고 가해기업들은 업무상 과실치사상죄와 표시광고법 위반 등으로 5년에서 7년 징역형 처벌을 받는 것에 그쳤다. 송방망이 처벌 수준에 불과했다. 이러한 약한 처벌로는 중대재해를 막을 수 없다. 강력하게 처벌할 수 있어야 법의 예방효과(억제효과)가 발생한다.
2016년 당시 국민연금공단이 몇몇 가해기업들에게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나는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 가족모임(가피모) 대표로 시민단체들과 함께 해당 국민연금공단 앞에 가서 규탄했다. 국민연금의 기금규모는 국내 최대이며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정도의 투자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공적 기금이다.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낳은 기업에 공적기금이 투자되고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공적기금이라면 기금 수익을 얻는 데 있어 사회적 정의 기준에 합당해야 한다.
설령 가해기업이 해당 사실을 몰랐을 때 투자했다고 하더라도, 가해 기업의 행태가 드러난 경우라면 투자를 철회하던지, 아니면 주주로써 적극적인 주주개입을 시도해야 한다. 국민연금은 이러한 조치 사항에 대해 주주들과 국민들에게 알려야 한다. 당시 국민연금의 대응은 충분했을까.
ESG 도입과 같은 사회적 논의가 적극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바람직하다. 국민연금의 ESG 투자 가이드라인을 통해 제품안전사고와 같은 소비자 안전 이슈를 강화하여 기업의 안전관리 역량을 강화할 필요성이 있다. 공적기금의 투자는 사회적 책임투자, 즉 환경이나 인권 등 사회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투자가 이뤄질 수 있도록 관리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