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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언니 Nov 23. 2023

E 같아 보이지만 I입니다.

경계성 내향인

 MBTI 검사를 해보니 할 때마다 I 가 나온다. 뭐 그마저도 65% 정도로 엄청 우세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늘 I성향이라고 나온다. 가끔씩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MBTI 이야기가 나오면 나의 결과를 말해준다.

"나 INFP 이거나 ISFP 야."

그러면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묻는다.

"네가? 아닌 거 같은데 계속 I로 나온다고?"

 뭐 믿지 못하는 투의 말들을 말이다. 이래 봐도 나 혼자 집에서 뒹굴뒹굴하는 거 좋아하고, 약속이 있어 외출하고 오면 기 빨려서 엄청 힘들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놔야 그제야 '아그렇구나' 정도의 반응이 돌아온다.


 - 사람을 만나는 것은 좋지만, 먼저 약속은 잡지 않는다.

약속을 잡기까지 오만가지 생각이 들어 그럴 수도 있는데, 혹시 상대가 바빠서 거부할 수도 있는 거고 또 나 역시 만나기까지 많은 일과들을 정리해야 하니까 그렇다. 물론 예전에는 먼저 약속을 만들어 보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던 때가 있었다. (그땐 아마다 내성적인 성향을 20대라는 젊은(?) 나이의 특수한 조건 속에서 내 본모습을 감추고 사회생활을 했기에 그랬던 거 같다.)

 집에 있기보다는 저녁마다 주말마다 사람들 속에 있어야 내가 이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어 약속에 집착했다.

 "오늘 진짜 재밌었다. 다음 주엔 어디서 볼래?"

방금 전까지 놀아놓고선 저렇게 무리하게 약속을 잡으려 했다.

 "다음 주? 글쎄 별일 없으면 보지 뭐."

이때 상대의 대답이 저렇게 돌아왔는데, 이건 뭐지 싶었다.

‘나와의 약속은 우선순위가 아니란 말인가? ’

 아직 약속이 없는데 너와의 약속은 차등이라는 뜻인가? 억측이 난무하는 생각들을 뒤로 한채 알겠다며 대답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엔 약이 바짝 올랐다. 나를 그저 잉여 지인으로 여기는 상대가 무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랑 먼저 약속을 잡자는 건데 이걸 이렇게 물 먹이나? 근데 시간이 흘러 생각해 보니 (아주 한참만에 떠오른 생각) 내가 부담을 줬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저 혼자 저렇게 생각했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 뒤로는 상대의 상황을 고려하게 되고, 나 역시도 무리해서 약속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 뒹굴뒹굴 재충전의 시간을 기다린다.

 상대의 관점에서 한 번 더 생각하며 대화를 하게 된 이후로는 혼자 있을 때 오늘 있었던 일들을 다시 한번 복기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혹시나 내가 말실수한 것은 없는지, 혹시나 내가 말할 때 상대의 표정은 어땠는지, 혹시나 상처가 될만한 말을 한건 아닌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다 보니 집에 오면 기가 빨려 녹초가 될 수밖에 없었다. 흡사 정장을 입고 외출했다가 집에 와서 파자마로 갈아입었을 때의 긴장이 풀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쉬는 날엔 누군가를 만나기보다는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혼자 뒹굴뒹굴 거리며 오로지 본능이 하라는 데로 생활하고 싶은 딱 하루가 필요하다. 그래야 나는 또 내일부터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실수하지 않으려 티 나지 않게 노력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재충전의 시간이 없으면 기가 막히게 내 체력은 떨어지기에 나름 조절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서로 연락이 없으면 혹시나 약속이 취소될 수도 있겠구나 싶어 살짝 신난다.

 집에 있는 즐거움을 알게 된 후로는 무리해서 약속을 잡지 않지만 어쩌다 약속이 잡히면 당일날까지 혹시나 싶은 생각에 약속 시간까지 조용히 있는다. 그러다 약속이 취소되기라도 하면 아쉽지만 땡큐 하는 마음으로 "괜찮다." 상대에게 말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이 취소되지 않는다면 취소를 기대했다는 것을 들키지 않게 상대에게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한다. 마치 오늘만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3시간을 아주 재밌게 보내고 나면 그 이후부터는 나도 어쩌지 못하는 급격한 체력 저하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 현상을 애써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다. 그것은 나도 모르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상대는 급기야 나를 배려해 주기 시작한다.

"이제, 집에 갈까?"


 어릴 땐 내성적인 성향을 눈물로 표현했다. 그러다 20살이 되고 사회인이 되면서 우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후론 울기보다는 냉철하게 생각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결국 내향인의 모습을 가리는 외향인의 가면을 쓰게 되었다.

내향인이어도 뭐 괜찮다. 우리 내향인들은 주변 변화에 민감한 반면 격변의 시기를 거치면서 나름 잘 감추며 사는 방법을 터득해 왔다. 이런 내향인의 성향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저 나를 잠시 스쳐 지나갈 사람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내 곁에 남는 사람은 어떤 모습의 나라도 다 받아주기 마련이다. 제일 나다운 모습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결국 트러블없이 사는게 어쩌면 가장 나다운 모습이며 내 평생의 인생목표일지도 모르겠다.


시절인연-인연이 맞아 일이 잘 풀리다가도 어느 때부터 잘 풀리지 않거나, 마음이 맞던 사람과 자꾸만 엇나가게 되면 그때가 바로 인연이 다한 시기라고 한다.
 

잘 가요. 나의 옛 인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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