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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메이트 Sep 15. 2024

라 로비아(시골) 탐방기

나>> 움미(엄마). 얄라 넴시우 라 로비아(시골 갈까요)?

시어머니>> 와하(오케이)!

엄마는 시골에 가는 것이라면 언제든 환영을 하신다. 엘 자디다에서 마라케시로 가는 중간지점 즈음에 자리한 시골마을은 엄마가 어려서 나고 자라신 곳이다. 그리하여 시골에 가실 때마다 엄마는 마치 열여섯의 꽃다운 소녀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고 하셨다.



오늘은 엄마가 그리도 노래를 부르시던 시골마을, 시디 베누르에 드디어 가는 날. 남편과 나와 엄마 이렇게 셋이서 나들이를 간다. 꽤 먼 거리인데 나는 면허가 없기에 남편이 운전은 도맡아 하였다. 미안 붑커.. 한국에 돌아가면 이번엔 정말 정말 면허부터 따야겠다.


시디 베누르에 도착하면 우리나라의 읍내와 비슷한 조그마한 번화가가 나온다. 그 곳에서 우측으로 꺾어 인적이 드문 좁은 길을 주욱 운전해 들어가면 엄마의 고향마을에 다다른다.

모로코의 여름은 우리나라와 반대로 건조하여 시골에 풀 한포기를 보기가 어렵다. 봄이 되면 비도 자주 오고 농사짓기에 그만인 날씨가 이어져, 푸른 풀밭에 당나귀가 평화로이 수레를 끄는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헌데 오늘 우리가 보는 시골은 푹푹 찌는 더위에 모래바람이 풀풀 날리는 여름의 시골이라 엄마가 조금 아쉬워 하셨다. 그래도 나는 시디 베누르의 시골마을에 처음 와본다는 사실 만으로 마냥 설레기만 하였다.

8월 여름에는 볼 수 없는 봄날의 모로코 시골풍경

오늘 우리는 엄마네 친구분인 '라티파' 이모님을 방문할 예정이다. 엘 자디다에서 우연한 계기로 엄마에게 도움을 받으신 일이 있은 후 둘도 없는 절친한 사이가 되셨다고 한다.

흙벽으로 둘러싸인 집의 외관이 임릴(Imlil, 마라케시 근처의 고산마을)의 옛날식 집들을 연상시켰다. 철문을 콩콩 두드리자 여섯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문을 열어주었다. '자이납'이라는 이름의 아이는 라티파 이모의 손녀였다. 얼마나 붙임성이 좋고 착한지, 라티파 이모의 집에 머무는 동안 내 옆에서 떨어지질 않으면서 나를 챙겨주었다.

자이납을 시작으로 라티파 이모와 그 식구들이 모두 나와서 우리를 반겨주셨다. 모로코는 손님을 환대하는 문화로 유명한데, 시골 사람들은 그중에서도 더욱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속을 갖고 있다.

들어가자마자 강렬한 색깔의 시데리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찬장의 깊숙한 곳이나 시데리의 주변으로는 평소 가족들끼리의 식사에는 사용하지 않고 귀한 손님이 왔을 때에만 대접용으로 쓰는 식기들이 진열되어 있다.


우리가 시데리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라티파 이모는 차와 다과를 내오신다. 다과라고 하기엔 벌써 상다리가 후들거리는 것 같지만.

시골에서 마시는 차는 도시의 차와는 다른 맛이 난다. 그 이유는 우물에서 길어낸 물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우물물만 따로 마셔도 보았는데 내 입에는 조금 짠맛이 났다. 실제로 소금기가 있는 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짭짤한 맛이 더해져서인지 허브티로 우려냈을 때의 맛이 더 진하고 달게 느껴졌다.

아래 사진의 우측에 보이는 얼굴보다 커다란 빵 홉스는 시골의 화덕에서 직접 구워낸 것으로, 길거리에서 파는 손바닥만한 홉스에 비해 그 크기가 서너배는 되어 보였다.

그리고 오늘 다과상의 주인공은 대망의 즈브다(버터)이다. 사진에서 맨 아래 가운데에 노란색의 즈브다가 보인다. 이 즈브다는 일반 즈브다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귀한, made in 시골 100% 기농 소젖을 손으로 꼭꼭 짜 만든 자연산 즈브다였다. 값을 매기기도 어려워 누가 팔라고 해도 팔지 않고 자급자족이나 손님 선물용으로만 쓴다고 한다. 리자로는 '즈브다 벨디야(버터 자연산)'이라고 부른다.

1차 다과상

갓 구운 뜨끈한 홉스의 귀퉁이를 떼어 즈브다 벨디야를 듬뿍 찍어 입으로 아암 가져갔다.

붑커>> 앗. 즈브다 벨디야는 맛이 일반 버터와 다르게 매우 진해서 조금만 찍어도 강한 맛이 날거야.

엇. 그렇구나. 남편의 말에 버터를 약간 덜어내고 다시 아암 맛을 보았다.

나>>!!!!!

게슴츠레한 내 두눈을 번뜩 뜨이게 하는 맛이다. 고소함의 깊이가 다르다. 치즈는 좋아하지만 버터는 그다지 즐기지 읺아서 모로코 아침식사마다 상에 놓이는 버터를 거의 찍어먹는 일이 없던 나인데. 이 즈브다 벨디야는 윤기가 좔좔 흐르면서도 좀처럼 느끼하지 않아 나혼자 반접시는 먹은 것 같다.


2차 쿠스쿠스

다과만으로도 배가 불러오는데 메인 요리는 사실 아직 나오지 않았다. 바로 위 사진의 쿠스쿠스와 르반이다. 닭고기를 안에 담고 그 위에 야채가 줄줄 흘러 내릴 때까지 쌓아 만든 쿠스쿠스였다. 이 역시 그 맛이 여태껏 맛보지 못했던 특별함을 갖고 있었다. 비결은 '스멘'에 있다. 버터와 비슷하지만 그 만드는 법이 발효를 거쳐서 버터와 향이 확 달라지는 '스멘'은 우리나라로 치면 청국장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스멘만 따로 냄새를 맡으면 꼬릿한 발냄새 같은게 나지만, 쿠스쿠스를 만들 때 이 스멘을 넣으면 그 감칠맛이 폭발하게 된다. 특히 시골의 자연산 스멘은 그 향이 남다르고 시중 판매되는 스멘이 따라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다. 그 때문에 시골 쿠스쿠스 또한 그 맛이 다른 차원에 있게 되는 것이다.

엄마는 끼니 때마다 내가 많이 못먹는다고(실제로는 많이 먹었다. 그저 엄마가 먹이는 걸 너무 좋아하실 뿐..) 걱정하셨는데, 오늘은 쿠스쿠스가 바닥이 보일 정도로 잘 먹는다며 안심하셨다.


위 사진에 쿠스쿠스 말고 또 하나 보이는 것이 있다. 바로 '르반'이다. 우유에서 버터가 되어가는 중간 과정 즈음에 있는 시큼짭짤한 음료가 바로 르반으로, 쿠스쿠스와 함께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트에 가면 쉽게 살 수 있는 것이 르반이지만, 시골의 르반과 같은 맛이 나는 르반은 절대 구할 수 없다.

나는 과거에 모로코에서 라마단을 지내다가 빈속에 르반 한컵을 두세에 나누어 빠른 속도로 들이켰다가 배탈로 된통 고생을 한 기억이 있다. 그 뒤로는 르반을 병아리 물 마시듯 홀짝홀짝 몇방울 마시는 것 말고는 입에 댈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골 르반을 맛보자 그 지독했던 배탈도 잊히는 듯 하다. 한모금 머금자 우리나라의 잘 삭힌 걸리처럼 혀끝에 닿아 톡톡 터지는 자잘한 공기방울이 느껴진다. 새큼한 향이 코속까지 올라온 다음 목구멍을 시원하게 쓸고 내려간다. 가 부른가 싶다가도 르반 한모금을 마시면 개운하게 위장이 다시 비워지는 느낌이 들면서 쿠스쿠스로 손이 몇번은 더 가는 것이었다.



라티파 이모 댁의 부엌에 난 작은 창을 열면 젖소와 닭들이 뛰노는 뒤뜰과 빵을 굽는 화덕이 보인다. 로 저 소들에게서 나온 르반과 즈브다로 조금 전 맛있는 식사를 했다고 생각하니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다.


거하게 식사를 마친 후 라티파 이모는 동네에서 헤나를 전문으로 하시는 또다른 이모를 초대하셨다. 보통 새신부가 있으면 결혼식에서 선물을 주는데, 나와 남편은 결혼식을 따로 올리지 않아 선물을 줄 기회가 없었다고 하시며, 헤나라도 해주고 싶다고 하셨다.

얻어먹은 음식만 해도 충분하고도 넘치는데 헤나까지 해주겠다고 하셔서 나와 엄마는 거듭 괜찮다고 했지만, 라티파 이모는 '알라에게 맹세코 헤나를 해주고 싶다'고 하셨다. 이슬람에서는 누군가가 '알라에게 맹세코 ~을 할 것이다'라고 했을 때 그 말이 지켜지지 않으면 말을 한 사람이 3일간 금식을 해야 하는 규칙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호의를 베풀고 싶은데 상대방이 괜찮다며 손을 저을 때, '너에게 이걸 꼭 해주고 싶어. 안그럼 내가 3일간 금식해야 한다?"라는 의미로 써먹는 말이 '왈라(알라에게 맹세코)'이다. 그럼 상대방도 '이 사람이 진심을 다해 나에게 베풀길 원하는구나 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나는 양손등과 양손바닥, 그리고 양발등까지 멋진 헤나를 그린 채로 라티파 이모의 시골집을 나오게 되었다.

태어난 지 한달도 안되었다는 라티파 이모의 막내 손녀딸. 모로코에서는 갓 태어난 아기의 머리맡에 손님들이 저렇게 용돈을 놔두고 가는 것이 관례이다.


라티파 이모는 집을 나서는 우리에게 바리바리 선물을 싸주셨다. 귀하디 귀한 시골 유기농 스멘, 즈브다, 르반이 우리차의 트렁크에 가득 실렸다. 받은 것에 비해 우리는 너무 빈손으로 온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들었지만, 곧 라티파 이모네가 엘자디다에 놀러올 때가 되면 엄마는 오늘 받은 것의 몇배로 대접을 하실 것이니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된다. 또 오늘 우리가 이렇게 환대를 받기 전, 과거에 라티파 이모도 엘자디다 엄마댁에 며칠간 손님으로 머물며 지내신 적이 있었다고 한다. 거니 받거니. 이것이 바로 모로코 웰컴이다.



나>> 움미(엄마). 음.. 아 여보야 이건 데리자로 못하겠다. 

붑커>> 뭐라고 하고 싶은데?

나>> 시골에 다녀오니까 엄마가 한참 어려져 보이신다고. 얼른 통역해!

남편의 통역을 듣고 햇살처럼 웃으시는 엄마는 신기하게도 우윳빛깔 피부에 주름살도 보이지 않고 목소리에도 평소보다 힘이 실렸다. 그날의 시골 여행은 아마 시간 여행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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