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 중학교 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더니 어느 새 아이들은 훌쩍 자라 기숙사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당시 나는 여전히 직장과 교회, 집 삼각형의 구도를 오가던 숨 막히던 다람쥐 쳇바퀴라 내 일상을 못 바꿔도 적어도 주변 환경만이라도 회색에서 녹색으로 바꿔야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고등학생이었지만 철이 들었는 지 장남 왈,
"엄마 힘들면 직장 명퇴는 못 해도 가사로부터 명퇴하세요~"
그 말에 힘 입어서 과감하게 학교 내신을 지리산 쪽으로 내었다.
첨에 남편은 도시의 넓고 큰 아파트를 두고 홀로 떨어져 나감을 좋게 여기지 않았지만 내 심신의 건강이 요구하는 거라 보고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주말부부로 몇 년 지내다가 기왕 이 곳에 왔으니 집이라도 한 채 지어서 살아봐야겠다 마음먹고 5년 전 전원주택을 짓게 되었다.
사실 전원주택도 세계일주 여행과 함께 내 인생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으니까.
그것이 2017년 이었고 끝나기 전에는 무한할 거 같았던 직장 학교도 2020년에 명퇴를 하고 나니 시골집만 덩그러니 두고 나는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제 둘다 명퇴 부부교사인 우리는 도시와 시골을 오가며 살게 되었다.
베이비 부머 마지막 세대인 나는 올해가 환갑인 1963년생이다. 그러니 한창 전원주택이 로망이었던 세대의 마지막으로서 지금은 높은 금리탓도 있지만 기왕에 지어놓은 전원주택 매물도 포화상태라 한다.
해서 집을 정리할 수도 없어 그냥 오가기에 먼 왕복 세 시간의 거리지만 그냥 마음 편하게 별장처럼 세컨드 하우스 개념으로 살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해 초에 살던 시내 아파트를 몇 달에 걸쳐 대거 리모델링을 하고 나니 역시 여자들은 아파트가 편하긴 해서 시골집을 오고 싶지 않았다. 한번 오려면 챙겨야할 짐이 만만찮고 여자들에겐 특히 주방일이 어느 정해진 한 장소, 한 공간이 편하다.
그러나 앞일은 알 수 없는 법이다. 집을 고쳐놓고 한 달 여행을 갔다 와서 나는 8월에 대장암 선고를 받았다. 다행히 수술은 잘 받았고 조기발견으로 항암을 안 하게 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인생 무엇보다 건강이 제 일번이라는 교훈을 다시 새기게되니 시골집에 대한 내 마음이 바뀌었다.
나의 건강회복을 위해서라도 공기 좋은 이 곳 지리산 자락이 최고라 한번 나서기가 서글퍼지만 오고 나면 역시 마당 있는 집이 좋기만 하다.
아파트가 편리성이 일 번이라면 뭐니 뭐니해도 전원주택은 건강이 일번인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땅에서 올라오는 지기와 발만 내 딛으면 되는 마당이 있고 동네 주위만 걸어도 하루 만보 걷기를 채울 수 있다.
오늘 10월 28일 아침에 일어나 생각하니 지난 십년 내 50대를 이 전원주택을 빼고는 정리가 되지 않을 거 같았다. 해서 이렇게나마 집짓기부터 지난 일들을 기록해서 남겨보려한다.
물론 그 때 그 때 기록해서 공유한 것이 산발적으로 있고 일기처럼 미공개 글들이 있기에 차츰 정리해서 브런치라는 공간에 묶어두면 편할 거 같다.
나는 불과 석 달전 브런치에 글쓰기를 시작했으니 아직브린이다. 하지만 지금껏 파악한 브런치의 최대 장점은 뭐니 뭐니해도 한 주제나 한 시간대를 한 권의 책으로 묶을 수 있다는 것에 있는 것 같다.
두 집을 오가는 생활, 지금 남편과 나는 일주일 째 시골집에 머물면서 남편이 데크 도색작업을 다시 하고 있다. 목재주택의 장점은 다시 색칠하면 새 집이 되는 걸 거다. 그러나 그 장점이 단점인 것은 번거로운 관리이지만. 인생도 사람도 동전의 양면처럼 다 그렇다고 본다.
어둠이 있어 빛이 빛나듯 그렇게 돌봐야하는 수고와 노고가 있기에 누릴 수 있는 즐거움도 있는 것이 삶의 양면성이 아닐까.
오가는 귀찮음과 번거로움에도 일단 오고 나면 이 곳이 좋아 일주일이나 열흘씩 머물다 가니 아파트생활의 갑갑함을 상쇄할 수 있어서 좋다.
닫힌 공간을 싫어하고 약간의 폐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일단 시야가 막히는 걸 답답해 싫어하니 문을 열면 건물이 아닌 하늘과 자연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발이 공중에만 떠 있는 것에 예민하기도 해서 마당 있는 시골집은 내게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