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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이는 엘리 Jun 26. 2024

벚꽃비가 내리면

미루지 말자는 다짐

봄의 절정은 벚꽃이라는 생각을 한다.

제법 날이 따뜻해지자 벚꽃 나무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직 피지 않았네?’ 개화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았지만 눈꽃이 제법 통통해져 당장이라도 활짝 피어날 것 같다. 텅 빈 나뭇가지에서 분홍빛 꽃들이 팡팡 피기 시작하면 도미노처럼 거침없이 퍼진다. 분명 전날까지만 해도 마른 가지들이었는데 하루 사이에도 온 세상은 화사한 봄날이 된다. 하늘을 가득 메울 듯한 풍성한 꽃잎들은 봄바람에 살랑살랑 흩날려 강아지의 털 위에도, 아이의 손바닥 위에도, 열어놓은 가방 속에도 쏘옥 들어온다.


벚꽃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은 짧다. 화려하게 피었지만 기다림보다 짧은 만남으로 어느새 이곳 저곳에 떨어져 버린다. 거리를 청소하는 무심한 빗질에 속절없이 나부낄 뿐이다.

그제야 벚꽃을 그리워한들 떨어져 버린 꽃잎이 다시 돌아올 리 없다. 다음에 가봐야지 하고 차일피일 미뤘던 시간 속에 봄날의 벚꽃은 떨어져 간다. 미뤄버린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미루는 일은 습관이기도 하다. 집 앞 도서관에서 어반 스케치 수업이 있는 날. 10시에 수업 시작이니 아무리 집 앞이어도 9시 40분에는 출발해야 한다. 아이를 등교시키고 아침밥 식사 후 뒷정리를 하고 소파에 앉는 순간, 아뿔싸 엉덩이가 너무 무겁다. 머리도 감아야 하고 화장도 해야 하는데 유튜브를 이리저리 의미 없이 보고 있었다. 정각 되면 씻어야지, 이것만 보고 준비해야지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까지 미루다가 알람이 울리면 그제야 부랴부랴 준비했다. 집 가까이 사는 사람이 늦게 온다고 수업 시간에 지각하게 생겼다.

늦을 것 같은 때에는 엘리베이터의 타이밍도 맞지 않고 신호등도 눈앞에서 빨간불로 바뀌어버린다. 공원을 가로질러 도서관으로 가는 길. 여유 있게 나왔다면 파란 하늘을 보며 감탄하고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을 보며 따스한 햇살 속에 봄을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종종걸음으로 지나치며 마음만 급했다.

쉽사리 바뀌지 않는 신호를 초조하게 기다리다 발밑을 바라보니 도로 가장자리에 떨어진 벚꽃잎들이 모여 있었다.

벌써 봄이 지나가는구나. 기다리던 봄을 아낌없이 반겨 주었던가? 나들이 가자고, 어반 스케치를 한번 더 가자고 약속했다가 미뤄져 버린 계획들이 생각 났다. 이런저런 핑계들로 미루지 않았더라면 벚꽃이 만발했을 때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 펴놓고 소풍이라도 했을 텐데, 덥지도 춥지도 않은 봄날 골목길에 앉아 아름다운 풍경을 그릴 것을...

되돌일 수 없는 순간이란 것을 알면서도 미룬 탓에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미루다가 지나가버린 것은 봄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수업이 시작됐다. 시간에 쫒겨 급하게 나오느라 준비물을 식탁에 올려둔 채로 그냥 나왔다.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조용히 뒷자리에 앉았다. 카펫처럼 바닥을 분홍색으로 가득 물들인 벚꽃잎들이 아른거렸다.


다음 수업 날 아침. 습관처럼 보던 핸드폰을 내려놓고 미리미리 준비를 했다. 가방에 준비물도 잘 챙기고 커피도 내려 텀블러에 담았다. 오늘은 늦지 않아야지. 미루지 말아야지.

봄바람에 하얗게 흩날리는 벚꽃비를 맞으며 이 눈부신 하루는 미루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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