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살다 보면 한 번씩 찾아오는 선물
서로 얼굴을 보며 인사하는 것보다 SNS로 안부인사를 하는 것이 더 흔한 요즘, 가장 많이 받는 인사말이 "행복하세요"인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항상 행복하세요" 또는 "행복하자"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인사를 건네는 이유는 사람들이 행복을 열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평소 존경하는 선배님으로부터 19세기까지 우리나라는 물론 동양에는 "행복"이라는 단어나 개념이 없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행복(幸福)"이라는 말의 기원에 대해 찾아보았다.
"행복"이라는 개념이 동양에는 원래 없던 것이라면, 그 기원은 어디일까?
1) 고대 그리스어의 '에우다이모니아(eddaimonia)'는 행복(happiness), 번영(prosperity), 행운(good fortune) 등의 의미라고 한다. 이 말은 접두어 eu-(좋은, 잘)와 daimon(신 god, 여신 goddess, 정령, 운명)의 합성어로, 좋은 운명, 좋은 재능, 행운, 우연 등과 관련된다. 즉, 행복은 '신이 부여한 행운' 정도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2) 철학사전을 살펴보면, "어원으로 보면 행복이라는 말은 우연, 기회와 관련된다. 행복은 불행과 마찬가지로 예기치 않게 우리에게 찾아오는 그 무엇이다. 그런데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완전한 소유를 거부한다. 때로 행복은 쾌락이나 기쁨과는 달리 만족의 지속적인 상태로 정의되기도 한다." (철학사전, 동녘)
3) 영어 happiness의 어원은 happen(일어나다, 발생하다)이라고 한다. happy의 어근은 'hap'인데 이 말은 chance(우연), luck 또는 fortune(운)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happniess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운이 좋아 발생하는 것'이다.
happiness가 오늘날의 '행복'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밴덤이 1789년 저서에서 공리주의를 주장하면서 행복을 '쾌락'과 같은 의미로 처음 사용하면서부터라고 한다. 바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동양에서 '행복'은 1860년대 이후 일본에서 처음 쓰였는데, 제레미 밴덤의 저서를 번역하면서 일본어에 없던 happiness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매우 고심한 끝에 물질의 풍요와 관련 있는 '다행 幸'과 '복 福'을 붙여 '행복(幸福)'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happiness를 '幸福'으로 번역한 영일사전 <諳厄利亜国語林大成>에서 '幸福'은 happiness뿐 아니라 fortune과 luck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즉, happiness를 물질적 풍요를 뜻하는 한자 표현과 달리 '하늘이 내려주는 복' 정도로 이해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행복'의 원래 뜻은 '어쩌다가 얻게 되는 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순간적인 경험이며 곧 사라지는 감정이다.
그러나, 이 단어가 일본으로부터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행복'의 의미가 '물질적인 풍요'로 변질된 것 같다.
사람들은 행복을 열망한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열심히 산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헛된 행복을 좇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야 남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고,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헛된 행복관이 삶을 왜곡한다.
열심히 노력하면 행복을 잡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잡은 행복은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인생은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라는 말에 공감한다.
합격만 하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일 것 같았던, 그토록 열망했던 대학 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 그 행복감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던가? 나는 일주일이 채 안되었던 것 같다. 새로운 고민거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잠시, 괴로움은 오래가는 것이 인생 아닐까?
그래서, 나는 우리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 중 하나인 '행복추구권'이라는 말이 섬뜩하게 느껴진다. (1980년 전두환 등 신군부가 집권 후 제8차 헌법 개정 시 추가되었다)
'행복'은 법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가치가 아니라 인권이 보장되는 한 당연히 인정받을 수 있는 권리인데, 굳이 이것을 헌법에 명시한 것은 행복을 '물질적 풍요'로 정의했기 때문이 아닐까? '행복추구권'이라는 표현이 일본과 한국의 헌법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행복추구권’이 내게는 자본가를 적극 보호하겠다는, 그래서 그들이 행복(?)을 추구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자들은 헌법의 이름으로 응징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이건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행복이란 노력해서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찾아오는 일시적인 감정이다.
불행 없이는 행복도 없다고 한다. 만약,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어느 누가 행복을 가치로운 것으로 여길 수 있을까?
행복을 좇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다 보면 선물처럼 한 번씩 찾아오는 것이 '행복' 아닐까?
<Sunshine on my shoulders - John Denver>
행복은 때로는 어깨에 내리쬐는 따사로운 햇볕만으로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