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날아보겠다고 크게 마음먹었다. 화장대 서랍 속 깊숙한 곳에 있던 여권을 꺼냈다. 2019년 9월에 만료되었다. 그동안 참 무심했구나. 2019년 울산으로 이사 가고, 아프고, 2020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여권 갱신 문자를 분명히 받았을 텐데 기억이 없다. 아니 그 정신없던 시간들을 살아가며 감히 비행을 꿈꾸지 못했던 것 같다.
오랜만에 여권 페이지를 넘기며 잠시 옛 생각에 젖어들었다. 10년마다 만든 여권을 보니 시기별 인생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출입국 스탬프를 통해 기록되어 있었다. 동시에 여권 3개를 통해 우리나라 여권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1961년 여권법이 제정되고 여권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기업인이나 공무원을 대상으로만 한정적으로 발급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의 영향으로 1989년부터 해외여행자유화가 이루어지면서 개인을 대상으로 한 여권발급이 증가했다.
1994년 기계판독 여권의 발급이 시작되면서 출입국 심사가 빨라지는데 기여했다.
2008년 여권소지자의 식별을 위해 바이오매트릭스 정보를 포함하는 마이크로칩을 넣어둔 전자여권이 발행되었다.
2020년에는 보안이 더욱 강화되고 디자인이 변경된 차세대 전자여권이 발행되었다.
2000년 인생 첫 여권을 만들었다.
모든 처음이 그렇듯, 나도 처음으로, 그것도 혼자서, 내성적인 내가, 해외로 나간다는 생각에 빈 여권 페이지를 보며 참 많이도 설레었다. 그 여권을 들고, 20대 중반 공부를 해 보겠다는 꿈을 갖고 미국을 드나들었다. 뉴욕에서 7개월간의 어학연수, 졸업 후 다시 하와이행을 택했다. 아시아계 미국문학 전공이라는 비주류 문학을 해보겠다는 꿈을 안고서. 그러나 꿈은 실현되지 못한 꿈으로 남아버렸다.
10년 뒤 두 번째 여권을 만들었다. 첫 번째 여권이 학업용이었다면 두 번째는 출장용이었다. 남의 돈으로 꽤 여러 나라를 다니기 위해 소지했던 밥벌이용 여권이라 할 수 있다. 하와이 대학교 졸업 후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취업을 했다. 영어를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국제교류"라는 키워드로 일자리를 찾은 결과 10년 동안 영어를 쓰는 일을 하다 보니 자연히 해외출장이 잦았다. 그 덕분에 제대로 된 마음 편한 관광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여러 나라 땅에 발을 디디고 공기는 마셔봤다. 폴란드, 덴마크, 스웨덴, 그리스, 터키, 스페인, 영국, 중국, 캄보디아, 베트남, 호주에 한 번 이상씩 다녀왔다. 결혼 후, 어린아이들을 두고 출장을 갈 때면 걱정과 미안함으로 항상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그런 기분도 잠깐이었다. 지금도 식구들은 가끔 나 없는 동안 힘들었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마음은 무거웠지만 일상의 단비 같은 해외 출장을 가끔은 사랑했다. 당시 유행하던 킨더조이 초콜릿을 아이들에게 안기며 출장의 피로를 풀기도 했다. 특히 아빠가 돌아가시고 힘들 때 떠난 터키 출장은 마음을 다잡고 일상에 복귀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마지막 출장은 2017년 10월 그리스 출장이었다. 그리스 바이어 미팅을 위해 회사 관계자들과 4번이나 방문했어도 항상 호텔에서 회의만 하던 아쉽고 또 아쉬운 출장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그리스신화의 나라인데 파르테논 신전을 코앞에 두고도 한 번도 바깥구경을 못한 눈치만 보던 직원이었다. 그게 마지막 비행이었다. 전문 통역사도, 번역가도 아니었지만, 영어는 내게 해외로 나갈 수 있는 큰 힘이 돼주었다. 직장 생활 10년 동안 NPO, 지방정부, 스타트업이라는 성격이 판이한 세 곳에서 일을 하며 인생과 세상을 배웠다.
세 번째 여권을 만들었다. 몸도 마음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니 다시 날아보고 싶어졌다. 디자인이 바뀐 여권을 손에 받아 들면서 새삼스럽게 처음 여권을 발급하던 20대 때처럼 설레었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졌다. 두툼한 여권페이지에 어떤 기록을 남기게 될지 아직은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2024년을 맞으며 마음속에 담아둔 버킷 리스트를 슬그머니 꺼내 다이어리에 크게 적었다.
'올해는 꼭 하와이에 다녀와야지'라고.
그래서 여권을 만들게 되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을 때 주저하지 말고 떠나보기로. 가슴 뛰는 삶을, 인생의 후반부를 잘 살고 싶다는 욕구에 이끌려. 그리고, 남편에게 계획을 말했다. 한 번은 하와이에 다시 가보겠다는 소망을 이룰 때가 온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