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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그래피 도전

아침 단상으로 글쓰기 습관 40

by 태화강고래

난생처음 캘리그래피를 배우러 갔다. 내가 알던 "캘리그래피"는 "서예"를 영어로 번역한 단어였다. 지금은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기술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서예와 캘리그래피. 왠지 모를 친근함에 나와 어울리는 취미활동 같았다. 초등학교 때 붓글씨 쓰기, 사춘기 때는 건너뛰고, 대학 때 서예반 동아리활동. 그 후 20여 년이 지난 오늘 캘리그래피를 만났다. 집에서 붓펜으로 교본 보고 따라 썼는데 재미있었다. 그냥 하지 말고, 돈과 시간을 투자해 성장과 변화를 경험하고 싶었다. 좋아하는 문구나 문장을 멋진 서체로 써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기대와 설렘 가득 안고 수업에 갔다.


벽면은 강사의 캘리그래피 작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나도 저렇게 쓰고 싶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글과 그림이 어우러지는 캘리그래피를 배우고 싶다는 나를 환영해 주었다. 수강생은 나를 포함해 4명이었다. 가정집 거실에 차 마시러 모인 아줌마들처럼, 편안한 분위기 속에 담소를 나누었다. 살아온 인생은 달라도 공통의 취미로 모인 사람들. 각자의 속도와 진도에 따라 집중하며 흰 화선지에 검은 먹물로 적신 붓으로 글을 써 내려갔다. 오랜만에 붓을 잡고, 가로 세로줄 긋기부터 시작했다. 두 장을 채우고, 한글 자음을 연습했다. 대학 이후 멈춰 섰던 서예가 다시 살아난 느낌이었다.


과거가 떠올랐다. 대학 새내기로서 정적이고 고리타분한 서예를 쓴다는 게 약간은 부끄러운 생각도 들 때였다. 딱히 내가 좋아서 선택한 동아리가 아니라 갈 곳 몰라 방황하던 차에 친구를 따라 간 동아리방이었다. 여학생보다는 남학생이 많았고, 복학생 남자선배들이 공강마다 와서 쉬고 가던 곳이었다. 1년에 한 번 여는 전시회를 위해 밤늦게까지 연습하고, 전시회 열고, MT 가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때 그 붓을 다시 잡게 될 줄은... 이번에는 내가 원해서 잡은 붓이라서 그런지 욕심이 생겼다. 집중하니 마음이 고요해졌다. 글쓰기처럼 또 혼자 판 굴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붓펜이 아닌 붓으로, 신영복체로 한글을 쓴다. 고(故) 신영복(1941~2016) 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의 글씨체란다. 소주 "처음처럼"과 "더불어 숲"과 같은 글씨체로 알려져 있다. 신영복 선생은 한문서체의 필법을 한글로 옮겨와 궁체와 판본체를 깨며 서민정서와 잘 어울릴 수 있는 서체를 만드셨다고 한다. 가로 쓰기를 하고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획을 쓴다. 글씨들이 어울려 어깨동무하고 있는 것 같아서 "어깨동무체"라고도 불린다. 궁체만 쓰던 내게 신선한 배움의 시간이 될 것 같다.


과거의 내 모습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다가올 미래의 모습도 보는 듯했다. 50대 중후반 여성들의 일상의 일부를 엿본 시간이었다. "좋아하는 문구를 쓰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 "스스로에게 엄격한 마음을 내려놓고 칭찬하며 편안한 일상을 살기 위해 쓴다"라고 했다. "나이 들어 할 수 있는 좋은 취미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오늘 만난 분들은 2년 이상 붓을 잡아서 올챙이 같은 내게 개구리 같은 존재였다. 캘리그래피에서 그리고 인생에서 선배였다.


캘리그래피 수업 한 번 들었을 뿐인데, 과거, 현재, 미래의 내가 한자리에 모인 경험을 했다. 그리고 하나 더, 타고난 성격이 참 변하지 않는다는 것. 싫어서 외면하고 싶던 그 성격이 나를 떠나지 않고 계속 나와 함께 나이를 먹었고, 이제는 받아들이고 두 팔 벌려 꼭 안아 환영하고 있는 듯하다. 세월의 힘이 느껴진다. 다음 주를 기대하며 집에서 화선지 펴고 한 자 한 자 힘 있게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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