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세뇌를? 가스라이팅을?

by 글라라

일요일 오후, 우연히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그 안에는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끝내 피해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 스스로를 가해자라 믿으며 평생 속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가해자의 말이 곧 진리라 여기며 살아가는 피해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서로 다른 삶의 결이 이어질 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내가 저런 환경에 놓였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나는 옳고 그름을 명확히 가려낼 수 있을까?’ 질문이 꼬리를 물고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순간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

이 단어는 1938년 영국에서 공연된 연극 Gas Light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1944년 미국에서 영화로 제작되며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이야기 속에서 남편은 아내를 교묘히 조종한다. 집안의 가스등 불빛을 조금씩 줄여놓고, 아내가 “불빛이 어두워졌다”고 말하면 “그런 일 없다”며 부인한다. 반복되는 왜곡과 부정 속에서 아내는 점점 자기 감각을 의심하게 되고, 마침내 현실조차 흔들리게 된다. 바로 이 장면에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태어났다.

그와 닮았지만 또 다른 단어가 있다. ‘세뇌(brainwashing).’

가스라이팅이 은밀하게 개인의 현실 감각을 흔드는 행위라면, 세뇌는 체계적이고 강압적으로 신념 자체를 바꾸어 버리는 과정이다. 가족이나 연인 같은 가까운 관계 속에서 조용히 스며드는 것이 가스라이팅이라면, 전쟁이나 정치, 종교 집단 같은 큰 무대에서 공개적으로 벌어지는 것이 세뇌다. 두 단어는 비슷한 듯 보이지만, 그 결은 분명 다르다.

- 가스라이팅 (Gaslighting)

핵심: 현실 감각을 흔들고 자기 판단을 의심하게 만드는 심리적 조작.

범위: 주로 개인 대 개인 관계에서 일어남 (연인, 가족, 직장 상사 등).

방식: 반복적인 거짓말, 모순된 말·행동, 피해자의 기억이나 감각 부정.

목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의존하도록 만들고, 스스로 “내가 잘못된 건가?”라고 믿게 하는 것.

특징: 은밀하고 장기적이며, 피해자가 인식하기 어려움.

-세뇌 (Brainwashing)

핵심: 강압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신념과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

범위: 개인을 넘어 집단이나 사회 차원에서 이루어짐 (전쟁 포로, 종교 집단, 정치적 선전 등).

방식: 고립, 폭력, 수면 부족, 반복 교육, 강제 고백 등 물리적·정신적 강압 병행.

목표: 기존의 가치관과 신념을 부정하게 만들고, 새로운 이데올로기나 사상 주입.

특징: 공개적·강압적이며, 가해자가 의도적으로 설계된 체계를 사용.

단어를 공부하면서 흥미롭게도, 두 단어는 닮은 듯하면서도 전혀 다르다는 점에 놀라게 되었다. 특히 가스라이팅은 가족이나 연인 관계에서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나를 보호하고 아껴주어야 할 가까운 사람이 오히려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나 자신이 ‘가해자가 된 적은 없었을까’ 하는 걱정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무심코 던진 수많은 조언들이, 누군가에게는 가스라이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오싹한 생각과 함께 말이다.

아이들에게 “너희들을 위해서 하는 말이야”라고 했던 순간, “내 말이 맞아”라며 목소리를 높였던 기억들… 지나온 시간 속에서 내가 의도치 않게 남에게 상처를 준 건 아닐까 하는 반성이 뒤따랐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조금 더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건넨 충고들이 혹시 누군가에겐 무거운 짐이 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다짐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더 많이 듣고, 더 신중히 말해야겠다고.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내게 남긴 것은 단순한 개념이 아닌, 그것은 나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게 만든, 작은 거울 같은 단어였다.

Merriam-Webster

“psychological manipulation of a person usually over an extended period of time that causes the victim to question the validity of their own thoughts, perception of reality, or memories and typically leads to confusion, loss of confidence, and self-esteem, uncertainty of one's emotional or mental stability, and a dependency on the perpetrator.”

→ 장기간에 걸친 심리적 조작으로 피해자가 자신의 생각·현실 인식·기억을 의심하게 만들고, 혼란·자신감 상실·정서적 불안정·가해자 의존으로 이어지는 과정.

Oxford English Dictionary (OED)

“to manipulate (a person) by psychological means into doubting their own sanity.”

→ 심리적 방법을 통해 상대가 자신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게 만들다.

Cambridge Dictionary

“the action of tricking or controlling someone by making them believe things that are not true, especially by suggesting that they may be mentally ill.”

→ 사실이 아닌 것을 믿게 하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믿게 함으로써 상대를 속이거나 조종하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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