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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산적 Jul 28. 2023

한 번도 다투지 않은 형제

누나나 형이 있었다면 여전히 철딱서니 없는 지금의 나에게 가지는 죄책감을 조금은 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꽤 오래 해왔다. 이런 마음을 갖는데 나의 동생은 내게 그 어떤 아쉬움도 준 적이 없기에 여태껏 집안의 온갖 소란스러운 일들을 야기한 장본인인 내가 제 발 저려 갖게 된 생각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맏이 자격이 있다면 그 기준에 한참 못 미치고 있을 나는 우리 집 장남으로 태어나고 말았고 다섯 해가 흘러 동생이 세상에 나와 우리는 형제가 되었다. 열 살 이전에 기억이 대부분 가물가물하지만 아빠와 함께 출산예정일을 달력에 줄 그으며 세었던 일과 동생의 이름을 함께 지었던 기억은 지금도 꽤나 선명하게 남아있다.


내가 물러터진 건지 동생이 수더분한 건지 그 긴 시간 나와 동생은 단 한 번의 다툼도 없었다. 흔히 형제 사이에 발생하는 투닥거림은 물론 서로에게 목소리를 높여 성낸 일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어릴 적 자기 전 깔아놓은 이불 위에서 씨름을 하다가 동생의 쇄골뼈를 금 가게 한 전력이 있긴 하지만 합리화를 해보자면 성내는 마음과 위해를 가하려는 의도가 없던 나름 공정한 경쟁이었기에 이는 예외로 두기로 하자.




모순적이게도 관계가 너무 무던하고 좋을 때면 나는 오히려 그 관계의 깊이에 의심을 갖곤 했다. 많은 경우들에서 위기와 갈등을 넘어서는 일을 경험할 때 누군가와 더욱 돈독한 관계가 되는 일이 더러 있었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말처럼, 고통 없이 얻어지는 것 없다는 말처럼 관계의 깊이를 넓히는 데 있어 갈등은 꽤나 쓸모가 있었다. 


이러한 경험이 쌓이고 나와 깊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주변에 생겨나면서 너무나 무던한 동생과의 관계가 항상 눈에 밟혔다. 마냥 무던하니 도리어 아주 깊은 속내를 보이는 일이 적었고 아무런 마찰도 없다 보니 나는 아니었지만 동생이 가지는 나에 대한 아쉬움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축구를 잘하고 좋아했던 동생은 유소년 클럽에서 눈에 띄어 어느 감독의 설득으로 한 초등학교 축구부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곧잘 적응해 중학교 진학 무렵 또 다른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축구부원으로 중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축구선수로서 미래를 그리는 것 이외에 많은 가능성들이 배제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 중요한 시기에 동생은 무릎 부상을 당했고 한동안 쉬며 재활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렸다. 한껏 몰두했던 순간에서 잠시 쉼이 주어지자 우리 부모님은 눈앞에 놓인 현실적인 상황을 두고 냉정한 결정을 해야 했다. 그 시기는 내가 한창 대학 입학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으며 아버지의 사업이 급격한 위기를 맞이했던 때이기도 했다. 집안 경제사정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나는 한국대학의 학비보다 몇 배는 높은 미국의 어느 대학으로부터 합격소식을 받아 들었다. 


맏이를 미국대학에 보내는 일과 둘째 축구 뒷바라지 모두를 감당해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선택은 나를 대학에 보내는 것이었고 동생에게는 세상에는 너무나 특별한 재능을 가진 축구 유망주들이 많고 지금이 일반학업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동생이 바라던 미래를 여기서 멈추기를 설득했다. 


얼마 전 엄마는 동생과 나눈 대화를 내게 전해주었다. 동생은 축구를 그만두게 된 당시 모든 게 형의 대학 때문이라 생각해 너무나 서운했는데 요즘 대단히 특출 난 자기 또래 선수들을 보며 그때 멈출 수 있어 다행이었으며 축구를 내려놓았기에 지금 자신에게 감사한 사람들과 순간을 만날 수 있었다 말했다고 한다. 




우리 형제에 돈독한 우애를 지켜오는 데 있어 나의 지분이 반정도는 된다 생각했다. 뭐 딱히 동생에게 내가 인내하고 참아왔던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싫은 소리 하지 않고 권위적이지 않으려 노력해 왔기에 우리 사이가 좋을 수 있다 믿었다.


엄마가 내게 전해준 동생의 얘기는 내가 참 많이 비겁했음을 깨닫게 했다. 당시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 갈등의 순간을 온전히 부모님과 동생에게 위임했고 몰랐던 건지 애써 외면했던 것인지 동생이 충분히 가질 수 있던 아쉬움을 차마 헤아려보려 하지 않았다. 


어릴 적 성악을 시작해 여러 콩쿠르에 입상하며 부모님의 기대를 받던 나는 그 열정과 흥미가 식은 탓에 나의 의지로 성악을 그만두었다. 스스로 그만두었음에도 오랫동안 그려왔던 나의 미래가 사라졌단 사실에 한동안 헛헛한 마음이 있었다. 여전한 열정에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멈추기를 설득하던 그때 동생은 너무나 서러웠고 내가 참 많이 미웠을 거다. 그럼에도 동생은 그 서운함을 내게 보이지 않았다. 


내가 누렸고 큰 감사를 느끼는 지나온 이십 대 초반의 시간은 동생이 자신의 꿈을 내려놓았기 가능했다. 




나의 일이 아니라 생각하며 그 갈등을 외면했을 때 부모님과 동생은 참 많이 아프고 쓰렸을 거다. 그 쓰라림과 인내 덕분에 우리 형제의 제법 훌륭한 우애가 잘 지켜져 온 것이다. 


지금 누군과와의 관계가 만족스러운데 본인이 그다지 수고스럽지 않다면 그 관계에 있어 누가 더 마음을 쓰고 있는지 돌아보자. 


이제껏 나와 동생의 관계에서는 동생의 쓰인 마음이 더욱 많았기에 나는 이제 나의 마음을 더 써가며 이 관계를 이어 나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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