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제29편)
코로나가 극성부리기 전, 좋은 이를 만나러 부산 가는 길이었다. 혹 술을 권하면 거절하기 곤란한 자리라 차를 몰지 않고 시외버스를 탔다. 이제 버스를 타면 옆에 누가 앉을 것인가에 대한 기대는 접는다. 몇 년째 중씰한 나이의 심쿵한 아지매가 앉은 적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옆자리가 비어 혼자 앉아 가겠구나 했는데, 버스가 막 출발할 즈음 여든쯤 돼 보이는, 시골티를 물씬 풍기는 할머니가 곁에 와 앉았다. 버스 오르기 직전 기사더러 “아자씨, 이 차 부산 가는 차 맞능교?” 하는 말로써 짐작했던 터. 그 할머니로부터 얘기는 시작된다.
할머니는 앉자마자 내게 얘기를 건넸다. 자기는 경북 봉화 사는데 울산 둘째아들네 집에 내려와 사흘 머물다 부산 셋째 딸네 집에 간다면서 말을 꺼냈다. 울산터미널에서 탔기에 나를 울산 사람인 줄 알고 어디 사느냐기에 울산 아닌 경주 양남에서 왔다고 했다.
그랬더니 경주에서 타지 않고 왜 울산에서 타느냐 해서 양남 사람들은 시외버스 타려면 울산이 편해서 그렇다고 대충 넘기려 했다. 헌데 할머니는 그 정도론 성이 안 차는지 이번에는 무슨 일로 부산 가느냐, 또 거기에는 누가 사느냐 등등 이어졌다.
그제사 처음부터 무뚝뚝하게 대하지 못하고 예의 바르게 대답한 걸 곧 후회해야 했다. 울산에서 노포동에 이르는 한 시간 동안 단 1분도 쉬지 않고 말을 주고받아야 했으니 말이다.
양남에서 왔다고 하니까 거기가 어딘지 꼬치꼬치 묻기에 위치를 모르는 할머니에게 알아듣도록 설명하느라 진땀 빼야 했고, 부산에 왜 가느냐고 했을 때도 그냥 볼일 보러 간다고 했으면 됐을 걸 친구 만나러 간다고 했더니 무슨 친구 만나느냐고 해서 십여 분.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으로 호구 조사에 들어왔다. 돌아가신 부모님부터 현재의 가족상황까지. 얼떨결에 먼저 하늘로 간 남동생 얘기도, 할머니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누님 세 분 근황도 얘기했던 것 같다. 모르는 이가 봤으면 할머니가 홀로 된 딸의 재혼 상대를 찾는 자리라 여겼으리라. 그래도 명색이 교사 출신이란 의무감(?)에 예의 바르게 대답해야 했고...
종점까지 10분쯤 남았을 때 이젠 끝내는가 싶었는데… 할머니는 과연 의지의 한국인이셨다. 이번에는 고향을 묻는 게 아닌가. 그때도 그냥 부산 출신이라고 했으면 될 걸 하동에서 태어났으나 나자마자 부산으로 와서 살았으니 부산 사람이나 마찬가지라 했다. 헌데 하동에는 할머니의 손아래 동서가 산다는 게 아닌가.
허나 하동군이 어디 좁은 군인가. 인구는 많지 않아도 면적은 꽤나 넓으니까. 그 정도로 그칠 줄 알았는데 하동 어디냐고 해서 옥종면이라 얘기하자, 갑자기 할머니가 휴대폰을 꺼내는 거였다. 처음에는 어디 꼭 해야 할 전화를 잊고 있다가 부산 다 와 가니까 거는 전화라 여겼건만 바로 손아래 동서에게 전화하는 게 아닌가.
이때쯤이면 고급 독자들은 다음 일어날 일을 대충 짐작하리라. 할머니가 동서에게 전화하면서 옥종면 어디냐고 묻기에, '유황온천' 근처라 하자 저편 동서에게서 들려오는 소리로 마침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라 했고. 대뜸 나를 바꿔주기에 전혀 본 적이, 다음에 볼 까닭 하등 없는 또 다른 할머니랑 전화해야 했다.
그런데 불행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할머니의 동서는 우연찮게 나의 안태 고향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고, 더더욱 아직도 거기 사시는 종수(사촌형수)를 잘 안다는 게 아닌가. 옥종장에 가면 늘 만난다면서.
참 이런 일도 다 있을까. 경북 봉화에서 울산 둘째아들네 집에 왔다가 부산 셋째 딸네 집에 가는 할머니와, 이 날 우연히 약속이 잡혀 경주시 양남면에서 좋은 이를 만나러 부산 가는 사내는 전혀 일면식도 없는 상태였건만 ‘울산 - 노포동’ 시외버스 안에서 이렇게 연결되고 말았다.
‘케빈 베이컨의 법칙’이란 이론이 있다. 다른 말로 '케빈 베이컨의 여섯 다리'라고도 하는데, 이 세상의 어떤 사람이든 여섯 단계(사람)를 거치면 그 사람과 연결된다는 이론이다. 미국 배우 케빈 베이컨이란 사람을 통해 실제 실험 결과로 증명된 이 가설은, 대한민국 산골마을의 어떤 이와 아프리카 정글의 어떤 이가 여섯 사람을 거치면 서로 아는 사이가 된다는 무척이나 황당한 이론이다.
헌데 나와 같은 일을 겪게 되면 정말 이 이론이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말이다. 아니 한두 번은 다 겪어보았을 테니...
앞으로 혹여 시외버스나 기차를 타거든, 그리하여 옆에 할머니가, 그것도 엄청 얘기하길 좋아하시는 할머니가 앉게 되거든, 아예 말을 붙이기 힘들도록 매몰차게 끊든지, 아니면 나처럼 ‘케빈 베이컨의 법칙’ 증명하는 일을 겪게 됨을 확신한다.
*. 모든 사진은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