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9편 : 신용목 시인의 '노을 만 평'
@. 오늘은 신용목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노을 만 평
신용목
누가 잡아만 준다면
내 숨통째 담보 잡혀 노을 만 평쯤 사두고 싶다
다른 데는 말고 꼭 저기 폐염전 옆구리에 걸치는
노을 만 평 갖고 싶다
그러고는 친구를 부르리
노을 만 평에 꽉 차서 날을 만한 철새
한 무리 사둔 친구
노을 만 평의 발치에 흔들려줄 갈대밭
한 뙈기 사둔 친구
내 숨에 끝날까지 사슬 끌려도
노을 만 평 사다가
친구들과 옛 애인 창가에 놀러 가고 싶네
-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2004년)
#. 신용목 시인(1974년생) : 경남 거창 출신으로, 2000년 [작가세계] 통해 등단. 2000년대 주목할 시인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좋은 시를 많이 쓰며, 현재 조선대 문창과 교수로 재직.
<함께 나누기>
한때 직장 동료들과 친교 모임을 가졌고, 그 모임 사람들이 좋아 이런저런 얘기 끝에 제가 농담 삼아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 함께 돈 모아 시골 마을 하나 사놓자.’
당시만 해도 땅값이 그리 비싸지 않을 때라 조금씩 모으면 주민이 다 떠난 마을 하나는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 모일 줄 알았습니다.
낮에는 아이들과 개울가에서 물장구치며 가재 잡고, 밤이면 미리내 총총 흐르는 하늘 보다가 반딧불이의 꽁짓불을 보고 따라 놀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옹기종기 모여 저녁에 솥 걸고 이것저것 푹 삶아 소주 한잔 하면 그게 세상 밖의 세상이라 여겼지요. 허나 그게 쉽던가요, 해서 저 혼자 시골로 들어왔습니다.
오늘 시는 별 어려움 없이 쉬 이해되리라 여깁니다.
“누가 잡아만 준다면 / 내 숨통째 담보 잡혀 노을 만 평쯤 사두고 싶다”
하필 노을일까요? 노을은 하루 중 짧은 시간 동안만 볼 수 있기 때문에 더욱 특별하고 강렬하게 느껴지고, 날마다 아니 몇 초마다 변하는 빛깔의 다채로움과, 그리고 인간사의 덧없음과 어우러진 서정성으로 하여 글쟁이들의 벗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기에 화자 역시 누가 담보 잡아 줄 사람이 있다면 자기 목숨을 저당 잡혀놓고 노을 만 평쯤 사두고 싶다 합니다. 아 저도 그러고 싶군요. 다만 만 평의 노을이 두어 시간 더 지지 않고 붙잡아놓을 그물까지 살 수 있다면 더더욱.
“다른 데는 말고 꼭 저기 폐염전 옆구리에 걸치는 / 노을 만 평 갖고 싶다”
시인은 역시 다릅니다. 짧은 시간의 강렬함, 색채의 다양함, 삶의 덧없음 얘기하려는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폐염전 옆구리에 걸치는 노을이라뇨. 폐염전 같은 쓸쓸하고 버려진 공간에 걸치는 노을은 화려함보다 소외되고 잊혀진 곳에서 발견하는 진실된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봅니다.
“그러고는 친구를 부르리”
친구는 꼭 깊은 우정을 나누는 사람이기보다 노을 만 평을 꽉 채울 철새를 사둔 이와, 노을 만 평의 발치에 흔들려 줄 갈대밭 한 뙈기 사둔 이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화자처럼 폐염전 옆구리에 걸치는 노을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친구가 되겠지요.
“내 숨에 끝날까지 사슬 끌려도 / 노을 만 평 사다가 / 친구들과 옛 애인 창가에 놀러 가고 싶네”
창공을 가득 채운 철새가 날아들고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그런 곳에 있는 노을 만 평을 사놓고, 나를 버리고 떠난 옛 애인의 창가로 가 세레나데라도 부르면 그 옛 애인이 화자를 따라 다시 이곳으로 오지 않을까요.
오늘 작품은 시인이 서른 즈음에 쓴 시라고 합니다. 보통 노을은 늙은이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진데. 어쩌면 옛 애인이 노을을 좋아해서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쓴 시일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해봅니다.
혹 글벗님도 목숨을 저당잡혀서라도 사두고 싶은 게 있으면 댓글로 남겨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