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4편 : 백학기 시인의 '어느덧'
@. 오늘은 백학기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어느덧
백학기
나는 어느덧 이란 말이 좋다.
어느덧
그대가 알지 못하는 동안에
그대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덧
어느덧
어느덧에는 바람 소리가 들어 있다.
바람 냄새가 들어와 머문다.
그대가 돌아보지 않고
그대가 서성이지 않고
가는 발걸음에 바람이 뒤따라간다
어느덧
어느덧
바람이 그대보다 먼저 간다
- [삼류극장에서 2046](2022년)
#. 백학기 시인(1959년생) : 전북 고창 출신으로 1981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우리나라 시인 가운데 가장 다양한 직업을 가짐. 영어 교사, 신문기자, 시인, 논픽션 작가,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영화배우, 영화감독…
그래도 그의 인생을 축약하자면 ‘문학과 영화’로 말해짐. 시와 소설을 쓰며,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배우도 영화감독도 하고 있으니. 현재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로 재직 중.
<함께 나누기>
앞에서 들먹인 백학기 시인의 직업이 여럿이지만 현재는 영화감독 일에 열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 한동안은 시를 아예 발표하지 않더니 최근 들어서 드문드문 한 편씩 나옵니다. 그래도 몇 편 안 되지만. 오늘 시는 그 가운데 한 편입니다.
글감으로 한 낱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한 편의 훌륭한 작품으로 완성된 시가 제법 됩니다. 김승희 시인의 ‘그래도’, 이병률 시인의 ‘스미다’, 장석남 시인의 ‘번짐’, 이원규 시인의 ‘몹시’, 강영란 시인의 ‘요자기’ …
오늘 시에 쓰인 ‘어느덧’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느 + 덧’이 결합된 낱말로, ‘어느 사이인지 모르는 사이에’라는 뜻을 지니며 시간이 흘러갔음에 대한 회한의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어느 + 덧’의 짜임에서 특히 ‘덧’은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을 뜻합니다. 한 예로 ‘덧없다’를 보면 너무 시간이 빨리 흘러 ‘허전하다’, ‘무상하다’의 뜻을 지니게 되었고.
“나는 어느덧 이란 말이 좋다”
왜 화자는 ‘어느덧’이란 말이 좋다고 했을까요? 뒤에 이어지는 시구에서 그 속뜻을 유추해 봅니다.
‘그대가 알지 못하는 동안에 그대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대를 잊을 수 없어서? 잊어야 하는데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리움도 되지만 괴로움도 되겠지요.
“어느덧에는 바람 소리가 들어 있다 / 바람 냄새가 들어와 머문다”
‘어느덧’에는 바람 소리가 들어와 있고 바람 냄새가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바람의 속성이 무엇일까요? 바람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사랑도 그리움도 그렇습니다. 사랑이 시간을 정해놓고 오는 건 아니잖아요. 예고 없이 들어와 내 심장을 할퀴어 놓고는 이내 사라집니다. 사라지면 그리움도 사라져야 하건만...
“그대가 돌아보지 않고 / 그대가 서성이지 않고 / 가는 발걸음에 바람이 뒤따라간다”
그대는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만 남겨놓고 단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어느덧’, 어느덧 사라졌습니다. 이제 왜 ‘어느덧’을 반복했는지 우린 압니다. 보내주어야 하는데 보내줄 수밖에 없는데 가슴은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바람이 그대보다 먼저 간다”
바람이 그대보다 먼저 간다니 다행입니다. 만약 그대가 바람보다 먼저 간다면 바람이 미는 힘에 의하여 더 빠른 속도로 달아나겠지요. 잊으려 하는데 잊지 못하는 미련에 그대를 뒤따릅니다. 후회와 한탄의 마음을 새로 정리해 다시 시작해 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