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편 : 유병록 시인의 '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
@. 오늘은 유병록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
유병록
참 애쓰는구나
지구 멸망을 막으려 분투하는 사람들을 보고
영화관을 나와
자주 들르던 칼국숫집에 간다
사정이 생겨 문을 닫습니다
그동안 사랑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세상 칼국숫집이 그 집뿐이겠냐만
그 비빔칼국수와 황태칼국수를 먹지 못한다니
친구 같기도 하고 자매 같기도 한
한 명은 사장님 같고 한 명은 직원 같기도 한
아주머니 두 분
도대체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
슬픈 일이 있었는지
임대료가 턱없이 올랐는지
멸망한 지구처럼 불 꺼진 가게 앞에서 머뭇거리다
저녁은 뭘 먹을지 고민하다
앞으로 칼국수를 먹지 않겠다 다짐하다
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
칼국숫집이 없어지는 건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우리 사랑은 왜 여기까지인지
집까지 걷기로 한다
칼국수의 맛을 기억하는 데 온 저녁을 할애하기로 한다
-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2020년)
#. 유병록 시인(1982년생) : 충북 옥천 출신으로 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이 시인의 이름 뒤엔 ‘농사짓고 소 키우는 집에서 자란’이 붙어 있고, 현재 경기도 일산에서 글을 쓰며 책 만드는 일도 함.
<함께 나누기>
가끔 만나 술 한 잔 나누던 아는 이에게서 들은 얘깁니다.
그에게 벗이 둘 있는데 두 벗과 함께 만나면 그리도 화목하다가 일단 술 한 잔 들어가면 두 벗이 말다툼하기에 늘 가운데서 안절부절못한답니다. 싸움의 원인은 한 벗이 주구장창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정세를 얘기하면 다른 벗이 자기 발에 난 티눈 얘기를 꺼낸답니다.
한 사람은 글로벌한 세상 이야기에 다른 한 사람은 아주 사소한 개인 이야기로 받아치니 충돌할 수밖에 없겠지요. 아는 이의 고충은 두 벗 가운데 어느 한쪽 편을 들 수 없다는 점이랍니다. 한쪽 편만 들었다간 우정의 강이 막힐 것 같아서라나요.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가에 관심 두는 벗의 말도 중요하지만 당장 자기 발바닥에 난 티눈 아픔만 걱정하는 다른 벗의 마음도 모른 체할 수 없기에.
오늘 시에서도 그와 비슷한 얘기가 나옵니다.
지구 멸망 막으려 분투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저도 모르게 ‘참 애쓰는구나!’ 하는 감탄사를 내뱉습니다. 비록 나는 영화 속 인물처럼 그렇게 지구 멸망을 막으려 노력하는 바가 없지만 그런 일 하는 사람 이야기에 감동받기 마련이지요. 헌데 영화관을 나와 자주 들르던 칼국숫집을 찾아가면서 반전합니다. 가게 앞에 붙은 아래와 같은 글귀 때문에.
“사정이 생겨 문을 닫습니다 / 그동안 사랑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 글귀를 읽는 순간 그곳에 일하던 두 아주머니가 떠오릅니다. 친구 같기도 하고 자매 같기도 한 두 아주머니. 굉장히 궁금합니다. 한 끼 식사뿐 아니라 인정의 맛도 느끼게 해 준 칼국숫집이 문 닫았다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듭니다. 두 아주머니댁에 슬픈 일이 생겼는지 아니면 임대료가 턱없이 올라 칼국수 파는 수익금으론 감당할 수 없었는지...
“멸망한 지구처럼 불 꺼진 가게 앞에서 머뭇거리다 / 저녁은 뭘 먹을지 고민하다 / 앞으로 칼국수를 먹지 않겠다 다짐하다”
이 시구에 한참 눈길 머물렀습니다. 단지 작은 가게 하나 문 닫았을 뿐인데 화자에겐 영화에서 본 지구가 멸망한 모습과 다름없었으니까요. 진한 정(情)의 맛을 전해주던 칼국숫집이 문 닫다니. 화자에겐 그 집이 지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지구보다 더 큰 존재로 다가왔을지도.
“지구 따윈 없어져도 그만이지만 / 칼국숫집이 없어지는 건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지구가 없어지는 일 같은 건 언젠가 오겠지만 그건 먼 미래의 일이라면, 한 끼 식사를 책임져 주던 칼국숫집의 문 닫음은 지금 당장의 일입니다. 그래서 화자는 칼국수의 맛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 온 저녁을 할애하기로 마음먹으며 집까지 걷기로 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입맛에 딱 맞는 음식점이 한둘 있을 겁니다. 그 집 음식을 두고 다른 사람이야 뭐라든 내 입맛을 땡기게 만드는. 화자에게 칼국숫집은 세상에 하나뿐인 맛을 줬던 곳입니다. 그곳이 사라졌으니 ‘멸망한 지구처럼 불 꺼진 가게’란 표현이 나왔을지도.
제게도 음식점은 아니지만 단골 호프집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그리도 편안할 수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장사가 안 돼서 간 것 같지는 않고, 혹 마담에게 남정네가 생겨 살림 살러 떠났나 하고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시에서처럼 지구가 멸망한 듯 괜히 우울하고, 기분 좋지 않은 날이 며칠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좋은 짝 만나 잘 살아란 축하의 말보단 마음속에 아픔이 더 치솟아 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