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4편 : 임보 시인의 '대'
@. 오늘은 임보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대(竹)
임보
누에가 그 맑은 몸으로
은사의 가는 실을 뽑아내듯
대는 그 빈 몸으로 소리의 실을 뽑아낸다
그것을 못 믿겠거든
달이 밝은 밤 잠시
대밭에 나가 홀로 서 있어 보시라
아가의 손 같은 작은 댓잎들이
서로가 서로를 어루만지며
흰 달빛에 맑은 바람을 걸어
얼마나 신묘한 소리를 짜내는지
그래도 못 믿겠거든
저 단소나 대금의 가락을 들어보시라
대의 몸에서 풀려나온
영롱한 소리의 실에
그대의 귀가 깊이 묶이지 않던가?
대가 몸을 그렇게 비운 것은
한평생 자신의 빚은 소리의 실타래를
그 속에 담아 두기 위함이다
- [자운영꽃밭](2013년)
#. 임보 시인(1940년생, 본명 ‘강홍기’) : 전남 승주군 출신으로 1962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고, 충북대 교수로 근무하다 퇴직. 문정희 시인의 '치마'에 화답하는 '팬티'란 시를 지어 웃음 짓게 하는가 하면 쉬운 시를 많이 씀.
<함께 나누기>
임보 시인의 시는 쉽고 머리에 쏙 들어오는 시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배달할 때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다만 몇 년 전 미투 운동이 한창일 때 그 미투를 비꼬는 「미투[美鬪]」를 발표해 논란이 되었습니다.
시골에 살면 자주 대밭에 들어가야 합니다. 고춧대, 오잇대 같은 쇠로 된 지지대를 팔지만 그래도 대나무가 필요합니다. 올겨울 담장을 대로 다 둘러칠 순 없지만 집 대문만이라도 만들고 싶은 욕심에 대 찌러(촘촘하게 난 나무를 베어냄) 산속을 뒤져볼까 합니다.
오늘 시에선 대의 여러 순기능 가운데 자신의 몸을 비움에 대한 시인의 생각이 잘 드러납니다.
"누에가 그 맑은 몸으로 / 은사의 가는 실을 뽑아내듯 / 대는 그 빈 몸으로 소리의 실을 뽑아낸다"
우리가 즐겨 먹는 애벌레 번데기가 누에임을 다 아실 겁니다. 다만 누에와 고치, 뽕잎 먹고 명주실 뽑아내 비단 만드는 과정만 잘 모를 뿐. 누에나방이 고치를 만들고, 번데기 상태가 되었을 때 그것을 통째로 삶아 고치를 풀어내 분리하여 얻은 실이 바로 명주실입니다. 이걸로 비단 같은 고급 옷감을 만들고.
이렇게 명주실 뽑아내면 자연스럽게 삶은 번데기만 남게 되는데, 이를 버리지 않고 만든 군것질감이 우리가 즐겨 먹는 번데기입니다. 명주실은 은빛 실(銀絲)입니다. 이렇게 누에가 은사를 뽑아내듯 대나무는 그 빈 몸으로 소리의 실을 뽑아낸답니다
"아가의 손 같은 작은 댓잎들이 / 서로가 서로를 어루만지며 / 흰 달빛에 맑은 바람을 걸어 / 얼마나 신묘한 소리를 짜내는지"
대나무(숲)가 내는 소리를 가장 심도 있게 관찰하여 표현한 작가는 최명희 님입니다. 대표작 [혼불] 도입부를 보면,
‘청명하고 볕발이 고른 날에도 대숲에서는 늘 그렇게 소소(蕭蕭)한 바람이 술렁이었다. 그것은 사르락 사르락 댓잎을 갈며 들릴 듯 말 듯 사운거리다가도, 솨아 한쪽으로 몰리면서 물소리를 내기도 하고, 잔잔해졌는가 하면 푸른 잎의 날을 세워 우우우 누구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작가가 이렇게 길게 묘사한다면 시인은 아주 간단합니다. ‘대는 그 빈 몸으로 소리의 실을 뽑아낸다’라고. 시인에게 누에가 은사를 뽑아내는 과정이나 대나무가 빈 몸으로 소리를 내는 과정은 매한가지인가 봅니다.
"대가 몸을 그렇게 비운 것은 / 한평생 자신의 빚은 소리의 실타래를 / 그 속에 담아 두기 위함이다"
옛사람들은 대나무가 속을 비움이 한겨울에도 푸르러한다는 점과 욕심(명예욕, 권력 등)을 버리려 한다는 점에서 방점 찍었습니다. 현대 시인은 대나무가 속 비움에 자신이 빚은 소리를 담아두고 부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부르고자 함이라 표현합니다.
그러고 보니 대나무를 재료로 활용한 악기가 참 많군요. ‘당피리, 향피리, 세피리, 대금, 중금, 소금, 당적, 지, 적, 약, 통소, 단소, 소...’ 이런 악기의 고운 소리는 속을 비웠기 때문에 난답니다. 그렇지요, 만약 대나무 속이 꽉 차 있다면 이런 고운 소리는 절대 못 냈을 터.
어쩌면 오늘 시에서 시인은 대나무처럼 속을 비워야 고운 소리 내는 악기처럼, 자신의 속을 비워야 고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하려 함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