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5편 : 안희연 시인의 '슈톨렌 - 현진에게'
@. 오늘은 안희연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슈톨렌 – 현진에게
안희연
“건강을 조심하라기에 몸에 좋다는 건 다 찾아 먹였는데 밖에 나가서 그렇게 죽어올 줄 어떻게 알았겠니”
너는 빵을 먹으며 죽음을 이야기한다
입가에 잔뜩 설탕을 묻히고
맛있다는 말을 후렴구처럼 반복하며
사실은 압정 같은 기억, 찔리면 피가 찔끔 나는
그러나 아픈 기억이라고 해서 아프게만 말할 필요는 없다
퍼즐 한 조각만큼의 무게로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퍼즐 조각을 수천수만 개 가졌더라도
얼마든지 겨울을 사랑할 수 있다
너는 장갑도 없이 뛰쳐나가 신이 나서 눈사람을 만든다
손이 벌겋게 얼고 사람의 형상이 완성된 뒤에야 깨닫는다
네 그리움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보고 싶었다고 말하려다가
있는 힘껏 돌을 던지고 돌아오는 마음이 있다
아니야, 나는 기다림을 사랑해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마당을 사랑해
밥 달라고 찾아와 서성이는 하얀 고양이들을
혼자이기엔 너무 큰 집에서
병든 개와 함께 살아가는 삶을
펑펑 울고 난 뒤엔 빵을 잘라먹으면 되는 것
슬픔의 양에 비하면 빵은 아직 충분하다는 것
너의 입가엔 언제나 설탕이 묻어 있다
아닌 척 시치미를 떼도 내게는 눈물 자국이 보인다
*물크러진 시간은 잼으로 만들면 된다
약한 불에서 오래오래 기억을 졸이면 얼마든 달콤해질 수 있다
-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2020년)
* 슈톨렌 : 독일인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매주 한 조각씩 잘라먹는 기다림의 빵.
*. 물크러진 : 너무 무르거나 풀려서 본 모양이 없어지도록 헤어진
#. 안희연 시인(1986년생) : 경기도 성남 출신으로 '12년 ‘창비신인상’을 통해 등단. '18년 YES24가 진행한 ‘한국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투표에서 시 부문 1위로 뽑혔으며,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 교수로 재직.
<함께 나누기>
젊은 시인의 시 한 편 배달합니다. 예전 나이로 마흔이라 젊다고만 할 수 없지만 제가 젊다고 하는 건 딸보다 어리기 때문입니다. 전부터 시인을 유심히 보아왔지만 올해 처음 배달하는데, 앞으로 계속 배달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그만큼 좋은 시인이란 뜻이겠지요.
시로 들어갑니다.
화자와 친구가 만나 빵을 먹으며 얘기 나눕니다. 친구의 말입니다.
“건강을 조심하라기에 몸에 좋다는 건 다 찾아 먹였는데 밖에 나가서 그렇게 죽어올 줄 어떻게 알았겠니”
친구는 빵을 먹으며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친구의 지인이라 여겨지는 사람의 죽음을. 친구는 입가에 설탕을 잔뜩 묻혀 가며 연신 맛있다는 말과 함께 슈톨렌을 먹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실은 압정 같은 기억, 찔리면 피가 찔끔 나는 / 그러나 아픈 기억이라고 해서 아프게만 말할 필요는 없다”
친구가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누군가의 죽음. 시에서처럼 아픈 기억이라고 해서 아프게만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하지만 우린 압니다. 그 친구는 그냥 빵을 먹는 게 아닙니다. 입가에 묻은 설탕처럼 눈물 자국이 잔뜩 묻어 있으니까요.
슬픔엔 두 종류가 있다지요. 겉으로 드러내는 슬픔과 속에 감춰진 슬픔. 언뜻 보기에는 겉으로 드러난 슬픔이 더 쩌릿하게 느껴집니다. 허나 눈으로 흘리는 눈물보다 가슴으로 흘리는 눈물이 더 슬프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게 더욱 가슴 저리게 만듦을.
“보고 싶었다고 말하려다가 / 있는 힘껏 돌을 던지고 돌아오는 마음이 있다”
보고 싶어서 너무나 보고 싶어서 그(그녀)의 집을 찾아갔건만 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대문에 돌만 던지고 나오는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을까요? 보고 싶은 마음 역시 실컷 드러내 표현할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하고 돌아서는 이를 향해 보고픈 마음이 더 옅고 작다고 할 수 있을까요?
“펑펑 울고 난 뒤엔 빵을 잘라먹으면 되는 것 / 슬픔의 양에 비하면 빵은 아직 충분하다는 것”
어느 젊은 여인의 글에서 그에게 이별 통지받고 돌아온 날 다이어트 하려 참았는데, 냉장고를 다 뒤져 나물이란 나물에다 밥을 한 솥 비벼 먹었다는 내용을 읽었습니다. 사랑하던 남자로부터 받은 배신감에 눈물 흘리며 사흘을 굶은 여인에 비해 그녀의 슬픔은 양이 적다고 할까요?
“너의 입가엔 언제나 설탕이 묻어 있다 / 아닌 척 시치미를 떼도 내게는 눈물 자국이 보인다”
이제사 친구의 슬픔이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입가엔 언제나 설탕이 묻어 있지만 그와 동시에 눈물 자국도 보이니까요. 그 친구에게 하늘로 간 사람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겁니다. 왜냐면 슈톨렌을 앞으로도 계속 먹을 거고, 그때마다 그가 계속 생각날 것이기에.
“물크러진 시간은 잼으로 만들면 된다 / 약한 불에서 오래오래 기억을 졸이면 얼마든 달콤해질 수 있다”
‘물크러진 시간’은 형태를 잃고 흩어지는 슬픔을, 그리고 ‘잼’은 달콤한 결과물을 의미합니다. ‘약한 불에서 오래오래 기억을 졸인다’는 것은 슬픔을 곱씹고 되새기며, 고통을 인식하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나타냄으로 읽습니다.
여태 우리 문화에서는 떠나보낸 사람에 대한 마음의 짐을 너무 무겁게 만드는 상황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즉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 주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슬퍼하며 아파할 것을 요구받아 왔습니다.
죽은 이에 대한 언급은 약속이라도 한 듯 금기시되고, 떠난 이를 위해 눈물 흘리며 깊은 슬픔에 빠져 자신을 돌보는 일에 소홀하도록 만드는 세태. 오늘 시처럼 누군가 그렇게 한다면 위로의 말보다 나쁜 말을 들을 겁니다. 이제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죽은 이를 위로하는 방식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