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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Feb 24. 2022

백곡마당의 전설

제1부 - 제1화

     * 백곡마당의 전설(제1부) *

            - 제1화 -



  삼각형 속에 든 구슬 다섯 알이 햇빛을 받아 저마다의 빛깔을 토해내고 있다. 나는 구슬 낀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을 오른쪽 눈까지 들어 올려 세 발 정도 떨어져 있는 목표물까지의 거리를 어림하며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만약 이번 참에도 기회를 놓치면 삼각형 바로 곁에 놓인 구슬의 임자인 짱구 녀석이 다 따버릴 게 분명하다. 다시 한쪽 눈을 지그시 감고 겨냥하다가 과녁을 향하여 두 손가락을 힘껏 뿌렸다. 그 순간 손아귀를 벗어난 구슬이 낮게 포물선을 그리다가 가장자리에 놓인 구슬 하나를 정통으로 맞히고는 옆으로 튀긴다.


  그제사 나는 짧게 숨을 내뱉었다. 이제 되딸 기회가 온 것이다. 내 구슬과 짱구 녀석의 그것과 고작 한 팔 거리밖에 안 되니 이 간격이라면 두 눈 감고도 맞힐 수 있다. 이지러지는 녀석의 얼굴을 옆 눈으로 힐끗 바라보며 다시 구슬을 잡는 바로 그 순간,

  “바우엄마다!”

  산동네를 감돌아 퍼지는 소리에 백곡마당에서 삼각구를 하던 아이들은 너나없이 벌떡 일어났다. 나도 구슬을 내팽개치고 일어나며 바우 쪽을 바라보자 어느새 녀석이 당산나무로 달려가고 있었다. 거기에 미리 준비해 둔 제 엄마의 치마를 가져오려는 것이리라.


  그러나 바우의 엄마는 녀석이 당산나무에 채 닿기도 전에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흐트러진 모습으로 마당 한복판에 들어섰다. 아이들은 재빨리 구석으로 물러나 빙 둘러앉았다. 워낙 자주 보아온지라 다음에 벌어질 광경을 제대로 구경하려면 적당한 무대가 필요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바우엄마가 엉망인 차림으로 백곡마당에 나타날 때면 무당인 바우외할머니가 굿을 할 때처럼 하늘을 향해 긴 대나무를 흔들어대는 시늉을 하다가 이내 자세를 바꾸어 칼춤을 추는 양 두 팔로 휘저으면서 빙빙 돌다간, 갑자기

  “죽여라! 죽여라!”

  하는 소리와 함께 가슴을 쥐어뜯으며 옷을 벗어 내던지는데 이때쯤이면 바우가 들고 온 치마를 제 엄마에게 덮어 씌움으로써 막이 내리곤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바우가 제 엄마에게 치마를 덮어 씌우며 울고 있을 즈음, 굿하러 갔다 오는지 활옷을 입은 무당할머니가 허겁지겁 달려들어선 바우엄마를 때리고, 욕하고, 울고불고하다가 데리고 간 점이 여느 때와 달랐다.

  나는 세 사람이 떠나자마자 재빨리 마당 한복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삼각형은 다 지워져 흔적만 흐릿하게 남았을 뿐 구슬이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바우엄마가 난장판을 벌이는 통에 다 흩어져 달아난 모양이다.


  완전히 손에 들어온 구슬 무더기를 놓친 게 아까워 이리저리 살피던 중 묏등과 도래솔 뒤에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어른들이 보였다. 아까 우리가 구슬치기 할 땐 보이지 않던 남자들이다.

  꽤 많은 어른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이상야릇한 웃음으로 산길을 따라 내려가며 서로 뭐라 지절대는 말소리와 함께 웃음소리도 들려왔으나 내 관심은 오직 구슬에 있을 뿐.


  “히힛, 난 바우엄마 ㅂㅈ 봤다”

  늘상 촐랑대는 개똥이의 말에 마당 가운데로 모여들던 아이들이 킬킬대며 웃었다. 나도 그 말에 구슬 잃은 걸 잊고 “킥” 하고 따라 웃다가 저 만치서 걸어오는 바우를 보았다. 그의 손에 치마가 들려 있는 걸로 보아 또 당산나무에 걸어두려는 것이리라. 재빨리 개똥이에게 눈짓을 했다.


  “시크멓더라, 그치?”

  그런데도 바보같이 눈치를 못 채고 지껄이는 녀석이 괘씸하여 오른발로 냅다 걷어찼다. 한순간 넘어졌던 녀석이 일어나며 입을 삐쭉 내밀긴 하였으나 볼멘소리는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고, 다른 녀석들도 움츠려 들었다.

  사실 그때 바우가 오지 않았다면 내가 더 떠벌렸을지 모른다. 우리 윗집인 바우네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얘기를 들은 거랑, 이웃의 어른들이 주고받는 얘기를 몰래 엿들은 것이랑, 내게는 걔들이 모르는 비밀이 숱하게 많았다.


  그러나 바우 앞에서 녀석들을 기분 나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할 수 없었다. 그것은 바우가 특별히 맛있는 걸 많이 갖다 주거나 내 말을 고분고분 잘 들어서가 아니라 바로 녀석의 누나인 소화 때문이었다.

  삼각구를 하거나 딱지 따먹기를 하거나 마음만 먹으면 아이들의 손에 든 건 바로 내 것으로 바뀌었다. 물론 힘으로서도 또래 중에서 가장 세지만 솜씨 또한 걔들보다 뛰어나다고 감히 자부한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 눈치 못 채도록 가끔 바우에게만 잃어주거나 개평을 줄 때도 녀석에게 특별히 많이 줬다. 만약 그런 사실이 들통나면 내가 대장 노릇 하는 데 지장이 있지만 녀석에게 더 피해가 갈까 봐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느라고 무진장 애를 썼다. 게다가 두 살이나 아래인 녀석을 우리 또래의 놀이판에 넣어주고, 그 속에서 기죽지 않고 놀도록 신경 써준 게 다 누구 덕인가.


  ‘빌어먹을 가시나’

  소화는 나와 같은 반이었다. 내가 공부하곤 담쌓은 대신 그녀는 우리 반에서, 아니 4학년 전체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고, 게다가 가장 이쁜 가시나였다. 그런 애가 바로 우리 집 위에 산다는 것 자체에 괜히 힘주고 다닐 만했다. 그렇지만 그 가시나는 일일이 내 기분을 잡치는 일만 골라했다. 내가 저한테 도움 되는 일을 했을지언정 해 되는 일은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제 엄마가 미쳐서 발가벗고 돌아다닌다는 소문이랑, 걔네 집이 빨갱이 집안, 난 바로 말해서 빨갱이가 뭔지 정확하게 모른다. 다만 어느 날 개똥이 아버지가 술에 취하여 그날도 옷을 벗고 미쳐 날뛰는 소화엄마더러 ‘빨갱이 여편네’란 말을 내뱉었고, 그 말을 들은 무당할머니가 확 부릅뜬 두 눈으로 달려들어 얼굴에 큰 생채기를 내 고발하느니 마니 하며 온 동네가 떠들썩한 일이 있었기에 그 말이 꽤나 나쁜 말이란 것 정도만 알고 있을 뿐


  이런 소문이 교실과 학교 안에 떠돌지 않는 까닭이 내 덕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다른 머스마들에겐 사근사근하다가 내가 말이라도 붙일라치면 그지없이 쌀쌀하게 굴었다. 그게 얼마나 내 약코를 죽이는 일인지 그 가시나는 모를 것이다.

  우리 학교에서 싸움질로야 당할 상대가 없는 내가 다른 애들이 보는 앞에서 피보는 일이란! 그걸 생각하면 제 동생인 바우 녀석이나마 족칠 대로 족쳐 분풀이해야 마땅하지만 이렇게 그 녀석을 감싸주는 까닭을 나 자신도 모르겠다.


  “어휴, 저 천둥벌거숭이 좀 봐. 흙 범벅인 꼴로 들어오긴 어딜 들어와. 퍼뜩 나가 손 안 씻어!”

  해가 졌기에 집으로 돌아와 댓돌 위에 놓인 신발을 살피지 않고 무작정 방 안으로 뛰어든 게 잘못이었다. 무섭기로야 아버지가 제일이지만 누나는 나만 보면 잔소리를 늘어놓아 그다음으로 두려운 사람이었다. 재빨리 마당으로 물러 나왔다. 그러나 누나의 잔소린 거기까지 날아들었다.


  “이 년 뒤면 중학교 갈 녀석이 늘 놀면서 공부는 언제 해!”

  “원 애두, 제깟 놈에게 중학교는. 우리 집에 돈이 있어, 그렇다고 장학생 될 만큼 공부를 잘해. 국민학교나 졸업해 공장에 들어가 돈 벌면 저 좋고 나 좋지.”

  누나가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괜시리 겁부터 났다. 평소에는 잔업하느라고 열 시 넘어야 들어오니 그 이전에 자면 그만이었고, 아침에는 내가 일어나는 시간보다 훨씬 일찍 회사에 가니 마주칠 염려가 없었는데, 오늘처럼 재수 옴 붙는 날이면 그동안 못다 한 잔소리를 하려는 듯 막 몰아붙였다.


  내 또래들 중에는 제 누나에게 대들거나 이미 꼼짝 못 하게 우위를 차지한 녀석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사실 힘으로 맞부딪친다면 아무리 누나가 열 살 많더라도 한 번 붙어볼 자신이 있었으나 그러다 아버지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다리 하나 정도는 부러질 게 뻔하니 못 들은 척해야 했다. 계속 이어지는 두 사람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머리를 온통 세숫대야 속에 박았다.


  “너 지난달 친 시험지 어쨌어?”

  씻고 들어와 밥상머리에 채 앉기도 전에 그러잖아도 탄로 날까 걱정하던 걸 누나가 캐러들었다.

  “시험 안 쳤어.”

  “거짓말 마, 뒷집 소화 불러 물어볼까. 쳤나, 안 쳤나?”


  또 낭패다. 그 가시나한테 물어보면 들통날 건 물론이고 있는 말 없는 말 다 까발릴 게 분명하다. 어쩌면 성적표에 아버지 도장 몰래 찍어간 일까지 일러바칠 것 같고, 또 저번 달에 이틀간 학교 안 가고 땡땡이쳐 반성문 오십 장에 엉덩이 스무 대 맞은 일이랑, 짝지인 훈이 녀석을 패 코피를 흘리게 한 벌로 날마다 변소 청소하는 일도 고자질할지 모른다.


  “놔둬라. 어차피 그 녀석은 사람 될 놈 아니다. 학교 갔다 와 가방 던지고 나가면 저녁때가 되어야 들어오는 놈한테 기대하긴 뭘 기대해. 그건 그렇고… 너 내일 저녁 일찍 나올 수 있지?”

  “왜요?”

  “왜는? 전에 얘기 안 했어, 저쪽에서 내일 저녁 일곱 시쯤 만나자던 말?”

  “싫어요. 난 시집 안 가요.”


  이쪽으로 날아오던 화살이 방향을 바꾼 게 다행이라 싶어 한숨 돌리던 차 퍼뜩 머릿속으로 스쳐 가는 게 있었다. 요즘 우리 집에 짱구엄마가 뻔질나게 드나들고, 오기만 하면 누나 얘기를 꺼내던 게.

  나는 참말이지 누나가 어서 빨리 시집가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잔소리 듣기가 싫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건 어른들이 선보는 얘길 꺼낼 때마다 누난 언제나 싫다 하였고, 더욱 아리송한 건 그럴 때마다 얼굴이 홍시보다 더 빨개진다는 거였다.



  뒷집에서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나면서 무당할머니의 악쓰는 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다.

  “이년아, 니 죽고 나 죽자. 이기 노상 무신 꼴이고. 남사시러바서 내사 더 못 살 끼다. 미칠라 카면 곱게 미치지 와 빨가벗고 난리고. 내 우사도 우사지만 야들이 우찌 얼굴 들고 다니라고 고리 해쌌노! 으응, 이년아!”

  뒤쪽으로 난 들창 너머로 무당할머니가 바우엄마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방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오늘 밤도 신당에서 지새우려는 모양이다. 바우엄마가 발가벗고 난리 친 날 밤이면 바우외할머니는 언제나 집 위에 모셔놓은 신당으로 끌고 가 징 소리가 요란하게 밤새 굿을 해댔다.


  “요년이 암만 캐도 우리 세 식구를 다 잡아 묵고 말 끼다.”

  두 사람의 모습이 들창에서 사라질 즈음, 소화가 문을 열고 나오다 우리 집 쪽을 보고는 재빨리 도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 소설의 배경이 되는 "백곡(百穀)마당"은 온갖 곡식을 거둬 타작하는 마당을 일컫던 곳이었습니다.

  제가 자라던 동네에 있던 타작마당을 우린 "백곡마당"이라 하지 않고 "배꼽마당"이라 불렀습니다. 실제 있었던 일을 글감으로 했으나, 소설로 그려진 이상 모두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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