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Feb 25. 2022

백곡마당의 전설

제1부 - 제2화

  * 백곡마당의 전설(1부) *

    - 제2화 -



  “오늘 밤도 제대로 잠자긴 다 틀러버렸네.”

  누나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엄마가 이어받았다.

  “쯧쯧 한 댓 달 됐지, 저렇게 정신 나갔다 하면 옷 벗어던지는 게. 바우외할머니가 얼마나 속이 썩을까. 자기 외동딸한테는 무당질 대물림 안 시키려고 밤낮없이 굿을 하며 고등학교까지 마쳐 시집보내 아들 딸 낳고 잘 산다고 자랑하던 일이 어제 같은데… 어쨌든 여자는 아무리 잘 나고 잘 배워도 서방 잘 만나야 해. 서방 잘못 만나면 평생 우환이야.”


  “참, 바우아버지가 간첩질 했다던데 참말일까요?”

  “내가 그 속을 어떻게 알겠나. 그런 일이야 드러내 놓고 떠들 얘기가 아니니까 이러쿵저러쿵 말들이야 많았지만 확실히 아는 사람이 있어야지….”

  “독일인가 하는 나라에 공부하러 갔다면서요? 신문에도 크게 났다고 하던데…”

  “글쎄 내가 뭘 알아야지. 다만 댓 달 전에 순사들이 막 몰려와 집 안을 구석구석 뒤지고 바우엄마를 끌고 가 얼마나 치댔는지 돌아온 뒤 얼굴이 반쪽이 돼 있었지. 저 아픔도 아픔이겠지만 믿었던 서방이 그 꼴이 됐다 하니.”

  소화네 집과 관련된 얘기라 두 귀를 쫑긋 세웠으나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없었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간신히 방향을 바꾼 화살이 언제 또 이쪽으로 날아올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백곡마당에 가 그러는지 모르겠네…”

  “예전부터 거기 당산나무는 성한 사람도 한 번씩 미치게 한다는 얘기가 전해왔어. 뭐 그 나무에 목매단 사람들이 귀신이 되어 끌어들인 대나. 삼 년 전에도 그렇게 당차고 총명한 개똥이 작은삼촌이 그 나무에 부딪혀 죽었잖아.”

  갑자기 겁이 더럭 났다. 큰 나무는 거의 없는 대신 풀밭과 맨땅이 반반이라 갖가지 놀이 즐기기에는 더없이 좋아 늘 거기서 놀았는데 엄마의 얘기는 그게 아니잖은가. 그러나 다행히 누나가 그런 두려움을 씻어주었다.


  “에이, 그런 얘긴 다 미신이에요. 요즘 세상에 그런 걸 믿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때 개똥이 작은삼촌은 술에 취해 걸어오다가 나무에 걸려 넘어지면서 뾰족한 돌에 부딪혀 죽었다던데.”

  “믿던 안 믿던 자유지만… 그런데 네 아버지는 무슨 일로 아직 안 돌아오시지. 또 술 마시는가 보다. 저번 날도 집에 오다 어디에 빠졌는지 옷이 엉망진창이 돼 다 버렸던데 괜히 네가 말을 꺼내놓으니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겁난다. 밖에 나가봐야겠다.”

  엄마가 일어서는 걸 보며 나도 일어섰다. 누나랑 단 둘이 있다간 무슨 소릴 들을지 모르기에.



  “이 새끼가 왜 아직 안 나오지?”

  “혹시 학교 뒷문으로 토낀 게 아냐?”

  나는 은근히 조바심이 났다. 개똥이와 짱구의 말대로 철이 녀석이 우리가 여기서 지키고 있다는 말을 듣고 몰래 뒷문으로 빠져나갔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다시 교문 쪽을 바라보았다.

  한참 무더기 지어 몰래 나오던 아이들이 이젠 띄엄띄엄 두서너 명씩 나온다. 아이들 숫자가 줄어들수록 조바심은 커져 갔다. 만약 오늘 철이 녀석을 혼내지 못하면 대장의 위치가 흔들릴 뿐 아니라 저녁밥이 도무지 넘어갈 성싶지 않다.


  ‘빌어먹을 가시나!’

  소화 가시나는 오늘도 내 약코를 콱 죽였다. 점심시간에 똘마니들을 몰고 ‘말타기’하러 운동장 저쪽에 있는 오동나무 밑으로 갔을 때였다. 거긴 소화를 포함하여 가시나 넷이 먼저 와 *살구받기를 하고 있었다. 아마 평소 같았으면 내가 먼저 피해 갔을 터였다.

  허나 그날만은 말타기 대신 *다망구 하자는 아이들을 우겨서 데려왔기에 걔들에게 체면을 세워볼 양으로 좀 비켜달라고 했다. 그러자 다른 셋은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났으나 소화 가시나만은 끄덕도 하지 않아 겁을 주려고 주먹을 불끈 쥐어 저 앞에 흔들어보았는데도 뉘 집 개가 짖느냐는 듯 쳐다보지 않았다.


(살구받기)


  나중에는 말로써 을러메도 붙박인 양 가만있기에 할 수 없이 사정까지 했으나 역시 들은 척도 않는 것이었다. 솔직히 그 당시 마음 같아선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한 곁으로 물러났다.

  그런데 그때 철이 녀석- 급장이었고, 공부를 잘했고, 늘 멋있는 옷만 입었고, 우리 담임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던 -이 저랑 자주 어울리는 애 둘을 데리고 와선 그 가시나에게 뭐라 하자 선뜻 자리를 내주기에 무슨 대단한 놀이를 하는가 했더니, 고작 ‘묵ㆍ찌ㆍ빠’를 하는 거였다. 얼마나 분통이 터지든지!


  ‘묵ㆍ찌ㆍ빠’는 굳이 큰 나무가 없어도 되나 우리가 하려는 ‘말타기’는 반드시 오동나무 같은 버팀목이 없으면 안 되는데 그걸 뻔히 알고 있을 그 가시나가 그런 식으로 내 약코를 죽인 걸 생각하면 할수록 울화가 치밀었다.

  더욱 괘씸한 건 철이 녀석이었다. 소화 가시나한테 당한 수모를 참고 다시 내가 녀석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점잖게 얘기하자 그 녀석이 도리질하는 게 아닌가. 저절로 올라가는 주먹을 참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만약 그때 소화 가시나에게 대한 욕심을 완전히 버리려 했으면 녀석을 그 자리에서 반쯤 죽여 놓았을 것이다.


  다시 교문 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

  “야 짱구, 네가 들어가서 갔는지 안 갔는지 알아보… ”

  더 기다릴 수 없어 짱구에게 지시하던 참에 철이 녀석과 소화 가시나가 나란히 걸어오는 게 눈에 잡혔다. 그걸 보니 완전히 화통에 불이 붙었다. 한두 마디 말을 건넨 뒤 녀석이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면 몇 대만 쥐어박고 보내렸는데 이렇게 된 바에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나중에 어떻게 되든 박살을 내 일단 분부터 풀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주먹에 잔뜩 힘을 담았다.


  둘은 우리가 기다리는 것도 모르고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음소리까지 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오른주먹을 냅다 들었다.

  “이 새꺄!”

  고함과 함께 녀석의 아구통을 힘껏 갈겼다. 정통으로 맞아 저만치 나가떨어지는 걸 보며 옆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무시하고 그대로 녀석의 배에 올라탔다. 이럴 때 기세를 늦추어 주어선 안 된다는 걸 수많은 싸움에서 이미 배워 터득했기에 마구잡이로 주먹을 날렸다.

  반격할 기회를 주면 되려 물릴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마구 얼굴을 내려치던 중, 갑자기 목의 살점이 뜯겨나가는 아픔을 느꼈다. 소화 가시나가 손톱으로 할퀸 것이다. 한 손으로 그 가시나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힘껏 뿌리쳤다.


(삼각구)


  그때였다.

  “호랑이다! 빨리 토껴!”

  하고 외치는 개똥이의 외마디 소리에 고개를 드니 우리 옆반 호랑이 선생님이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교문 앞을 나오는 게 아닌가. 얼른 일어서며 고무신부터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내달았다.

  잡혔다간 내가 때린 것보다 더 혼날 게 뻔하여 돌부리에 채이면서도 고무신 쥔 두 손을 흔들며 마구 달렸다. 한참 달리다가 멈춰 서 돌아보니 호랑이가 그 자리에 서서 주먹을 흔들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진호 엄마 있나?”

  철이 녀석을 실컷 패준 뒤 한껏 기분 좋은 감정으로 돌아와 밥상 앞에 앉아 숟가락을 드는데 밖에서 무당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와 재빨리 밥상머리에서 물러났다. 틀림없이 소화 가시나가 낮에 있었던 일을 제 할머니에게 일러바쳐 그것을 따지러 온 것이리라.


  “어쩐 일이세요?”

  나는 엄마가 문을 여느라 등을 돌리는 사이에 여차하면 튈 작정으로 아버지 목침을 들창 밑에 갖다 놓으며 창문을 살며시 열었다. 들창이야 내 키보다 높지만 목침을 밟고 튀어 오르면 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떡 좀 해 도고.”

  하며 무당할머니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얼른 일어나 덧문 턱을 잡았다.

  “갑자기 떡은 왜요?”

  “으응… 내림굿을 할라꼬.”

  “내림굿이라면… 누구 신 내린 사람 있어요?”


  내림굿이라는 말에 안심을 하며 문턱을 잡았던 손을 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 몇 년 전 바우네 신당에서 벌어졌던 그 굿을 떠올렸다. 그때 그 시끌벅적한 광경이란!

  어디서 왔는지 오색찬란한 활옷을 입은 바우외할머니를 중심으로 일여덟 명의 무당들이 한 여자를 둘러싸 징을 치고, 대나무를 흔들고, 땅을 굴리고, 칼춤을 추고, 온몸에 뭘 뿌리고, 이상한 주문을 외면서 이틀 밤 이틀 낮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그동안 아버지와 누나는 잠 못 자겠다고 아우성이었으나 나는 떡 얻어먹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누구긴 누구야, 딸아제.”

  “딸이라면 바우엄마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바우엄만 신들린 게 아니라 애들 아버지 일로 충격을 받아…”

  “나도 처음에사 그런 줄로만 알았제. 그란데 한 살 전에 가가 몸이 불댕이맨치로 뜨겁더니 기가 팍 끊겨 버리는 기라. 내사 고때 아주 죽는 줄 알았제. 올매나 놀랬는지 아직도 정신이 없다카이. 그란데 갑재기 일어나 막 소릴 지르며 펄쩍펄쩍 뛰며 난리를 안 치나. 그기 바로 접신의 징조인 기라.”

  “그래도 할머니는 전에 절대로 바우엄말 무당으로 만들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때사 그랬제. 하지만도 인자는 별 수 없는 기라. 다 신주님의 뜻인께네.”

  “그래… 요? 참 식사 못하셨지요? 같이 좀 드셔요.”

  “밥맛이 있어야제. 술이나 있으면 한 잔 도.”


  엄마가 술상 차리려 부엌으로 내려간 뒤, 무당할머니의 눈길이 내게로 쏠리더니 그러잖아도 마음 졸이던 걸 물어왔다.  


  *. 살구받기 : 달리 '공기놀이'라 함

  *. 다망구 : 술래잡기 놀이의 하나. '다망구'가 일본어라 일본 놀이에서 왔다고 하는데, 일본엔 애초부터 없다고 함


작가의 이전글 백곡마당의 전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