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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Feb 26. 2022

백곡마당의 전설

제1부 - 제3화

     * 백곡마당의 전설(1부) *

            - 제3화 -



  “우리 소화 볼때기에 멍이 시퍼렇게 들었던데 니 혹시 핵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나? 나가 아모리 물어봐야 말을 해야제.”

  나는 엉덩이를 뒤로 슬며시 빼냈다.

  “가가 본시 털팔이가 아닌께네 자빠지거나 오디 부딪혔을 리는 없을 끼고…”


  “자 이거 애들 아버지가 마시다 둔 술인데 아직 맛이 가진 않았을 거예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차 엄마가 술상을 들고 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무당할머니는 그대로 한 잔을 마시고는 이내 또 한 잔을 따라 마시더니,

  “나가 가를 오떻게 키웠는데…”

  다시 한 잔을 숨 돌릴 겨를 없이 들이키고는 술잔이 깨지도록 내려놓았다.


  “… 울 오메가 날 무당으로 만들었을 때 내사 멋모르고 좋아했제. 배운 기라곤 아무것도 없는 데다가 배곯지 않제, 신명 나게 놀 수 있제, 참말로 좋아했는기라.

  당골무의 대물림은 다 신주님의 뜻이라 카더니 인자는 우짤 수 없는기라, 우짤 수 없는 기라…”

  무당 관련 얘기라 무슨 뜻인지는 잘 알 순 없었으나 ‘우짤 수 없는 기라’를 반복하며 내뱉을 때는 목이 메는지 울먹거렸다. 평소에 그렇게나 무섭고 그렇게나 꼬장꼬장하던 무당할머니의 뜻밖의 행동에 나는 어리둥절하여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다른 무당들도 많이 오겠군요?”

  “그야 신딸만도 스무 명이 넘은께네…. 참, 내 정신 좀 바라. 신당 손질이랑 할 일이 태산맨키로 쌓였는데도 요리 사설만 늘어놓고 있다니…. 진호 엄마, 아까 부탁한 대로 떡 하고 시간이 더 남으면 제물 거리 장만할 때 좀 도와 도.”

  하며 말을 마치고 좀 더 있다 가란 엄마의 요구를 뿌리치며 가버렸다.


  “절대로 무당 안 만들 거라더니…. 나중에 소화까지 제 엄마 뒤를 이어 무당 된다는 소리 안 나올지 모르겠네.”

  “소화가 무당을… ?”

  무당할머니가 가고 난 뒤 상을 치우던 엄마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건 분명히 그냥 지나쳐버릴 일이 아니었다. 고 예쁘고 얄미운 가시나가 무당이 된다니. 그때 내 눈에는 소매가 늘어진 *무복(巫服)을 입고 울긋불긋한 고깔모자를 쓴 소화가 온몸을 흔들며 춤추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놀라기는. 바우외할머니 말마따나 신주님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


  다음날은 일요일이었으나 아침부터 재수 옴 붙은 날이었다. 아침 식사 중, 누나가 아버지에게 내가 공부는 조금도 않고 놀러만 다닌다고 일러바치는 바람에 종아리에 불이 난 것은 물론이고, 그동안 삼각구 하며 따 모아둔 구슬과 딱지가 언덕 밑으로 날아가는 벼락을 맞았다.

  다행히 아버지가 친척의 결혼식에 가 다시 챙길 기회는 얻었지만 딱지는 바람에 흩어지고, 구슬은 비탈길로 내려가 버려 세 시간이나 애써 주워 모았지만 원래 있던 양의 반의 반도 채 건지지 못하였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중으로 학교 숙제와 아침에 누나가 따로 내준 숙제까지 해야 했다. 아침에 보여준 아버지의 서슬로 보아 저녁에 그대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아 꼼짝없이 하루 종일 매달려 공책을 메우자니 온몸이 근질근질하여 미칠 지경이었다. 

  나중에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뛰쳐나갈 기회를 엿보던 중, 마침 엄마가 뒷집에 심부름을 시켰다. 우리 집에 있는 그릇을 오늘 밤 있을 바우네 내림굿에 쓰도록 갖다 주라는 거였다.


  통대를 발처럼 엮어 만든 문을 슬며시 밀고 들어서자 마루에 바우엄마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들고 온 그릇을 마루에 내려놓았으나 멍하니 앉아만 있기에 나도 그 곁에 가만히 앉았다. 지금 집에 가 봐야 공부하라는 말밖에 하지 않을 테니 부를 때까지 여기서 쉴 작정이었다.

  이렇게 좋은 날 집에 박혀 있을 녀석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여 바우를 불러보았으나 역시나 대답이 없다. 다만 방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고 댓돌에 놓인 신발로 보아 소화 가시나가 방에 있다는 걸 어림할 뿐.


  온 신경을 방 안으로 펼치면서 눈으로는 바우엄마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누가 왔는지 무엇을 갖다 놓았는지 관심 없는 양 그저 앞만 바라보고 있다. 잠시 그런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바우엄마가 굉장히 예쁘다는 걸 느꼈다. 미친 여자, 심심하면 옷을 벗고 춤추는 여자라는 인상만이 내 머릿속에 들어 있었건만...

  방안에 있을 소화와 제 엄마를 비교해 보았다. 그러자 걔의 예쁜 얼굴이 다름 아닌 제 엄마에게서 왔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다시 방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 기척이 없었다. 내가 온 걸 분명히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게 분명하다. 솔직히 내 마음은 그 애가 문을 열고 저번 한 일에 대해서 뭐라고 하면 미안하다고 사과할 작정이었다.

  그때 무슨 소린가 들렸다. 처음에는 방 안에서 나는 소린가 했으나 이내 옆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무슨 소린지 확실하지는 않았다. 혹 소화가 나올까 잠시 더 앉아 있다가 포기하고 일어서려 할 때 다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보다 좀 더 큰 소리로 ‘죽여라’ 하고 말한 것 같았다.


  “예? 죽이긴 누가 죽여요?”

  혹시나 하여 주위에 누가 있는지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다시 바우엄마의 입에서 거푸, “죽여라!” 하는 소리가 나오기에 허겁지겁 일어나 마당으로 물러 나왔다. 아무래도 되어 가는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내가 마당으로 채 내려서기도 전에 바우엄마는 “죽여라!”, “죽여라!” 하는 소리를 비명 지르듯 내지르면서 가슴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얼른 대문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나 뒷일이 궁금하여 머리만 내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가슴을 쥐어뜯는 바람에 윗도리가 찢어지고 속살이 드러날 즈음, 소화가 제 엄마를 울며 붙들었으나 “죽여라!”, “죽여라!” 하는 소리와 발광하는 몸짓은 그대로 계속되었다.



  “바우야, 집에 가 봐라. 네 엄마가 또 발가벗고 난리다.”

  그 집에서 나오자마자 뒷일이야 어떻게 되든 우리 집에 가지 않고 백곡마당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바우가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 집으로 간 뒤 주위로 몰려든 아이들에게 한바탕 신나게 떠들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랑, 나만 알고 있는 비밀 이야기랑, 궁둥이에 큰 사마귀를 보았다는 말까지 지어내다 보니 스스로도 재미있어 자꾸만 거짓말을 만들어냈다.

  그러던 중 문득 이상한 걸 느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은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끼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건 바우엄마가 백곡마당에서 난리 칠 때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어른들이 어느 틈에 숨어서 보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까.


  이어서 시작된 삼각구에서 다른 날보다 훨씬 많이 땄다. 비록 아침에 잃어버린 양을 메우기에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였으나 매우 흡족한 수확을 거뒀다. 그러고 나서 아이들이 다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 만약 오늘 딴 걸 집에 들고 갔다가 누나나 아버지에게 들키는 날에는 용서받지 못할 터라 당산나무 밑에 구덩이를 파고 그것들을 묻어두기 위해서였다.


  *. 커버 사진은 무복(巫服)을 입고 굿하는 모습인데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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