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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Feb 27. 2022

백곡마당의 전설

제1부 - 제4화

        * ‘백곡마당’의 전설(1부) *

               - 제4화 -



  다 묻고 일어서려는데 우리 집 쪽에서 풍물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제사 오늘 저녁에 내림굿을 한다는 게 생각났다.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한 손으로 붙잡고 힘껏 달렸다. 내가 거기에 이르렀을 때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구경 나온 사람들이 둘러 서 있었다.

  어른들에게 욕을 들어가며 머리를 들이밀자 떡과 과일이 산더미처럼 쌓인 상 앞에 흰 저고리와 흰 치마를 입은 바우 엄마가 멍석 위에 앉아 있고, 무당할머니가 주문을 외고, 신딸들은 춤을 추고 징을 두들기는 중이었다.


  “외기러 가요 불리러 가요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굽어 보살펴 잘 도와줄 제

  정한 마음으로 원수가 있거든

  내리 사랑하고 잘 도와주어라

  … … … … … …

  … … … … … …

  훠어이 훠어이 훗세 훗세

  일어나소 일어나소 

  한참 남은 서른세 살 경주 이씨 대주부인

  칠성신에 복을 빌어 이른 봄날 태어나서

  꽃 같이 피는 몸에, 옥 같이 자란 몸에

  영민하고 학덕 갖춘 낭군님과 짝 맺어서

  아들 딸 골라 낳아 행복하게 살기만을

  영험하신 신주님께 빌고 또 빌었는데…

  … … … … … …

  … … … … … …

  훗세 훗세 훠어이 훠어이 물렀거라 물렀거라

  서역귀신 간첩귀신 물렀거라 물렀거라

  우리 사위 잡아먹은 빨갱이귀신 물렀거라

  우짤끼고 우짤끼고

  우리 딸 착한 외딸 노염 탈 일 없었으나

  신주님이 신딸 삼아 으뜸무당 되라고

  시뻘건 불칼로서 가슴팍에 콱 찌르니

  우짤끼고 우짤끼고…

  … … … … … …

  … … … … … …

  신 받은 지 수십 년에 무탈하게 살아온 게

  신령님 은택인 줄 세세이도 알면서도

  지지리도 질긴 목숨, 절절이도 절박함에

  그냥 잊고 살았는데 우리 외딸 불러주시니

  이 은덕 이 고마움을 어찌 다 사뢰리까.

  그저 남은 소원 하나 두 손 모아 비오니

  우리 딸 내림굿 뒤에 큰무당은 못 돼도

  고래 심줄 질긴 명줄 오래 잇기 바라오며

  신주님 늘 모시고 천 년 만 년 살기만을

  두 손을 함께 모아 빌고 또 비옵니다

  … … … … … …

  … … … … … …”



  어지럽게 돌아가는 몸놀림과 시끄러운 풍물소리를 뒤로 돌리며 이리저리 살피던 눈에 동네에 알 만한 이는 모두 눈에 띄었지만 내가 찾는 얼굴은 없었다. 분명히 바우 녀석은 상 옆에 지키고 앉아 마치 제가 뭐가 된 듯이 뽐내는데도 그의 누나 소화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저께의 사건이 있고부터 앞으로 소화 가시나를 다시는 감싸주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여태까지 내가 그만큼 저를 생각해줬으면 그쪽에서 어느 정도는 보답을 해줘야 하지 않는가.

  내일 학교에 가기만 하면 그 가시나의 아버지가 간첩이고, 엄마는 어제 무당이 됐다는 얘기와 함께 있는 말 없는 말까지 다 지어 칠판에 적어놓을 것이다. 그걸 보고 자지러질 그 가시나의 얼굴을 떠올리니 갑자기 가슴이 콩당콩당 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굿하는 가운데서 나지막한 소리가 났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바로 “죽여라!”는 외침. 이어 그때까지 얌전히 앉아 있던 바우엄마가 일어나면서 “죽여라!”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가슴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돌발적인 상황에 무당들이 달려들어 도로 앉히려고 양팔을 잡아당겼으나 워낙 세게 휘두르는 바람에 하나둘씩 나가떨어지자 바우엄마가 구경하는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태에 사람들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지르고, 이어 그 소리가 가라앉을 즈음 바우엄마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바우엄마를 찾아다니는 발자국 소리와 무당할머니의 울음소리에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던가 보다. 그러다 웬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해하다가 가만히 귀 기울이니 무슨 소리가 나는 게 분명했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별빛이 희미한 걸로 보아 동틀 때가 가까운 모양이다. 둘러보니 그 많던 구경꾼과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무당들은 사라졌으나 그 흔적만은 흐릿하게 남아 있다.


  가느다랗게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올라가다가 언덕배기에 쪼그리고 앉은 한 사람을 보았다. 머리를 두 무릎 사이로 수그리고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으나 단박에 소화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 애를 바라보았으나, 누가 곁에 서 있다는 걸 모르는지 가느다랗게 흐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참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가까이 와서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소리를 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르는 내가 깼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또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어제까지 그렇게 밉던 그 애가 이 순간 밉기는커녕 도리어 애처로워 보였다. 나는 그냥 소화와 함께 울고 싶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 애의 어깨를 짚었는데 깜짝 놀란 듯이 고개를 들더니 나를 보고는 부리나케 제 집으로 달려가는 게 아닌가.

  한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방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사그라지는 대신 어제 당산나무 아래 묻어 둔 구슬이 생각나 그리로 갔다. 아무래도 거기는 들통나기 쉬운 장소라 다른 녀석들이 눈치 못 채게 숨겨둘 장소를 머릿속에 그리며 걷는데 그 속으로 소화가 비집고 들어온다.


  지금이 그 애가 나를 싫어하는 까닭을 하나하나 차분하게 간추려 볼 적당한 시간이다. 맨 먼저 공부 못한다는 게 걸렸고, 다음으로 싸움을 자주 하는 게 집혔다. 뒤의 것은 참으면 가능할 것 같았으나 앞의 것은 도무지 자신이 없다.

  문득 누나가 소화 집에 가 같이 공부하라고 한 말이 떠오른다. 그때는 창피스러워 한 귀로 흘려버렸는데 이제 곰곰 생각해보니 꽤 괜찮은 일인 것 같다. 함께 공부하다 보면 아무래도 친해질 수 있을 테고, 다만 아이들이 놀려야 대겠지만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어떠랴 싶다.



  이것저것 생각하던 사이에 백곡마당에 이르러 당산나무 쪽으로 몸을 돌리려다가 나는 그만 기겁을 하며 발을 제대로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싸버리고 말았다. 어젯밤 달아났던 바우엄마가 나무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엔 벌거벗은 차림 아니라 하얀 치마 하얀 저고리로.


  <제1부, 끝>



  *. 내림굿 사설 앞부분은 굿 시작에 일반적으로 들어가는 내용이라 그 뜻을 새깁니다. (뒤는 지은 내용)


  “외기로 가요 불리러 가요” : 외기(外氣)는 바깥바람이니 앞으로 무당이 되면 밖으로 돌게 됨을 뜻하며, ‘불리러 가요’는 무당이 되면 누구든지 부르면 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 ‘검’은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줄임말로 바로 단군왕검의 땅에 태어난 희(姬)의 백성을 가리키는데, ‘희(姬)’는 환웅천왕이 세운 초대 농관(農官)을 지낸 고시(高矢)의 후예인 유망(楡罔)의 셋째 아들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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