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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Feb 28. 2022

백곡마당의 전설

제2부 - 제1화

      * 백곡마당의 전설(2부)*

            - 제1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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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시에서는 부산진구 연지동 연암기념관에서 럭키(주) 뒤편을 가로질러 초읍동에 이르는 약 2km의 소방도로를 개설하기로 하고, 우선 연내에 속칭 백곡(百穀)마당까지의 200m를 착공하기로 했다.

    이로써 그동안 화재 등의 불의의 사태가 생길 시 대책이 전무했던 럭키회사 뒤 산동네 오백여 가구가 일단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1983년 3월 19일, ㅇㅇ 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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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소화를 다시 만난 건 제 엄마가 백곡마당의 당산나무에 목매 자살한 사건 이후 이십 년이 다 되어서였다. 소화네는 그 일이 있고 난 뒤 이내 우리 동네를 떠나 먼 곳으로 이사 간 바람에 소식이 저절로 끊어졌다.

  처음 한두 해 동안은 그 집 사람들, 특히 해맑으면서도 도도한 그녀의 얼굴을 떠올린 적이 몇 번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때의 일은 여름날 서풍에 구름 몰려가듯 기억 속에 아련히 사라져 갔다.


  그날, 누나와 함께 선을 보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이미 네 차례의 맞선을 통해 선이란 형식에 대해 별로 좋은 인상을 얻지 못했기에, 그런 식으로 일생의 배필을 정해야 하는 절차에 대해 상당히 거부감을 느꼈다.

  허나 누나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미혼일 때는 물론 결혼 후에도 우리 집의 생활을 책임지면서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도록 해주어 내겐 언제나 어렵고 부담스러운 존재 -가 하도 권하기에 마지못해 또 나가야 했다.


  아니 ‘마지못해’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선볼 여자네 쪽에서 던진 미끼 때문이었다. 상대가 부산에서도 가장 번화가인 서면 중심가에 육층 건물을 지닌 부잣집 외동딸인 데다 서울 모 여자대학 가정학과를 졸업했으며, 만약 성사가 된다면 아파트 한 채는 물론 원한다면 내가 박사학위 딸 때까지 그쪽에서 학비를 대줄 수 있다는 매파의 말 때문이었다.

  그것은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에서 겨우 대학을 졸업하여 고등학교 선생이나 하는 나에게 매파의 말은 너무 환상적(?)이어서, 호기심 반 의아심 반으로 나갔는데 그녀를 보는 순간 일어서 나갈 궁리를 먼저 해야 했다.


  신체에 장애가 있었다. 우연히 만나 서로 눈이 맞아 사랑한다면 평소 신체장애는 관계없다고 여기는 터였다. 헌데 그녀와 중매로 결혼하게 되면, 누구라도 사람됨에 끌려서라기보다 그 집 재산을 욕심내어 택했으리라는 인상을 남기기 딱 좋았다.


  몇 마디 얘길 나누다 화장실 간다고 하고선 슬며시 빠져나왔는데 어느새 누나가 눈치를 채고 뒤따라 나온 것이다. 걸으면서부터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건, 차에 타서는 버스 안의 사람들이 듣건 누나는 연신 나를 몰아세웠다.

  ‘아무리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내 낯을 봐서 네가 어찌 그럴 수 있니’로부터 시작하여, ‘네깐 놈이 가진 거라곤 달랑 불알 두 쪽뿐이면서 이것저것 가리느냐’, ‘선생 노릇해서 평생 모아봐야 집 한 채 마련할 줄 아느냐’ 등 속사포 같이 마구 쏘아댔지만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괜히 한 마디 했다간 그 성미에 불을 붙일 것이고, 그러면 집에 가서도 잔소리를 들을 게 뻔하여 정류소에 내려 묵묵부답으로 걷다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앞에서 고동색 플라스틱 대야를 이고 오는 볼썽사납게 생긴 웬 아낙네가 우리를 보곤 조금 겸연쩍은 얼굴로 미소 지으며 지나가는 게 아닌가. 어떡하면 누나의 잔소리로부터 해방될까 하고 궁리하던 차 마침 기회다 싶어 그녀의 뒤통수를 향해 작은 소리로 한 마디 던졌다.



  “저 여자, 이상하네. 아무나 보고 실실 웃다니… 참 기분 더럽네.”

  그런데 갑자기 누나가, “쉿!” 하는 말과 동시에 내 옆구리를 쥐어박았다.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영문을 몰라 던진 말이었다. 그러나 누나는 내 말에 곧 대답을 하지 않고 좀 더 걷다가 뒤돌아보고 나서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여자 정말 몰라?”

  “누군데?”

  “엄마가 얘기하지 않든?”

  “아니, 누군데?”

  “소화잖아, 소화.”

  “소화? 소화가 누구야?”

  “이런! 왜 있잖아. 전에 우리 집 위에 살던 너와 동갑내기 계집애 말이야, 제 할머니가 무당이던.”


  그만 우뚝 섰다. 그리고 내 귀를 의심했다. 뚱뚱한 건 뒤로 치고, 얼핏 보았지만 수건으로 대충 감싼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흠집으로 하여 똑바로 쳐다보기 괴롭던 그 여자가 그 옛날 그리도 예쁘던 소화라니.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변화가 있다 해도 그녀는 아련한 추억 속의 백설공주가 아니던가.


  “누나가 어찌 알아? 에이 아니야, 아무리 그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믿던 안 믿던 네 자유지만… 그건 그렇고 너 오늘 일 어떻게 할래. 내가 중매쟁이 집에 찾아가 사정사정해서 다시 한번 더 만나도록 해줄 테니 설마 아까처럼 또 뛰쳐나오지 않겠지? 한 번만 더 그따위 행동했다간 봐라, 너 하고 나 하고는 완전히 남이다, 남!”

  나는 누나의 화제 속에 끌려들어 가고 싶지 않았다. 대꾸 뒤에 이어질 잔소리가 싫었고, 무엇보다 소화에 대한 얘기가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전혀 얼토당토않는 얘기거니 하면서도 거기에 매달렸다.


  “정말 아까 그 징그럽게 생긴 여자가 한소화야?”

  “넌 속고만 살았니?”

  “아니 그것보다… 누나가 안다는 사실이 이상하잖아. 내 기억에는 여기 부산 아닌 다른 먼 곳으로 이사 간 줄 알고 있는데. 게다가 누난 그 집 사람들과 만만히 지낸 사이도 아니면서…”

  “됐어. 걔 얘기 괜히 꺼냈다. 너처럼 혼기에 있는 남자는 그런 재수 없는 여자 얘기는 듣지 않는 게 백 번 나아.”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누나가 그리 말한 이상 더 캐물어야 소용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잠시 그냥 담아두기로 했다. 그날 밤 같이 집에 온 누나로부터 두 시간 더 잔소리를 듣다가 옆 동네 자기 집으로 간 뒤에야 겨우 해방될 수 있었다.


  어머니와 단 둘이 되었을 때 소화에 대해 넌지시 물어보았다. 누나가 아까 얘기한 ‘엄마가 얘기 않던?’ 하던 말이 생각나서였다.

  “소화가 누구더라?”

  당신은 전혀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처음 듣는다는 듯 되물었지만, 그러한 당신의 모른 체함에도 불구하고 어린애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다 들켰을 때처럼 어색함이 한순간 눈 속에 담겼다가 빠져나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고삐를 잡은 채 재차 캐고 들었다.


  “글쎄, 옛날 우리 집 위에 살던 여자라니 생각이야 난다만… 그런데 갑자기 걔 이야긴 왜 물어?”

  오다가 본 일을 얘기했다. 그리고 얘기하면서 당신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짐작대로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 소식을 굳이 내게 감춰야 할 필요가 없었을 텐 데도 그동안 숨겨왔음에 무슨 곡절이 있다는 판단이 서자 부쩍 호기심이 더 솟구쳤다.


  “제가 알아선 안 될 무슨 비밀이 있어요?”

  “비밀은 무슨…”

  그날 밤 이리저리 유도 질문을 통하여 겨우 알아낸 건 그녀가 가까운 시장에서 장사한다는 정도였다. 그 밖의 사실은 아무리 캐물어도 모른다고 하기에 결국 혼자서 알아내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나는 학교 일에 매달려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교감으로부터 며칠 후 교육청에서 종합감사 나온다는 얘길 듣고 수업시간을 자습으로 대체해가며 서류 정리에 몰두했다.

  본래 내가 맡은 업무는 학적이었는데, 어느 사학에서든 가장 허점이 많은 부분이 전출ㆍ입 등 학적 변동사항이라 감사 나오는 장학사들도 그 점을 집중적으로 캐러들었다.


  그래서 누나로부터 선 본 아가씨와 한 번 더 만나라는 요구를 업무 핑계로 자연스럽게 물리칠 수 있었고, 한 순간 머릿속을 지배한 소화에 관한 일도 바쁘게 지내다 보니 까맣게 잊었다.

  그러다가 무사히 감사를 끝내고 같은 과 교사들과 시장 가까이 있는 음식점에서 점심을 한 뒤 헤어져 시장길을 걸어 나오다 문득 그녀가 생각났다.


  @. 커버 사잔과 글 속 사진은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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