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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Mar 02. 2022

백곡마당의 전설

제2부 - 제3화


     * 백곡마당의 전설(제2부) *
                - 제3화 -


  홀 안은 꽤 넓었지만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사람들로 빽빽하였다. 울려 퍼지는 톰 존스(Tom Jones)의 "Keep On Running", 한가운데 달린 샹들리에 불빛의 현란함, 드럼에서 터져 나오는 귀를 찢는 듯한 굉음... 마치 이 순간이 지나면 종말이라도 오는 양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다.
  겨우 자리를 구해 앉자마자 놓인 술 한 잔을 마시고 춤추러 나가자는 동기더러 먼저 나가라고 하고선 지나가는 '홍수환'이란 이름표를 단 웨이터에게 바우의 본명을 대고 불러달라고 했다.

  곧이어 곁에 온 바우 녀석은 세련된 매너와 깔끔한 유니폼으로 저의 누나와는 완전히 대조적이었지만, 어디서 만나더라도 첫눈에 알아볼 만큼 용모는 변한 게 거의 없었다. 오히려 당황한 쪽은 나였다. 이름을 밝혀도 못 알아보기에 백곡마당 얘기를 꺼내고서야 화들짝 놀라며 내 손을 잡는 거였다.
  “형, 도대체 이게 얼마만입니까? 그리고 제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서로 반갑고 궁금한 게 많았으나 둘만의 시간은 이내 훼방꾼들로 하여 끝나버렸다. 녀석은 밀려드는 손님을 맞이하러, 나는 플로어에서 돌아온 동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삼십 분쯤 거기서 시간을 보내다가 나올 무렵에 바우 아니 석호에게 오늘 묵을 여관 주소를 가리켜 주었다.


  석호가 여관을 찾아온 때는 두 시가 조금 못 되어서였다. 비닐봉지에 맥주 다섯 병과 마른안주 약간을 담아왔는데, 컵이 없어 각 한 병씩 따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그리고 서로에 관하여 상식적인 것부터 물었다. 먼저 내 직업을 학교 선생님이라 하자 녀석의 입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골목대장이며 천하의 사고뭉치였던 사람이 그런 직업을 갖게 된 데 대한 의외성에서 나왔을 게고, 나는 녀석이 같은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던 여자와 결혼하여 애가 둘이라는 말에 아직 쇠똥도 안 벗겨진 놈이 여자부터 밝힌다는 말로써 반격하였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입에서는 소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지금 사는 주변의 일들과 어릴 때의 추억거리만 되씹다가 한참 뒤에야 녀석에게서 먼저 그 얘기가 튀어나왔다.


  “우리 누나 만나보셨지요? 완전히 폐인이에요, 폐인.”
  “어쩌다 그렇게 변했어?”
  “다 그 새끼 때문이에요. 내가 그때 지금의 나이만 됐어도 그 새낄 죽여 버렸을 거예요.”
  그들 남매는 엄마가 죽자 그 동네를 떠나지 않을 수 없어 할머니가 가장 아끼는 신딸이 사는 ‘송정해수욕장’ 근처로 이사해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태 뒤 할머니마저 병이 나 돌아가시는 바람에 둘은 졸지에 고아가 되어 소화는 다니던 중학교를 중퇴한 뒤 당시 부산에서 가장 흔한 신발공장에 들어갔고, 석호는 구두닦이를 하며 겨우겨우 끼니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소화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총명함과 미모가 두드려져 학벌과는 관계없이 사장 사위라는 전무의 비서가 되었는데, 어느 날 회식 자리에 따라 나갔다가 억지로 권한 술을 마시고 취한 틈에 강제로 몸을 유린당했다. 
  그 뒤 기회 있을 때마다 그녀는 그의 노리개가 되어야 했고 급기야 그의 아내가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아이를 임신한 뒤. 결국 전무 아내의 아버지, 즉 사장이 그들 부부를 외국으로 내보내는 비상조치를 취하는 한편, 소화를 마구잡이로 내쫓으려 하자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여 작업장에서 쓰던 염산을 들이켜다 쓰러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일찍 발견돼 목숨은 건졌으나 쓰러지면서 닿은 염산에 얼굴과 상체가 군데군데 심하게 화상을 입었을 뿐 아니라, 목안이 염산에 의해 많이 타버려 말을 제대로 못 함은 물론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해행위를 계속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끌려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아기를 낳았다.
  아이는 할머니의 신딸이라는 무당이 맡아 기르다가 한 오 년 전쯤 퇴원하여 딸과 같이 살고 있는데 이제는 정신이 온전해졌고 몸도 전보다 많이 좋아진 편이다. 더욱 다행인 건 그 어려운 가운데서 태어난 딸애가 어찌나 영리한지 제 엄마 수발을 잘해 그런대로 살고 있다.

(당시의 '고무신 공장' 모습)


  이상이 흥분하여 앞 뒤 순서 없이 내뱉는 석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종합한 것이다. 그러고도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그 많은 이야기를 다 기억 못 하는 건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덕에 다음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설악산에서 오는 수학여행 버스를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에서 두 시간이 더 지나, 다음 숙박지인 온양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야 밤늦게나마 일행이 묵는 여관에 합류할 수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이번엔 선본 여자의 어머니를 만났다. 약속하여 만난 게 아니라 우리 집으로 찾아온 바람에 마주친 것이었다. 이번에는 어떠한 조건의 제시도 없었다. 대신에 꼭 자기 딸과 결혼해 달라는 거였다.
  그쪽의 말에 따르면 나처럼 쓸 만한 사윗감, 그동안 여러 번 선을 보았으나 그때마다 남자 쪽에서 관심 있는 건 그 집 재산인 것 같아 오히려 그쪽에서 거절했으나 나처럼 거기에 전혀 미련을 두지 않는 젊은이는 처음이라 했다.

  그런데 내 마음은 그쪽에서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더 거리감이 느껴져 친구를 만나려 갈 시간이 되었다는 핑계로 집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사실 따지고 들면 그녀는 다리 좀 절룩인다는 사실 말고는 두 번의 만남을 통하여 인간성도 비교적 무난하다는 인상을 느낄 수 있었고, 용모도, 학벌도, 가정환경도 최상급이잖은가. 
  특히 누난 자기 보기엔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고 하면서 그렇다고 아이 못 낳고, 밥 못하고, 남편 수발 못하느냐는 말로 몰아 댔으나 자꾸 거부감이 느껴지는 건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 가끔 시간을 내어 소화의 집에 들렀다. 일부러 시장에 들르지 않고 집으로 찾아갔기에 만나는 상대는 늘 딸이었다. 그 앤 처음 얼마 동안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더니 횟수가 거듭되면서 완전히 날 신임하는 경지까지 이르렀다. 
  그때까지 내 마음속에는 동정심 외는 다른 아무것도 없었다. 누구라도 옛날 친분 있는 이가 곤경에 빠진 걸 보았을 때 가지는 그런 감정뿐이었다. 그러나 그 애랑 자주 만나면서 자꾸만 과거 속으로 끌려 들어감을 어찌할 수 없었다.

  엄청난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또래끼리 만나 얘기하는 것 같았고, 얘기하다 보면 열띤 내 얼굴을 발견하곤 했다. 어쩌면 나는 똘똘한 그 애를 통하여 어릴 때의 소화 모습을 발견하려 했는지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초코파이 한 상자를 사 가지고 그 집을 들어섰을 때였다. 방을 막 나서는 그녀와 그만 마주치고 말았다. 나도 어색했지만 그녀가 더 어색해했다. 사실 내가 이 집을 드나드는 한 그녀랑 언젠가 한 번은 마주치리라 예견했지만 막상 부딪히니 괜히 죄지은 것 같은 심정이었으나, 그녀가 나가려는 걸 불러 세웠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그냥 그대로 지나칠 수 없었다.
  마침 방 안에는 딸애가 보이지 않아 우리는 주객이 바뀐 채 나는 방에 앉고, 저는 문지방에 걸터앉았다. 늘 멀리서 바라보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외모는 멀리서 볼 때보다 두 팔 거리 안에서 보니 더 볼썽사나웠다.

  뭔가 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얼른 입이 떼어지지 않아 방 안만 둘러보다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요?”
  처음부터 반말을 하려 했으나 실제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외양에 눌려 끝의 ‘요’ 자를 흐린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서울 가 바우를 만났어.”
  이번에는 그대로 반말을 사용했다. 순간 그녀가 놀란 듯 얼굴을 들다가 이내 도로 숙였다.
  “경희는 어디 갔어?”
  자기 딸의 소재를 묻는데도 아무 말이 없었다. 못 들었나 싶어 재차 물어보았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딸 하나는 잘 키웠더군.”
  이번에도 고개만 숙였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를 울화가 치밀어 올라 큰 소리를 질렀다.
  “왜 이렇게 됐어? 응?”
  깜짝 놀란 듯 얼굴을 들었다간 다시 숙였다.
  “백곡마당에서 목매 단 네 엄마 때문이야, 무당인 네 외할머니 때문이야, 아니면 경희 아버지라는 그 작자 때문이야?”

  말을 하면 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채 붙잡을 사이도 없이 밖으로 내달았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 왠지 모를 울화가 쉬 삭히지 않았다.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치 못하다가 이내 밀려든 허탈감으로 하여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 커버 사진은 나이트클럽 못 가는 사람들은 들판에 나가 '야전'을 틀어놓고 고고 추던 장면인데, 뒤에 나오는 고무신 공장 사잔과 마찬가지로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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