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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Mar 03. 2022

백곡마당의 전설

제2부 - 제4화



  * 백곡마당의 전설(제2부) *
       - 제4화 -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를 향해 쏘아댄 말이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겐 그녀를 나무랄 자격이 하등 없었고, 또 그런단들 이전으로 되돌려질 일이 아니었다.
  방에 그대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슬며시 눈을 감았다. 우리 집 들창 너머 보이던 그녀의 집 전경에서 나만 보면 눈 흘기던 그 모습과, 언젠가 짱구와 함께 그녀 보는 데서 철이 녀석을 두들겨 패주던 일, 내림굿 하던 그날 밤의 야단법석, 그리고 새벽 당산나무에 매달린 하얀 치마….

  그때였다.
  “아저씨 오셨어요?”
  그 애였다. 벌떡 일어나 덥석 안아주고 부리나케 방을 나왔다. 그래도 산길로 내려오다 쌀집에 이르러 돈을 주며 쌀 두 말을 그 집에 배달해 달라고 하고선 다시 달음질하다시피 뛰어 내려왔다.
  그 뒤에도 시간이 나면 들렀다. 일부러 그녀를 만나려고 시장에서 돌아올 무렵에 찾아간 적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대아에 이고 들어서다 잘못 들어온 양 도로 나가 버렸다. 집주인과 손님이 뒤바뀐 형국이 몇 번 되풀이되었다.

  악착같이 만나려면 뒤를 쫓아가도 되고 시장에 찾아가면 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 잔인한 거 같아 몰아 부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애도 제 엄마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전엔 내가 인사도 하기 전에 활짝 웃으며 안기기까지 하더니 요즘 들어 괜히 조심스러워하는 태도가 느껴졌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에서 터져 버렸다. 우리 집에서,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누나가 눈치를 챈 것이었다. 누구에게 들었는지, 직접 보았는지 어느 날 밤 막 잠에 들려고 하던 차에 방문을 열고 들어서더니 그냥 이불을 들치며 마구 쏘아대기 시작하였다.



  “이 쓸개 빠진 녀석아, 아이 딸린 데다가 볼 것 하나 없는 여편네 집엔 왜 들락거리나.”

  도로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곤 벗길 수 없도록 꽉 붙잡았는데도 위에서 쏘아대는 말소린 마치 침을 묻힌 집게손가락이 창호지를 뚫듯이 이불을 통과하여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넌 도대체 정신이 있는 애니, 없는 애니? 얼마 안 있음 장가가야 할 녀석이 부정 타게 시리 재수 없는 그따위 여편네를 만나긴 뭣 때문에 만나!”


  더 이상 들고 있을 수 없어 이불을 걷으며 대꾸했다.
  “재수 없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몰라서 묻니? 그 집이 어떤 집안이며, 제 엄마가 어떻게 죽었으며, 또 그 여편네가 처자식이 있는 남자의 애를 낳고 정신병원 신세까지 진 데다 반벙어리라는 걸 몰라서 물어?”
  내가 그 집 속내를 털어놓은 적이 없었으니까 말투로 보아 누난 그 집 사정을 진작부터 훤히 꿰뚫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 집이 무당 집인 거야 요즘 세상에서 보면 직업엔 귀천이 없으니깐 흉 될 게 못 되고, 제 엄마 일은 제 엄마 일이잖아. 또 소화가 그렇게 된 게 제 잘못이야, 다 제 운명이지.”
  “이 녀석 말하는 것 좀 봐. 그러게 엄마 내가 뭐랬어. 절대로 그 여편네 얘긴 하지 말랬잖아요. 나도 입이 가볍지만 엄마도 입이 가벼워서 참 큰일이야.”
  “누나도 너무 그러는 게 아니야. 이웃사촌이란 말도 있는데, 바로 윗집에 살던 사람을 그리 매정하게 모른 체 할 수 있어?”
  “모른 체 하지 않으면 불쌍하다고 데리고 살 거야, 어쩔 거야?”
  “데리고 살 수 있음 데리고 살아야지.”

  무심결에 한 말이었다. 정말 무심코 한말이었다. 누나와 어머니의 입에서 놀람의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러고도 한참 더 말씨름하다가 두 사람이 하도 몰아세우는 바람에 대충 겉옷만 걸쳐 입고 집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가까운 포장마차를 들어갔다. 한 병을 다 비울 때까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술만 들이켰다. 다시 한 병을 더 시키고서야 아까 집에서 내뱉은 ‘데리고 살 수 있음 데리고 살아야지’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단순히 누나에 대한 반발에서 그리 말했던가, 아니면 내 잠재의식 속에 있던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음인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다 일어서니 다리가 휘청거렸다. 집으로 가려다 방향을 바꾸어 그녀 집을 찾아갔다.

  그 애는 자고 있었고, 그녀가 놀라며 일어났다. 그 순간 나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돌연한 행동에 그녀는 나를 뿌리치려 했다. '사랑한다' 했던 것 같다. '처음부터 내겐 너밖에 없었다'고도 했던 것 같다. '너희 두 모녀는 내가 책임진다'라고도 했던 것 같다.

  그녀의 거부하는 팔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사랑한다는 말에 흔들렸는지 아니면 옆에 자는 애가 깰까 봐 몸을 사린 행동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옷이 벗겨지고,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은 것 같았고, 다시 한번 '내겐 너밖에 없어'란 말을 한 것 같았는데 이내 잠 속에 빠져들었다.


  새벽녘에 목이 타는 거 같아 눈을 뜨니 옆에 애만 여전히 자고 있을 뿐 그녀는 없었다. 옷을 입고 나와 부엌에 가 찬물 한 사발을 들이켜니 정신이 들었다.  길가로 나왔다. 그녀를 찾아볼까 하다가 문뜩 어젯밤 취중에 한 일이 부끄러워 그만 내려오고 말았다.

  다시 우리 집에선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당연히 누난 펄쩍 뛰었고, 어머닌 자리에 그대로 누워 버렸다. 게다가 학교에는 어떻게 알려졌는지 나를 대하는 선생님들의 눈 속에 잔뜩 호기심을 담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를 범한 도덕적 차원에서든, 동정심에서든, 또 옛날 추억의 연장선에서든 그 길만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게다가 묘하게도 주변에서 막으면 막을수록 꼭 이루고 말겠다는 투지가 활활 타올랐다.

  그렇지만 한동안 그곳을 찾아가지 않았는데, 그건 그게 당분간 그녀를 편안하게 해 주리라 여겼고, 막고선 벽을 넘는데 필요한 시간을 얻고자 함이었다. 나의 이기심이 또 그녀를 불행에 빠뜨리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 한편에는 정말 진심을 다해 두 모녀를 사랑할 수 있다는 믿음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꺾이리라 여겼던 두 사람의 기센 꺾일 줄 몰랐고, 드디어 어머니가 단식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실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누나 혼자라면 극단적으로 남매의 정을 끊을 작정을 하면 그만이나 당신이 그리하는 덴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거의 매일 술에 절었고, 그로 인해 교감에게, 나중엔 교장에게까지 지적받았다.

  이젠 어떻게든 매듭짓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낀 그날, 나는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집 문 앞에 이르자마자 집안이 온통 비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 예감은 적중했다. 그 집, 애당초 집이라 하기엔 너무나 초라한 움막엔 휴지조각 몇 개가 춤출 뿐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이웃 집집마다 쫓아다녔고, 구멍가게마다 가 물어보았지만 어디로 갔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끝내 동사무소까지 가 전ㆍ출입 대장을 뒤져보고, 그 애가 다니던 국민학교에 가 담임에게 물어보았지만 실마리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거처럼 사라진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극도로 취하여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얼마 후 정신이 들어 푹신한 느낌에 어디에 누워 있는가를 확인하려 할 즈음 머리 위에서 엄마와 누나가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쩌자고 거기 당산나무 밑에 가 쓰러졌을까. 길가는 사람이 발견했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으면 귀신 씌어 큰일 날 뻔했어.”

  <제2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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