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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Mar 07. 2022

백곡마당의 전설

제3부 - 제2화

  <백곡마당의 전설>


  * 제3부 - 제2화 *


  그런데 모르고 지낼 땐 전혀 의식 속에 멀어져 있던 게 실마리를 잡게 되자 궁금증이 물밀 듯이 치올랐다. 그러나 소화에 대해 이것저것 알고 싶은 조그만 바람은 그때 갑작스럽게 끼어든 한 무리의 훼방꾼들에 의해 산산조각 나버렸다. 그들은 그녀에게 귀엣말로 무슨 말인가 전했고, 그 말을 듣더니, “다음에 또 뵈어요” 하곤 내가 손을 내밀기도 전에 부리나케 떠나버렸다.

  그날 이후 영기에게선 변화가 생겼다. 다시 전처럼 책을 가까이하면서 도서관에만 박혀 사는 생활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가만히 뜯어보면 전의 모습으로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었다. 녀석의 눈 속에 그늘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리고 ‘다음에 또 뵈어요’란 말을 남기고 떠난 그녀에게선 또 뵙겠다는 연락이 없었다. 일간 신문을 통하여 시위의 주요 현장에서 활약하는 그녀를 접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 희망이던 영기마저도 모른다고 하기에 알아볼 통로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수 연구실로 배달된 한 통의 우편물을 받았다. 그녀에게서 온 편지였다.



  “… 폐쇄된 공간에선 사랑도 미움도, 정의도 불의도, 번뇌도 극복도 없고 오직 사유(思惟)만이 존재하는군요. 이럴 땐 누구에게라도 전달하고픈 사연을 표현할 도구가 말 외에 글이 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어요.

  아저씨, 교수님이란 호칭보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불렀던 그 호칭대로 부르고 싶어요. 그건 아마 아저씨와 우리 집안과의 관계를 알고 있기 때문인가 보죠. 어릴 땐 몰랐어요, 이것저것 사다 주니깐 마음씨 좋은 어떤 분이란 것밖엔. 그러다가 외삼촌을 통하여 백곡마당과 외할머니의 죽음과 무당이시던 증조할머니의 굿하던 모습과 그리고 아저씨가 우리 엄마를 짝사랑했다는 - 이런 표현이 적합한지 모르지만 - 얘기도 듣고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과정보다 더 험한 삶을 산 사람은 없다고들 하지만 제 엄마의 삶은 비극 그 자체였어요. 엄마가 현재의 저를 이해 못하듯이 저도 과거의 엄말 이해 못했어요. 엄마는 철저한 운명론자였어요. 예를 들면 할머니가 무당이었고, 엄마가 무당이 되려다 말았으니, 자신의 몸 어딘가에 그런 기가 흐르니까 그걸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것 말이죠.

  그러나 저는 반대로 철저한 극복론자죠. 현실적인 삶은 자신의 의지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중시하지요. 그러다 보니 엄마와 난 늘 부딪히고. 아니 엄마는 그러지 않은데 제가 엄마를 멀리하게 되고. 하지만 전 알지요. 엄마가 얼마나 저와 제 동생, 을 사랑하는지. 참 아저씬 모르죠? 제 밑에 열한 살짜리 사내 동생이 있다는 걸.

  전 요즘 들어 엄마를 이해하려 해요. 대대로 대물림해 온 무당 가문, 당산나무에 목을 매달았던 어머니, 그리고 전환시대의 희생양이 되신 아버지, 이 모든 것들이 엄마를 구속하는 요건들이었지요.

  아 참, 아저씨가 모르는 사실 또 하나 알려드릴 게요. 엄마의 아버지, 그러니까 제 외할아버지에 관한 얘기예요. 당시에 백곡마당 주변의 사람들에게 간첩 노릇을 하다 사형당한 걸로 알려졌다면서요. 하기야 조작해놓은 죄목으로야 그렇죠. 그러나 아직도 진실이 드러나지 않아 왜곡된 상태로 전해지고 있는 그 사건에 연루된 거죠.

  제가 이런 일을 하면서 깨달은 사실이지만 당시의 지식인, 선각자들이 비민주적, 비이성적 체제 하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당했는지…. 제 외할아버지도 그런 류의 희생양이라는 걸.

  아저씨, 이제부터 교수님이라 부를게요. 교수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었으니까요. 아마 교수님은 저같이 설치고(?) 다니는 학생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마찬가지로 저희들도 교수님 같은 분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아니 제가 생각하는 그런 부류에 교수님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대단히 죄송스럽습니다만….

  현 체제에 빌붙으려는 자들을 비웃으며 상대적으로 도덕적이라며 자기를 합리화하거나, 체제 비판적인 이들에겐 그런다고 역사가 뒤바뀌느냐고 뒤에서 욕하는 소위 양비론자들. 정말 역겨워요. 전 지부상소(持斧上訴)란 말을 무척 좋아해요. 도끼를 몸에 지니고 임금 앞에 가 바른말을 아뢰고 내 뜻에 맞지 않는다면 그 걸로 자기 목을 치라는 거죠.

  그러나 교수님 같은 분들은 우리들에게 아주 점잖게 이렇게 말을 하시죠. 모든 현상을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보라고. 그리고 기울어진 면만 보지 말고 바로 선 면도 보라고.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본들 기울어진 면은 기울어진 면일뿐 결코 바로 선 면이 될 수 없지요…”


  그녀의 편지는 그 뒤에도 두 장 더 이어졌다. 다 읽고 나자 아픈 곳만을 골라 찌르는 표현 때문에 온몸이 쑤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아픔은 언젠가 시위가 계속되던 중 수업을 강행하려 하자 몇몇 학생들이 날더러 어용교수라고 몰아붙였을 때보다 더 아프게 느껴졌다.

  그런데 묘한 건 다음이었다. 그녀의 이 편지는 그녀의 엄마, 소화를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에 불을 붙여 놓은 것이었다. ‘찾아야 한다’, ‘찾아야 한다’는 울림이 마음속 저 맨 밑바닥에서부터 쉴 새 없이 들려왔다.


  그러나 경희는 어디에 숨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고, 친구를 통해 집주소를 알려는 첫 시도는 실패했다. 이구동성으로 모른다는 대답을 들었을 뿐이었으니깐. 다음으로 학적부(學籍簿)를 근거로 추적하는 일을 택했는데 시작부터 벽에 부딪혔다. 학적부는 부망(父亡)과, 엄마가 한 소화란 사실과, 남동생이 한 명 있다는 사실까지 알려주었지만 거기 적힌 곳을 찾아갔을 땐 이미 몇 년 전에 전출한 뒤였다.

  더욱 난감한 건 전출한 곳의 주소지를 수소문하여 찾아갔으나 그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고 다시 옮긴 최종 주소지엔 거주하고 있지 않았다. 다만 몇 번의 걸음에서 얻은 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그렇게 집을 자주 옮긴 게 딸 일로 하여 형사들이 하도 찾아와 닦달해서라는 것과, 두 번째는 최종주소지의 옆집에서 들은 건데 부산시 영도구 어딘가에서 점을 치며 살 거라는 거였다.


  ‘소화가 점을 친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으나 잡을 지푸라기는 그것밖에 없었으니 거기서부터 실마리를 풀어가야 했는데, 그것 역시 만만치 않았다. 부산에서 철학관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 영도구였다. 그래도 거기 어느 곳에든 자리 잡고 있으면 찾을 가능성이 있으나, 만약 애시당초 거기로 가지 않았거나 중도에 다른 곳으로 옮겼으면 말짱 헛일이 아닌가.

  그동안의 외도(?)로 동료 교수들에게나, 학생들에게나, 집사람과 아이들에게 들통나지 않도록 시간 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또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다니…. 그러나 나는 이미 생활 속에 깊이 자리한 이 혹을 떼 내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맨 처음 철학관이 밀집되어 있는 동상동부터 훑었다. 한데 철학관의 주인이 남자일 경우엔 그냥 되돌아 나오면 상관없었으나 여자일 경우에 한 가지 문제점이 생겨났다. 소화에 대한 기억은 십여 년 전의 화상 입은 그 얼굴이야 생생히 떠올랐지만, 문제는 그런 일을 하는 여자들 대부분이 이상야릇한 옷차림에다 화장을 했거나 심지어 얼굴을 가리는 경우도 있어 어린 지 늙은 지, 흉터 있는 얼굴인지 맨 얼굴인지조차 분별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그동안 ‘이 사람이다’ 할 만한 얼굴을 만나지 못하고 동상동에 이어서 영선동과 봉래동을 거쳤다. 처음 계획은 진주에서의 사흘간의 세미나 일정 중 하루만 참석했다가 빠져나와 이틀간 투자할 작전이었는데 예상외로 시간이 걸려 이틀 더 수업 외의 시간을 쪼개어 마지막 일정으로 청학동을 돌았다.


(한국민속촌에 있는 '무당의 집')


  ‘태백산 산신 도사’, ‘아기 명도’, ‘고춧가루 점바치’란 괴상한 이름을 거쳐 한길에서 벗어난 골목에 이르렀을 때 ‘처녀 도사’라고 자그맣게 붙은 간판이 보였다. 첫 짐작에 점치는 주인공이 처녀라면 들어가 봐야 시간낭비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 따라 소변이 마려워 그것을 해결할 겸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바깥에서 본 그대로 안도 매우 초라했다. 손님 대기실인 성싶은 좁은 그곳엔 시멘트 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나무로 된 긴 의자 하나와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던 구형 석유스토브 하나가 덩그렇게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안쪽 방 안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방문 앞을 살피니 슬리퍼 하나와 여자 구두 한 켤레가 눈에 띄어 잠시 귀 기울였다.


  처음에는 도사인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흘러나오는데 그 소린 처녀의 목소리라기보다 차라리 변성기에도 못 이른 어린애의 목소리 같아 역시 잘못짚었구나 하는 심정에 볼일이나 해결하려 했다.

  옆문 쪽에 표시된 화살표를 따라 가 화장실에서 볼일 보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나왔어도 안 손님과의 얘기가 끝나지 않았는지 계속 말소리가 흘러나오기에 그냥 나가려는데, 바깥문이 열리면서 책가방을 맨 초등학교 3ㆍ4학년쯤 되는 사내애가 들어오면서 안쪽을 향해 “엄마!” 하고 부르는 게 아닌가.


  순간 나는 밖을 향하던 발길을 멈췄다. ‘열한 살짜리 남동생이 있다.’고 하던 소화 딸 경희의 편지 글귀가 소리로 변하여 귀청을 때렸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안쪽 문이 열리면서 손님인 듯한 여자가 나오고 꼬마가 방에 들어간다 싶더니 이내 나와선 내가 저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는데, 커버 사진은 전주 완산동 무속인촌 모습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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